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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도이상돈의신앙이야기 [제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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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렬한 글인데도 불구하고 늘 애정으로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N병원 내과원장님이 온 가족과 함께 M교회에 출석하고부터 M교회는 경사가 난 것 같더군요. 특히 제 아내는 너무도 좋아 했습니다. 저와 결혼 하고 나서 얼마 후부터 줄곧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세례 받았을  때 보다 더욱 좋아 했었다고 말씀드리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여기서 저와 제 아내가 맺어진 과정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곧 전개될 많은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차츰 이해하게 되실 것이라 믿고 그렇습니다. 제 아내가 저와 결혼하기 전에 장모님 영향으로 자기 신앙은 기독교라고 주장은 했지만, 세례조차 받은 일 없던 그런 시시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쉽게 나보다 신앙에 관한한 많이 어리다고 단정적으로 생각했으며, 그 생각은 사실 철들고 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 유일한 것이기도 합니다..그랬던 제 아내가 어떻게 그렇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됐느냐 하면 그건 순전히 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 결혼한 초창기의 일입니다. 결혼 초기의 우리 집 형편을 좀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저의 형제자매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라고는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두 분 이서 살아오시면서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기셨던 온갖 고생담이 담긴 인생 말씀이 거의 전부이고 그리고 혼자 살기에도 빠듯한 논밭과 현재 큰형님이 살고 계신 시골의 집 한 채가 우리들이 상속 받을 수 있는 재산의 전부 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관계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은 사실 유난히 독립심이 강한 편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실이 엄연히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립심은 아버지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최고의 재산상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나 우리 형제자매들은 부모로부터 재산상속 한 푼 물려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불평불만 하는 형제자매들은 없으며 나름대로 성실하고 부지런 하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현재 부끄러울 만큼 가난하게 사는 형제자매들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저의 형제자매들은 지금도 모두들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랑 같습니다만,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애가 남달리 큰 편이라고 자부합니다. 아마도 물질의 상속은 없었어도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상속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우리 집 가풍을 잘 모르고 시집 장가든 며느리 사위들은 처음엔 다들 어리둥절하더군요. 서로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형제자매들끼리 물질적으로는 부탁한번 하는 일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형제끼리 물질을 거래하기 시작하면 본의 아니게 우애에 금이 간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중에 그런 내막을 알게 되어 몇 년 지나면 다들 동화가 되더군요. 이런 형편 이다보니 아무리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형제자매들끼리 의지하거나 의탁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힘든 만큼 다른 형제자매들도 그만큼 힘들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다 보면, 삶이 너무도 힘들고 고달파서 부모나 형제자매들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한때 제 아우 “이장로” 가 그렇게 살기 힘들어하며 방황 했던 것도 아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집안의 어려운 현실이 싫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우가 그렇게 힘들어 할 시기는 저 역시 셋방을 전전하는 가난뱅이 시절이라서 그런 아우에 대하여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꼭 재물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보다시피 나 역시 가진 것 없이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늘 미래에 대한 큰 꿈과 희망은 잃지 않고 살고 있다. 큰형님도 늘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람은 죽는 날 까지  공부 하면서 살아야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렇게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네 형수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어떻든 뭔가 의지하고 힘이 되는지 처음보다는 많이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으니까 너도 교회나 한번 나가 보거라. 아마도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곳 없이 너무도 외롭다고 느껴질 때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 제 아우가 너무도 힘들어하기에 대충 이런 정도의 말을 해 준 것 같은데요, 어느 날 보니까 서울에 “금란교회” 라고 지금은 아주 엄청난 대형교회로 성장해 있더군요. 아우가 그 교회에 처음 다니기 시작하면서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며 그 좋아하던 술, 담배, 딱 끊고 열심히 정말 열심히 닥치는 대로 일하고 노력하더군요.

그러더니 약15~6년 전에 친구 따라 남원으로 내려가 사업하기로 했다더니 하는 일마다 잘 풀렸는지 제가 그렇게 여러 번 자랑했던 것처럼 장로로 까지 피택 되어 이웃들에게 존경까지 받으며 잘 살고 있습니다.  

아내이야기 하다가 제 아우를 이야기 했는데, 사실 앞으로도 또 이야기 하게 될지 모르지만, 제 아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고  더욱 더 잘 살고 싶어서인데, 큰 은혜 받고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모델이 아마도 제 아우 일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또 이야기하기로 하고 제가 결혼 초에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부자로 잘 살고 싶어 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러 면, 사업을 해야만 하겠더군요. 그러기 전에 회사에 다니고 했던 일들이 좀 있지만 생략하고, 아무튼 그렇다보니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을 때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말씀 드렸듯이 상속 받은 것 하나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실 제 아내는 제가 아주 부자인줄 알고 시집오게 됐는데,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라 이러다보니 또 그 이야기 잠깐 해야 할 것 같군요. 아내를 만난 것은 고향에서 입니다. 고향에 중학교 동창 녀석이 어느 날 그러더군요.

당시에 통계청 소속 지방 통계사무실에 입사한지 얼마 안 되어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친구로 지금은 높은 사람 됐던데요. 하여튼 그 친구가 자기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고 자기와 동성동본인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 소개해 줄까?  이렇게 말입니다.

동성동본만 아니면 자기가 사귀고 싶은데 아깝다는 강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입니다. 당시에 총각이라 여자들 치마 두른 것만 봐도 마음이 싱숭생숭 할 때인데, 싫다고 했겠습니까? 이래서 천생연분(天生緣分)이 이루어 진 건데 결혼을 하기 까지는 나름대로 전설 같은 사연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생략합니다. 하여튼 중매쟁이란 친구도 필요 없더군요. 왕창 뻥튀기 해 놔 서 처음부터 제 아내는 내가 엄청난 부자 집 도련님으로 알고 있더군요. 아니라고 넌지시 말을 해 줘도 그렇다면, 어떻게 서울까지 가서 공부했겠는가 하고 생각 했는지 오히려 더 신뢰하는 눈치더군요.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뭘 잘 따질 줄 모르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을 무척 사랑하는 편입니다. 내가 뭘 쉽게 믿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더욱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 아내가 너무도 좋아서 그냥 슬그머니 넘어가 버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제 아내의 길고 긴 고난 여로 의 시작입니다.

저라는 인간은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밝혀서 옳다고 인정 되어야만, 겨우 믿게 되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고백하건데 사실은 믿는 흉내만 내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순수한 여인을 만나고 나서 당연히 뿅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결혼을 하게 됐고, 제 생애에 이렇게 큰 축복은 사실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늘 이부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순수했던 여인이었기에 결혼하고 나서 바로 환상이 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지아비만을 섬겨야한다는 뿌리 깊은 사상에다가 이혼이란 것은 하는 순간 바로 지옥으로 떨어져 죽는 줄 알고 있던 아내인지라 처음부터 그냥 무조건 순종적인 삶을 살기 시작 하더군요. 모든 것이 결혼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냥 자신의 운명으로 쉽게 받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함께 있는 시간동안에는 늘 밝고 명랑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집에 없을 때는 너무도 외롭고 쓸쓸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제가 몇 년 전에 철들고 나서야 지나간 과거의 그런 일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제 아내가 결혼 전에 배운 것 은 여자란 오로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은 당연한 일로만 알고 있던 여자 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무 소식 없이 집나가서 며칠씩 외박하고 다니고, 생활비가 떨어져도, 남편에게 푸념하거나 하는 것은 여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고, 제 믿음대로 사실 제 아내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고향에서 결혼하자마자 바로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에 어렵게 셋방살이 하며 이사도 여러 번 다녔습니다. 제 아내는 사실 결혼하기 전까지는 결혼한 사람들이 그렇게 남의 집에 방한 칸 얻어서 살림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이해조차 못하던 여자라고 할 수 있었는데요. 서울 구경 한 것도 신랑 따라 올라온 그때가 처음일 정도로 순수하고 깨끗한 여자 그 자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낯설고 물설 은 타향에 오로지 신랑하나 믿고 따라왔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습니다. 저야 그런대로 친구들도 있고 여기저기 활동할 공간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입장에 대하여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던 철면피가 바로 저였습니다..

아무튼 그랬는데 어느 날 아내가 제게 교회에 다니겠노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철면피 이긴 했지만,  얼마나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힘들었으면 저러나 싶어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 후로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도 되고 했으니 그만 다니라고 해도 요지부동(搖之不動)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내가 처음에 교회 다니면서 세례 받고 했던 교회들은 대개 중형교회들로 “목사님 뵙기가” 그렇게 쉬운 교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 수원으로 이주 하고나서부터는 지금까지 대충 설명해 드린 대로 그렇게 된 겁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자세히 설명 드린 것은 앞으로의 전개될 상황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 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합니다.

“주일을 평안하게 보내시고 늘 그렇듯이 행복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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