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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도이상돈의 신앙이야기[제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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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의 이야기 시작 합니다..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제가 철들고 난 이후로 3년여 가까운 날들을 기쁨과 감사함 속에 늘 써오고 있는 어설픈 기도일기 중에서 어제의 일기를 소개하고 시작 할까 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본의 아니게 특정인들에게 누가되는 글을 쓰게 되는 것이 많이 마음이 아파서 그냥 제 심경을 조금 이해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西紀 2003年  4月 22日  火曜日  봄비 내린 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感謝합니다. 늘 그렇듯이 함께하여 주심을 感謝드립니다...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시여 - 요즈음 제가 갈릴리 마을에 연재하고 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引導하여 주고 계심을 無限感謝드립니다.- 그런데 저의 眞實이어디에 있든지 그동안 제 글을 읽으면서 많이 아파하고 계신 분들이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께 늘 報告 드렸듯이 그분들의 아픈 傷處들을 治療하는데에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연재하기 始作했습니다. 그런데 제 글을 읽고 있는 사람 들 중에는 갈수록 너무나 힘들어하고 있는 분들이 있음이 느껴져 마음이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저들에게 平安을 주시옵기를 懇切히 懇求드립니다. 저는 그분들이 하나님의 特別한 使命을 받고 얼마나 휼륭하고 큰 일을 해야하고 또한 하고 계신지를 잘 理解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 許諾해 주시옵기를 懇切히 懇求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늘 그렇듯이 오늘도 言行一致의 삶을 살기 위해 最善을 다할 수 있도록 許諾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祈禱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럼 이야기 시작 합니다. 차 원장 가족 이야말로 M교회에 있어서는 보배 중에 보배로써 가장 큰 부자  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늘 온 식구가 일요 예배 후 점심식사는 당연히 교회에서 해결 했는데 당시에는 우리 집 또한 그렇게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집안끼리의 교류도 활발해서 친척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것을 서로가 알게 되었는데요. 당시에 차원장이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고 자세한 내막에 대하여 말은 안했으나 자식들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제가 제게 넌지시 그랬거든요. “K아버지(제 아들 이름을 붙여서 이렇게 불렀음)도 아들 K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된 것 아닌 가요” 이렇게 말입니다. 전에 C목사님과 집에 찾아왔을 때 달랑 “불교시군요.” 했던 말은 이미 잊은 지 오래인 것 같고, 근본적으로 신앙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분이고 다만, 막연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안 다니는 것보다 낫다는 정도의 신앙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이 있었는데, 차원장의 기대에는 못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 완전히 옆으로 새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아들에 대하여 그렇게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므로 자신의 고집을 꺽 고 교회에 나왔을 것이다. 뭐 이정도로 저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충 그런 정도로 서로에 대하여 알고부터는 더 이상 신앙에 대한 부분은 애써 말을 아끼고, 대신 저는 의학에 대하여 알고 싶어 했고, 차 원장은 제 직업에 대하여 알고 싶어 했으므로 서로 주고받으며, 기본적인 상식은 많이 알게 되어 그것이 지금도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글을 쓰다보니 주로 차 원장과의 관계에 대하여 쓰게 됐는데 말입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M교회에 제 발로 찾아간 이유가 앞에서도 밝혔듯이 차 원장의 고단수 잘난 척 “불교시군요” 라고 말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 했으므로 의도적으로 접근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아주 소탈하신 분으로써 저에 대하여도 다른 종교관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고 굉장히 호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상할 정도로 급속도로 친해져서 아무튼 아내와 송이엄마는 꼭 친 자매 같았고, 차 원장과 저와도 상당히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거에 내가 술병이 나서 N병원에 찾아가서 차 원장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말도 하게 됐는데,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더군요. 당연한 일이지요. 하루에도 수없는 환자들을 진료하는데, 일이년 년 전에 있었던 환자를 기억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냥 수긍하면 될 텐데, 자기는 그렇게 일주일 정도 치료를 받은 환자를 기억 하지 못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자기 병원에 오지 않았던지 아니면 다른 분의 진료를 받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N병원에 내과의사분이 두 분 이셨음).. 금방 확인이 되는 일도 아니고 해서 그러냐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배탈이 나서 이거 잘됐다 하고 차 원장 찾아가서 치료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며칠 전 일을 얘기 했더니 “아참! 그거요 기록(chart)을 찾아보니 진짜 내가 진료 한 게 맞더군요.” 하면서 웃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부터  더 가까워 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게 차원장과 유별나게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다른 교인들과도 상당히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지냈고, 어렸을 때 이후로는 주로 비 신앙인들의 세계에서만 생활하다가 비록 장소는 절에서 교회로 옮겨왔지만, 신앙인들과의 교류는 잃어버린 고향을 찾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즈음에 M교회의 교인은 대략 성인이 약20명 정도로 기억 됩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그렇게 작은 식구로는 사실 목사님 사례비도 제대로 드리지 못합니다. 당시에 제 아내가 재정을 맡고 있었는데, 목사님께 늘 면목이 없어 했습니다. 자기의 잘 못으로 그렇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차 원장님이 십일조라도 해 주면 목사님의 사례비만큼은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제때에 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설적인 사건을 계기로 교회에 출석 한 것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 차 원장은 헌금을 주일헌금으로 몇 만원씩 하는 것이 고작 이었으니까요. 가끔 특별헌금으로 약간 많이 할 때도 있긴 했습니다.

어떻든 대화를 하다보면, 은연중에 월수입이 거의 천만원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원장님께서 십일조만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해 주시면 더 많은 복을 받아서 종합병원도 하실지 모르잖아.” 뭐 이런 생각을 제 아내는 했을지도 모릅니다.

목사님의 사례비로 책정된 몇 십만원 조차도 제때에 드리지 못하는 아픔이 상당히 컸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저도 역시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였으므로 차 원장이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하여 별 생각이 없었는데 목사님이하 모든 교인들 생각은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자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처음에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그런 설교를 주로 했고 헌금에 관련한 설교는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다가 가끔씩 새 가정이 새로이 출석하고 교인이 늘어 날 때마다, 계속해서 제가 처음에 출석해서 들어야 했던 설교를 약간씩 수정된 내용으로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그랬었는데 마지막 새로운 교인으로 등록된 분을 정점(定點)으로 하여 거의 1년여 늘 같은 얼굴들만 만나게 되면서부터 서서히 목사님의 설교내용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신앙에 대한 본질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거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중에 십에 일은 자기 것이 아닌데 왜 그렇게들 도둑질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들 사니까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거라면서 너무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불쌍한 교인들 생각에 눈물까지 글썽해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 했습니다. 나야 뭐 조금밖에 도둑질 않고 있으니까 괜찮은데 차 원장은 큰 도둑놈 된 기분이 들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도둑질 그만하고 헌금 많이 하겠구나. 했는데, 완전히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제 아내가 재정을 맡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때부터 조금씩 송이엄마의 찬송가 소리도 힘이 많이 빠지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럴수록 목사님의 친절하신 가르침은 계속됐고, 어떤 때는 헌금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 꺼내서는 흔들며 그러시더군요..

당시에 설교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상당히 순화시켜서 제가 좀 옮겨 봅니다. 다른 교인들은 어땠는지 모르는데,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거든요. “어느 분이신지는 모르지만, 헌금 봉투에 넣지도 않고 늘 이렇게 달랑 천 원짜리 한 장만 헌금함에 하시는 분이 계신데 정신 차리세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렇게 장난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달랑 천 원짜리 한 장 헌금함에 집어넣습니까? 손이 부끄럽지도 않던 가요.“ 그러시면서 어느 교인이 그러는지 잘 모르시는 목사님께서 당시에 남전도회장직을 맡고 있던 신 집사님을 많이 바라보며 설교를 하시더군요.

그 당시 신 집사님은 조그만 사업을 하고 계셨었는데, 사업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지 늘 힘들어했던 것 같은데요. 사실은 제가 사는 아파트에 처음부터 함께 입주해서 사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아파트마저 팔아서 사업에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것 같았다고 짐작한 겁니다.

하여튼 그분이 늘 그렇게 천 원짜리 한 장 달랑 헌금 하셨던 분이신지는  모르겠으나 C목사님 설교 들으면서 유난히 얼굴이 벌개 지고 당황하는 것 같았는데요 아마도 회장님으로써 교인들이 하나님을 성의 없이 섬기는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겠지요?  

아무튼 그런 설교가 있고 난 후로 그래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면 안 되는 것이로구나 하고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하셨나 봅니다.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면서 교인이 20명 정도 이지만 그래도 누가 그렇게 헌금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던 그 어떤 분이 그 후로는 거금 이 천 원씩 이나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쯧쯧쯧....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가호가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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