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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도이상돈의신앙이야기[제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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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인하여 함께하고 있게 되는 갈말가족들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야기 시작 합니다.


그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후로 완곡한 표현이긴 했지만, 어제 통쾌 했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 정도가 훨씬 컸습니다. 요즘에도 제가 가끔 인용하고는 하는 말이 있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겉과 속이 한마음이 되어 그럴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는 삶을 사는 지금은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는 그런 믿음이 제게 없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이었습니다.

거꾸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행복은 나에겐 곧 불행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말입니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대로의 느낌을 갖게 될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조건이 붙어야 했습니다. 즉, 나와 불과시의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에서나 해당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때이니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어떻게 슬프고 안타깝고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성립될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들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제 견해를 좀 설명해 볼까 합니다. 제가 참으로 사랑하는 저와 장모님의 관계를 “예”로 들어서 하겠습니다. 장모님께서 사위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사위 나는 사위를 참 많이 사랑하고 있네.”

첫 번째인 경우 그 말을 듣고 그 사랑을 의심하는 사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겉으로는 웃으면서 “아 네 고맙습니다.” 하겠지만 마음속으로 “사랑은 무슨 개풀 뜯는 소리야, 딸한테 잘하게 하기 위해서 쇼하고 있네,” 이러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인 경우 그 말을 듣고 그 사랑을 참으로 믿는 사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겉으로 웃으면서“아 네 고맙습니다.” 하면서 마음속에서도 진정으로 “참으로 좋으신 장모님이셔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세 번째인 경우 그 말을 하면서 그 사랑을 의심하는 장모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사위 나는 사위를 참 많이 사랑하고 있네.” 라고는 하지만 사위가 “아 네 고맙습니다.” 했을 때 겉으로는 웃고 계시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이 구 더러워라 딸년만 아니면 내가 저런 녀석에게 이런 말 하지 않을 텐데.” 이러지 않겠습니까?  

이상이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견해로써 “진실한 사랑” 은 당연히 두 번째일 것이고, 그런 관계에 있을 때에만, 나의 행복은 곧 너의 행복 너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 이런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는 사랑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다 공염불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였으므로 목사님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은 될 수가 없었던 것이고, 목사님께서 수없이 저를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지 못하는 위 “예제”의 첫 번째에 해당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록 목사님께서는 진실로 저를 사랑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 사랑은 성립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여튼 그런 사건을 계기로 아내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동안 숱하게 설교하던 것들이 어느 정도 맞았다는 것이 증명이 된 셈이니까 교회에 그만 다니자고 하면 그렇게 하겠구나.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묵묵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을 저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내가 그 당시 10여년 넘게 교회에 다니면서 얻은 것은 자신이 원하던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적은 별로 없었지만,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나면 “엄청난 재앙”이 따른다는 것만은 철썩 같이 믿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좀 의심이 많고 생각하는 것이 단순하지 못해서 뭘 잘 믿지 못하는 체질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은연중에 저도 모르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는데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그렇게 열심히 들었던 것이 아님에도 차 원장사건 이후 최근의 설교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서 받게 되는 재앙에 관한 것이었기에 은근히 “원.. 이거 괜히 잘난 척 하고 교회 나온 것 아냐..” 하는 마음이 좀 들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 형편이니 그동안 제 글을 통하여 제 아내의 순수함을 아셨을 테지만, 그렇게 순수했던 여자가 어떻게 돌팔이 같은 신랑 말을 믿고 교회를 그만 다닐 수가 있었겠습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너무도 슬퍼졌습니다. 왜 맨 처음에 교회 나가겠다고 했을 때 막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제 아내는 정말 하루하루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그때에 얼마 전의 꿈같은 세월을 생각 했을 수도 있었겠군요. 글을 쓰면서 아주 중요한 사연 하나를 빠트렸는데 말입니다. 차 원장 사건이 일어나기 여러 달 전에 전 교인이 모처럼 한 마음으로 40일간 새벽작정기도를 한 일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부활절의 계절이었던 것 같은데요. 제 아내가 그러더군요. 저한테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하지 말고 이번에 40일 작정기도에 함께 참석해 줄 수 없느냐고요. 하도 애절하게 매달리기에 그러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장모님께서 이 서방이 이번에 40일 작정기도에 참석하기만 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가끔 있는 일로써 장모님께서 기도를 하시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보시고 나시면 꼭 전화를 거셔서 아내에게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실 때가 많이 있으신데, 지금도 그러시지만, 그때도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도 아내가 그러고 나중엔 장모님께서 제게 직접 말씀 까지 하시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은근히 궁금해지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사실은 나중에 말씀드릴 지 모르 겠지만, 제 직업의 특성상 새벽에 그렇게 다른 일을 하게 되면, 수입에 차질이 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아내와 함께 열심히 참석 하였습니다. 비록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동안에 아내가 일정액의 감사헌금을 한 것으로 구입한 상품이긴 하지만, 대상으로 성경책까지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장님 제 닭 잡아먹기 한 것 같긴 했어도 상 받으니까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내와 장모님께서 뭔가 잔뜩 기대했던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제게는 오히려 그 사건이야 말로 더욱 더 “정말 별거 아닌 종교구나.” 하는 생각을 굳히게 되는 계기만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거 교회에 더 다녀야 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하고 그때 참 많은 갈등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 아내의 가슴은 아마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여러 번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거쳐서 최근에서야 이제야 말로 제대로 능력이 엄청난 목사님 만나서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됐구나..하고 생각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좋아하고 있었고, 신랑을 상대로 해서 절대로 불가능 할 것 같기만 하던 새벽예배에 신랑이 하나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하여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었으니 이제 커다란 축복받고 시동생이 받았던 그런 비슷한 복을 우리도 반드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전혀 뜻밖에도 목사님을 하나님처럼 믿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송이엄마가 그렇게 허무하게 떠날 줄은 아마 꿈에도 상상할 수 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 상심은 말로 다 형언 할 수가 없는 게지요. 그런데다가 설교만 들었다하면, 하나님 무섭다는 말만 하지요..

그 당시 제 아내가 자다가도 가위에 눌리는 걸 여러 번 목격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코가 꾀어 끌려 다니는 소처럼 그렇게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에 그 당시 제 아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습니다. “다시는 누구보고 교회 다니라고 하지 않겠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줄 알았다면 나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가에서는 10년공부 도로아미 타불 이라는 속어가 있는데, 그야말로 10년을 교회에 다닌 순수한 여인이 최종적으로 얻은 결론 이란 것이 "아! 교회 다니는 것은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도 교회 다니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정말로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는데요. 그러나 그때 저는 더 이상 제 아내에게 "우리 이제 교회 그만 다니자"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아내에게 더 큰 상처만 입힐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만약에 교회를 그만 다니게 되면 길을 가다가 날 파리 한 마리만 몸에 부딪쳐도 하늘이 내린 재앙인줄 알고 두려움에 떨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 다닌 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 했습니다. 도대체 저런 엉터리 같은 일들이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사랑하라” 고 가르치는 교회 안에서 정작 중요한 사랑은 빠져있고, 시기와 미움과 질투 욕심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하고 공포심만 생기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런가? 왜 그럴까? 겉으로 말들이야 참 천사처럼 하지만, 그 안에 과연 사랑이 있을까? 깍듯한 경어 에다가 예의바른 행동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누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서로가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것 같아도, 참으로 욕지거리 나올 것 같은 그 질시의 시선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왜 그럴까?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만 그럴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친구 진집사가 다니는 개척교회도 또 다른 친구 양 집사가 다니는 개척교회도 대화를 하다보면 다 비슷하지 않은가? 어째서 그렇고 그러면서 그들은 왜 꼭 개척교회를 고집하는가?

그렇다면 큰 교회는 뭔가 다를까? 등등 오만가지 생각을 한 끝에 그래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으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사랑하는 아내의 저 큰 상처는 어떻게든 내손으로 치료해 보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시간이 좀 늦어졌네요.. 바쁘다 바빠.. 그래도 다시 한번 인사 올립니다. 어제는 많은 분들이 답 글 달아 주셨던데 참으로 고맙습니다. 늘 그렇듯이 평안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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