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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50번 바른생활님이 쓰신 글에 대한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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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생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그렇게 사용하니꺄 괜찮다는 논리는 악이 사회에 만연하니까 그대로 방치해두어도 좋다는 논리에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은 늘 그런 식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문제가 악과 선에 관한 즉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님의 결론은 너무 비약이 심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어휘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서, 쓰는 사람에 따라서 변한다는 사실이 꼭 어휘를 잘못 쓰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이 그렇지만은 언어라는 것도 불변적이지 않습니다.  가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입니다.
이것은 누가 어휘를 잘쓰고, 잘못쓰고의 차원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이 시대성과 문화성을 가지고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어엿브다'가 예전에는 '불쌍하다'의 뜻으로 쓰였는데, 오늘날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해서 예전에는 올바로 사용한 것이고, 오늘날은 잘못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영감'도 예전에는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일반적으로 나이 드신 남자 어르신들께 대하여 사용한다고 하여서 예전 것이 옳았고, 오늘날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휘의 의미는 그 시대 속에서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잘잘못을 따지기 힘든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대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불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더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도 복과 축복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개역성경은 그런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원어 성경으로 가면, 얘기가 틀려집니다.
개역성경에 '복주다'과 '축복하다' 로 구분해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율로게오'라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율로게오'의 기본적인 뜻은 '칭찬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 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를 하나님에 대하여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께서 복을 빌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여서 이 단어를 썼겠습니까?
비록 기본적인 의미는 '축복하다'이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씌여진 문맥에서 보면 저자들은 이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복주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축복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바라크'라는 히브리어를 70인역에서 헬라어 '율로게오'로 번역했던 전례를 그대로 따라간 것입니다.

결국 구약 히브리어 성경과 신약 헬라어 성경은 '축복'과 '복'에 대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문맥에 따라서 어떤 때는 '축복'으로 어떤 때는 '강복'의 의미로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개역성경은 이런 점을 감안하여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된 문맥에서는 '복빌다'의 의미인 '축복'이 아닌 '강복'의 의미인'복주다'로 번역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요점은 이런 것입니다.
어휘의 의미라는 것이 가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간과하고서, 무조건 어원적인 의미만 따져서 그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담고 사용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 언어도 어휘의 의미가 처음의 원뜻 그대로 100%로 사용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의 언어이든지 어휘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서,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 의미가 확장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가지고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 안에 어떤 의미를 담고 사용하는 지가 문제의 초점이며, 우리 모두가 '축복'을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할 때, '강복'의 의미로 사용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적은 이유는 간혹 교회 안에서 이것을 마치 진리인양 생각하고 거기에 전적으로 매달리며,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켜서 교회 공동체를 허무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용어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분란을 발생시키는 일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신 분들이 그렇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확대해석해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늘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천안에서 부족한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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