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성도이상돈의신앙이야기[제26회]

첨부 1


늘 애정과 진솔함으로 관심을 갖고 읽어 주시는 분들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어제 제가 아내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래서 어제는 그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몇 년 전 그때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생각이 그때 들었을까? 그렇게 말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다시하게 됐는데요. 처음에 했던 생각은 이것입니다. 그냥 그때 어떤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이상한 느낌은 제 상식을 넘는 것이라서 그것에 따라 순종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이상한 느낌을 저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이렇게 믿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믿기 시작 하던 시기부터서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풀어나가기 시작 했는데 그때부터 모든 문제들이 잘 풀렸다. 라고 이야기를 전개 해나가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고, 오늘 아침에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결과를 먼저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맞는 것 같은데요. 지금은 당시에 제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가? 하는 것이기에 그때의 제 생각들이 다시 기억에 떠올라서 정리해 볼까 합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을까요?    

제가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신앙관은 그때까지 불교였고, 아내는 아시다시피 기독교도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자 였던 제가 “그래 뭔가 내게도 틀림없이 어떤 문제가 있을 거야.” 라고 어느 날 생각이 바뀌어 있었고 한편으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성경구절이 생각났었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불자인 제가 기독교도인 아내에게 승복했던 걸까요? 더 쉽게 말해 볼까요? 부처님을 신봉하던 제가 하나님을 믿던 아내에게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래 내가 믿었던 부처님은 틀렸어 역시 내 아내가 믿는 하나님이 옳았어.”

이런 생각을 그때 했었을 까요? 결론을 먼저 말하면, 아니요, 아닙니다, 만약에 그때 그런 종교관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저는 지금까지도 생각만 하고 있지 그렇게 소중한 “참사랑”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그 당시 제 생각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던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바로 신앙문제 였는데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그 수많은 종교들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들어가서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비슷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다른 것은 잘 모르지만, 불교나 기독교에 대하여는 이제 수박 겉핧기 식이나마 조금 알고 있습니다.

깊숙이 들어가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이런 생각을 그때 했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란 어떤 것이고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래도 비록 “형식적” 이나마 “자비”를 실천한다고 이렇게 아내의 뜻에 따라주고 있는데, 내 아내는 어째서 한번도 "사랑“이란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내 말에 귀를 귀울여 주지 않는가?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것이라면 그런 기독교는 더욱 믿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의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비”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의 특징은 나를 먼저 생각하기에 앞서서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헤아릴 줄 알아야 비로소 그 속에 담겨있는 깊은 뜻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 하다가 그때 제 생각이 근본부터 바뀌어 있었던 것이고(진정한 자비란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므로), 더 이상 신앙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제 말이 좀 난해한 느낌이 있죠. 좀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제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 이유가 제 아내의 내면에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받은 상처들을 치료해 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 이었다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목적을 벗어난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좀더 진지하게 아내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 아픔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결혼하여 그때까지 살면서 아내가 격었을 그 수많은 고통들을 그때 생각했던 겁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설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래서 설명은 생략합니다. 그 당시 제가 아내에게 그런 윤회설을 설명하면서 인간은 다시 환생하여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말을 할 때마다 제 아내는 진저리를 치면서 자기는 그런 걸 믿지도 않지만,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싫어싫어 나는 정말로 인간으로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않아.”

늘 이렇게 절망적인 말을 했지만, 저는 단 한번도 그런 아내에 대하여 왜 그토록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그토록 싫은 건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생각의 틀을 바꾸고 나서 생각 했을 때 그런 아내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세상에 얼마나 사는 것이 고달팠으면 그렇게 진저리를 쳤을까? 이런 생각을 그때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하고 사는 것이 그렇게 싫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었습니다.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다시 또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게 되더라도 당신만한 남자를 만나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진저리를 칠만큼 사는 것이 싫은 거냐고 물어보면, 그때마다 뭐라고 말은 안하지만, 제 아내의 표정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워하고 있음이 역력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자기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너무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랬을까요? 그러나 아닙니다. 제 아내는 당시에 괜히 교회에 다니기 시작 했다고 입만 열면 노래하고 있었다고 이미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도 다시는 교회에 다니라고 하지 않겠다고 제 아내가 말했다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도 그때는 많이 개선되어 있어서 살만 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엄청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제가 그때는 개인택시를 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런대로 살만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도 이미 말씀 드렸듯이 제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중에서 단연 으뜸인 것이 성실함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제 아내를 세상 살기 싫어하게 만든 걸까요? 그처럼 순수하고 착하고 명랑하다고 믿고 있었던 제 아내가 말입니다. 제가 생각을 시작하기 이전까지의 제 생각은 그런 제 아내에 대하여 한번도 불쌍하다거나 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복에 겨워서 투정부리고 있구나. 이런 정도로 생각하면서 쥐뿔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만 세워 가지고 쓸데없이 교회에나 충성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을 겁니다. 그 내면에 품고 있는 아픈 상처들 너무도 아픈 상처들에 대하여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었거든요. 제 아내가 태어나서 그때까지 살면서 입었던 그 많은 내면의 상처들을 도저히 헤아리지 못했던 거지요, 아니 당연히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겁니다. 도저히 제가 아내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수도 없이 필름을 다시 돌려보곤 했습니다. 즉, 결혼하여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아내와 관계된 일들에 대하여 말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위대한 인간의 두뇌가 아니라 영사기 였더라면, 계속해서 되돌려 보다가 낡아서 못쓰게 될 만큼은 아니었을 테지만, 아무튼 많이 생각 했습니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라는 대 명제를 안고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때부터 아내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그동안 왜 그렇게 아내의 상처들이 보이지 않았는가? 그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제가 아내와 결혼하고 나서 늘 “부부란 동등한 입장인 것이다” 하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베풀면 너도 “내가 베푼 것 만큼은 아니라도 그 절반이라도 내게 잘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본다 하더라도 내가 손해났던 일만 보이지 다른 것은 보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든 겁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내가 뭔가 크게 아픈 것 같아서 그것을 치료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잘잘못만 생각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언제 상처를 치료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또 생각했습니다. 그래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들을 근본부터 바꾸어보자,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를 “나에게 분명 문제가 있다.” 로 말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내의 내면에 곪아있던 그 깊고 깊은 상처들이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격은 산고의 고통에서부터 그 이후의 삶 속에 녹아있던 그 길고긴 지루하고 고독했던 고통의 세월들..

교회를 다니면서 그런 고통을 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상처만 더하게 된 그 말할 수조차 없었던 고통들 두려움에 떨면서도 내면의 고통을 호소할 수조차 없는 그 깊고 깊은 아내의 고통의 상처들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더 나아가서 저와 결혼하기 전에 살아왔던 아내의 26년의 세월 속에 들어 있던 내면의 상처까지도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여 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그 상처들을 보여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 항거 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네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입니다. 그 많은 상처들은 그러면서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사랑- 으로 밖에 치료가 되지 않음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하염없이 슬퍼졌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다시금 눈물을 흘리게 되는군요.. 그때가 제가 아내와 결혼 한지 17년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은데, 부부일심동체란 말은 제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제 아내가 그렇게 많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알량한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겁니다. (남자가 되어가지고 치사하게스리 ^-^*) 여기서 제 아내의 내면에 있던 상처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 아내의 자존심도 있고,  다만, 지금은 많이 치료가 되어 결혼할 당시의 상황보다 더 밝고 명랑한 순수한 여인으로 되돌아갔다고만 말씀드립니다.

그렇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그 이상한 어떤 힘에 이끌려서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고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아마도 진정한 사랑이란 종교를 초월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그런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일 겁니다.

그 당시에 제가 내면에서부터 들려오던 가장 많은 어떤 생각들은 아마도 이것이었을 겁니다. “네 원수 까지도 사랑하라.” “나는 그렇게 말한 내 말을 책임지기 위해서 나를 핍박하던 원수들 까지도 사랑하여 그들을 치지 아니하고 그들의 손에 죽었노라. 아직도 내가 그들을 진멸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노라고 믿고 있지는 않겠지?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 이니라.“

“네 아내가 네 원수냐?.” “네 형제자매가 네 원수냐?.” “목사들이 네 원수냐?.” “친구들이 네 원수냐?.” “기독교도들이 네 원수냐.” “네 자식들이 원수냐?.” “ 단 한번이라도 그들을 사랑 하기위해서 네 목숨을 내 놓아도 좋겠다고 생각해 본적 있느냐?.” 항거 할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늘 이렇게 질책하며 타이르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이 오늘도 하시는 일들 모두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