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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생명(Life)은 삶(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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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Life)은 삶(Life)...          

저는 요즈음 말씀 앞에 순종치 못하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신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특히 형제들과의 공동체 생활 가운데 드러나는 "자기 중심"적인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지체들로부터 지적받을 때에는 죄악된 제 자신을 변명하며 감추기도 합니다.

순간을 모면하고자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형제를 미워하기도 하는 저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다시금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순간순간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이며, 성령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진지한 깨달음을 얻고 있는 시간들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을 말하는 많은 이들이 지나치게 교리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사실 이것도 사탄의 계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삶의 문제를 애기하기 보다는 지나치게 교리적인 부분에 힘을 다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리적인 부분이 안중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질문을 하는 것이나 대답을 하는 것이나 모두 교리적인 부분에 관계된 것이고, 늘 알게된 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기 보다는 남에게 가르치려고 하고, 적용하려고 하는 모습들 - 특히 제 자신에게서 - 많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 일들로 인해 저와 함께 있던 많은 이들이 저를 충고해 주었고, 지금은 좀 더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주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의 중요교리를 요약한 책으로서 개혁자들에 의해 칭송된 책입니다. 하지만, 사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늘상 그렇듯이 삶을 위해서 교리를 다루었으니까요.

우리들은 로마서 1-11장까지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12-16장까지의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이신칭의를 중요주제로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12-16장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1-11장을 기록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변증하려고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을 좇아 걷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쓴 것입니다.

개혁자들이 로마서,갈라디아서를 "정경안의 또 다른 정경"으로 우상화시킨 것처럼, 많은 세대주의자들 또한 마태복음과 야고보서, 계시록 등을 무시하고, 성경안에서 "교회를 위한 성경"을 따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어 "Life" 는 "생명"과 "삶"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Life(생명)를 주신 이유는 그에 합당한 Life(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성적으로 만들어낸 교리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삶을 이끌어 낼 수도 없습니다.
남들이 알지못하는 교리를 안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 앞에서 성숙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영성이 이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복잡한 교리를 열이 나도록 설명하는 것은 얼마나 유치한 모습인가요! 그만큼 우리의 엉적인 열등감을 다른 것에서 보상받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육신적인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부족함들은 앞선 형제님들과 함께 살아보면 금방 드러나지요...

제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은 교리라기 보다는 저의 됨됨이과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경우랍니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어떠한 진리를 유창하게 가르친다고 해도 공허한 외침에 불과한 것이며, 그런 외침은 어린이조차도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마치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 거듭남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경험된 말씀이 아니면 아직까지 그는 그 말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은 말씀에 기록된 은사를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은사에 대해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산상수훈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일 뿐이라고 일축합니다. 얼마나 주님 앞에서 자기 중심적인 모습인가요...

저는 교회에서  전도사 사례비로 한 달에 30만원을 받는데 하숙비 10만원, 차비 10만원을 떼고 난 나머지 10만원만 가지고 살자니 영 쪼들리더군요. 만약 제 옆에 생활비가 딸리는 지체를 위해 그 30만원을 준다면 저는 한 달을 무얼로 살겠습니까?
결국 제 믿음의 경계(boundary)는 30만원이요, 그 한계안에서 생활하다보니 30만원어치의 한계안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뿐이지요...
나눠주면 나눠줄수록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고, 더욱 풍족하게 누리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현실속에서 부딛히는 조그만 문제들 하나하나에서  하나님 관점이 아니라, 제 중심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저의 죄된 근성과의 싸움은 차라리 치열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솔직히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저에게 들려지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동행하고 항상 저의 삶 가운데 말씀이 능력으로 성취되도록 자신을 드리는 삶이 계속되어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저를 쓰실려고 해도 쓰실수가 없겠지요. 제 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인 삶은 엄청난 무언가의 큰 일을 함으로써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선택과 습관들 가운데 경건의 능력으로 증명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고 있습니다.

Grace & Peace ~*

작은 지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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