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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구원파를 조심하라 -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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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위의 전단을 요 근래에 들어서 많이 보았을 것이다. 신문 전단 속에 또는 각 가정의 현과앞에 그리고 이곳 저곳 붙어 있는 현수막과 포스터들을 볼수 있다.
쉽게 보고 지나치면 은혜스럽고 영적인 집회의 광고인것 같다.





    

"한국 교회 이것은 변해야 한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하지만 조심하라.
이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이다.
기존 기독계에 침투하고 있는 이단 구원파의 유혹의 메세지인 것이다.

구원파에 대해서 구원파에 소속되어 있다 나온 침례신학대학 교수 정동섭 교수의 말을 빌어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구원의 복음 전한다는 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구원파의 공식명칭은 ‘기독교복음침례회’와 ‘대한예수교침례회’이다.

정통교회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또는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등의 교단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흉내 내고  있으나 구원파는 정통침례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침례교의 이단인 것이다(정통 침례교회는 기독교 한국침례회이다. 독자들은 이단 침례교와   정통 침례회를 혼돈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럴 듯한 간판을 걸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 무리를 사람들은 왜 구원파라고 부르는가?


이 집단에서는 구원의 개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집단에서는 모든 교리가 구원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유병언 씨는 물론, 이복칠(요한) 씨와 박옥수 씨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깨달음에 의한 구원”, “율법과 종교에서의 자유(해방)”를 강조한다.

  박 씨는 특히 집회 때마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표어로 내세워 구원의 비밀을 자기 집단에서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들 구원 지상주의자들에게 ‘구원파, 깨달음파, 중생파, 구원깡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문제는 이들이 받았다고 하는 구원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도 아니며 사도들이 전한 구원도 아니라는데 있는 것이다.

  구원파가 전하는 구원은 “다른 구원”이며 “다른 복음”이다.



그럼 구원파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구원파의 전도방법을 살펴보자.
  

그들은 어떻게 전도 대상자들에게 접근하는가? 이들의 관심과 전략은 기성 교인에게 던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1.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

   2.당신은 완전히 중생했습니까?

   3.당신은 지금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공세를 통해 구원의 확신에
     대해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어서 십일조, 목회자 우대, 새벽기도, 성전건축 등 기존교회의 약점이라 생각되는 행습을  집중공격 해 기성교회를 부정하고 불신하게 만들면서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해 기존교회에서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는 예배행위, 십일조헌금, 장로집사제도,  주일성수,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 등을 모두 종교라고 규정한다.

즉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이 모두 헛수고였음을 고백하게 한 다음,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하게 한다.

  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죄사함과 관계되는 구절(예:히 9:12)을 계속 제시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은 것”을 깨닫게 도와준다. 이와 같이 어느 순간에 죄사함을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인정해 준다.

  이 때부터 전도 받던 남녀는 “구원 받은 형제자매”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구원파 지도자들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과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 받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주장이다.
  


구원파의 모든 지도자들은 원래 장로교 신자였다. 50년대와 60년대의 보수적 장로교는 심할 정도로  율법적이었다. 주일성수가 무섭게 요구되는 시대적 배경이었다. 유 씨와 권 씨는 율법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죄의식에 짓눌려서 생활했다.

  그런 중 유 씨는 1961년 4월에 딕 욕의 메시지를 듣다가 “복음을 깨닫고” 권 씨는 1961년 11월 길기수 선교사의 영향으로 “죄사함을  깨닫게 되었다.”

  박 씨도 1962년에 죄 속에서 고민하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씨도 같은 시기에 “복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들의 체험은 장로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해방감을  맛보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기존교회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되었고, 기존교회의 “새벽기도, 예배의식, 주일성수, 십일조, 장로집사 제도”는 모두 율법적이라고 비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것, 양심이 해방을 받는 것, 종교로부터 자유하는 것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

이들의 구원관에서 빠져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의지적인 회개이다. 성경에서는 신앙생활의 첫 단계로서의 구원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을 통하여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경적인 믿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심은 지·정·의(영·혼·육)를 포함한 전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다.

  구원파 교인이 이 글을 읽는다면 본인이 번역한 빌리그래함 목사의 『하나님과의 평화』(생명의 말씀사)를 한번 정독해 보기를 바란다.



회개(repentance)와 믿음(faith)은 사도들로부터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구원의 두 가지 필수조건으로 제시되어 왔다.

  그런데 구원파의 믿음에서는 복음에 대한 인식과 동의와 깨달음(intuitive nderstanding)은 있어도 의지적인 의탁(trust)으로서의  믿음과 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파의 모든 계파가 개인적인 죄를 강조하지 않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것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것을 예수님이 해결하였다는 측면을 강조함으로 개인의 자범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면만을 강조하여 자신의 지은 자범죄나 개인적인 죄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죄 속에 내 죄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의해 용서되었다는 것을 수동적으로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서울총회 신학대학교 김정우 교수는 따라서 구원파의 구원관을 “주관적이고 피동적인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불교적인 구원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워치만 니의 삼분설에 영향을 받은 권 씨는 사람의 인격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해 설명하면서 “영이 하나님을 접하는 것은 영으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을 자기의 인격적인 활동과 혼돈하여, 인격의 일부인 이지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양심의 해방』, p.9)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회개가 빠진 피동적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인격 전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죄를 짓는 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포함된 인격이지 영혼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조직신학이나 역사신학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인간론이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사상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구원파는 인죄론에서 빗나가기 시작하여 신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에서 골고루 탈선하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삭개오, 베드로, 마태 그 어느 사람도 아담의 원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였음을 깨닫고 구원 받은 사람은 없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기쁨에 감격하여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자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때 회개가 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낄 때에만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의 죄를 내가 대신 회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주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원죄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박옥수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죄와 범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죄와 범죄를 구별하여 도둑질, 거짓말, 살인 등은 범죄라고 규정하고 아담의 죄로 인한 원죄를 죄라고 정의하고 있다.

  범죄는 죄의 결과임으로 죄만 해결하면 구원받게 되므로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담의 원죄를 예수님께서 단번에 해결하였으니 이를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 씨는 회개를 “죄인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죄사함이 회개에 앞선다”는 특이한 주장을 하고 있다(『임박한  대환란』, p.145). 자신이 하는 말이 이단 사상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참으로 대담한 주장을 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죄사함을 깨달으라고만 다그치지 정통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예수께 나오라”(마 11:28),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행 2:38; 16:31), “예수를  영접하라”(요 1:12)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깨달음을 의지적인 결단과 순종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사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지 깨달음이 아니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빌리그래함이나 김준곤 목사, 한경직 목사를 구원받지 못했다고 공언한다. 깨달으라 하지 않고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라, 주님 앞에 나오라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구원관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예장 통합측을 비롯해서 고신측, 기독교성결교회를 포함한 정통교단에서 구원파에서 전하는 구원을 “다른 구원”이며, “다른 복음”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나 자신도 구원파에서 깨닫음으로 “가짜 구원”을 받았었다. 죄사함을 받았다고 거듭 간증하면서 자기 암시를 계속했었다. 구원 받았다는 착각 속에 기존교회의 성도들 모두를 구원도 받지 못했으면서 종교생활에 종 노릇한다고 정죄하고 교만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나는 1980년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아담과 관계없이 (물론 나는 아담의 죄성을 타고 났다) 아내를 괴롭게 하고 사랑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담의 죄가 아닌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죄 용서함을 받았다. 말은 비슷한데, 그 의미는 천양지차다.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나를 만나주셨다. 혼돈 중에 있는 모든 구원파 교인들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personal encounter with Jesus)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깨달으라 말씀하시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파의 구원관의 또 다른 문제는 신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알아야 한다는 주장에 있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깨달음에 의한 구원이 성경적 구원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이 일정한 날짜에 특정한 성구를 보고 죄사함을 깨달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주관적 경험이라 할지라도 세 계파의 교주들이 모두 그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 웨슬레나 무디의 구원과 동일시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무엘 서더드(Southard, 1965)의 말대로,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불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섬길 주님은 오직 한 분이나 우리는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에게 나아오게 된다”(11).

  요한이나 빌립, 안드레, 루디아 같은 이는 조용히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던 예로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이나 삭개오, 빌립보 간수는 극적으로 돌이켜 회심(구원받음)을 하였다.

  그러나 디모데와 같이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 가운데는 구원은 받았으나 언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는지 그 날짜와 장소를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로이드존스(1982)의 말대로,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당신이 정확한 순간을 대고 사용된 성구를 정확히 인용하고 설교자의 이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 단 한가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영적 연합, 88).

빌리그래함 목사는 정확한 날짜에 회개하고 예수를 신뢰함으로 회심하였지만, 그 사모님은 그리스도인이 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게 복음을 들려주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옥한흠 목사도 자신이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 디모데와 같이 어릴 때부터 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분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믿는 것은 특정 성구를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구원파 교인들 뿐이다.


구원파의 구원관에 있어서 또 다른 문제점은 구원받은 후의 죄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되어 있다. 권신찬씨는 히브리서 9장 12절을 근거로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사해졌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구원받은 후에는 사람 앞에 지은 죄는 사람 앞에,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께 자백하면 된다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목회와 신학』, 1991년 3월). “그러나 구원 이후의 죄가 영혼의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든지 않든지 그것은 우리의 관심거리도 아니고 문제도 되지 않는다”(권신찬 저, 『서로 사랑하라』, p.27)고 엄청난 주장을 하고 있다. 권 씨가 구원받은 후의 죄는 자백해야 된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개인 기도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죄를 자백(고백)하는 적이 없다는 데 있다.


구원파에서는 죄인과 의인의 개념을 정통교회와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세 계파의 구원파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영원한 속죄를 받으면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용서해 달라는 회개의 기도가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신분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에 대한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회개를 계속한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영원히 사함을 받은 것으로 믿기 때문에 이미 그들은 면죄부를 받아놓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구원을 이루어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범죄한 후에 여러 번 회개한 다윗 왕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일은 어떤 것인가?

  정통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구속하시고, 화목케 하시며, 양자로 삼으신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이 가운데 우리를 “죄사함받은 의인”을 만들어주셨다는 것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는 이단성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3:22~26).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 그러나 신분상(in terms of status)으로,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지 실제로 성품상으로(in terms of character) 죄가 없는 의인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 일뿐 여전히 죄를 짓는다. 성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래서 요한 일서에서는 “우리가 죄없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구원 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는 에베소 교회와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이는 누구나 내면적으로 점증하는 죄의식을 갖게 마련이다.
  “세상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더 이상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령한 사람은 없다”고 구원파에 영향을 끼친 워치만 니도 그의 저서에서 밝힌 바 있다(『영에 속한 사람 2권』, p.180).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하고 기도한다.

그러나 구원파 교인들은 이런 기도를 하는 적이 없다. 권씨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자기들의 관심거리도 아니고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들은 그들이 처음 믿을 때의 회개뿐 아니라 믿은 후의 회개생활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회개에 대한 무관심은 왜곡된 속죄관에도 연유하겠지만 잘못된 율법과 종교에 대한 관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할 뿐, 우리는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구원파의 교리에 의하면, 우리의 “영원한 속죄를 깨닫는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구원파의 구원관을 요약하자면, “율법의 억압에서의 해방, 양심의 죄책감에서의 해방, 종교에서의 해방”이다.

  여기서 양심과 종교와 율법은 거의 유사어로 사용되고 있다. 구원파의 율법과 종교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그 지도자들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율법적인 종교생활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안식과 평화가 없는 교회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율법주의를 율법으로 동일시하고 이것을 탈피하려고 반율법주의, 도덕률폐기론을 부르짖기에 이른 것이다.

  권 씨는 로마서 7장을 강해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으니”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무서운 폭군이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므로 율법과의 관계가 끝났다”(『종교에서의 해방』, p.43)고 해괴한 주장을 하고 있다.


권 씨는 종교에 대하여도 비슷한 개념규정을 하고 있다. “종교는 사망이다. 다른 종교는 물론 기독교도 종교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종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기성교회는 종교이다”(『종교에서의 해방』).

  성경은 인간의 종교성을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행 17). 그러나 권 씨와 박 씨는 모두 “율법=억압,” “기성교회=종교=사망” 혹은  “율법=정죄”라는 등식을 만들었다.

박옥수 씨(1992)가 그의 저서 『쳐다본즉 살더라』에서 주장한 것처럼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 앞에 나가 그를 의지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리이다(롬 3:18~22).

  박 씨는 죄와 범죄는 다르다는 해괴한 신학을 만들어 내었다. “죄와 범죄는 다르다. 도둑질했고, 거짓말을 했고, 살인을 했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 범죄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죄와 범죄에 대해 명백하게 나누어져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에서 내가 도둑질했습니다   하고 범죄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뜻이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p.36). 아주 특이한 주장이다.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자신의 구체적인 죄(범죄)에 대하여 책임질 필요가 없고 회개, 자백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거짓 선지자나 할 수 있는 말이며, 반율법주의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하고 있다(롬 7:12). 권 씨와 박 씨는  구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도덕법이 영원히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저주와 형벌에서 구원하신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 자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을 순종하며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매컬리와 바르스』, p.60).


“크리스찬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인 요구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도덕률 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하여야 한다”(로이드 존스, 로마서 7장 강해).


정통교리에 비추어 볼 때 이 세 계파의 구원파 즉, 권신찬, 유병언 계열의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이요한(이복칠)  계열의 대한예수교침례회, 그리고 박옥수 계열의 대한예수교침례회 중앙교회파의 공통된 문제점은

  ①회개와 믿음(신뢰)이 빠진 ‘깨달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가르치며,

  ②죄사함을 받으면 의인이기 때문에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가르치고,

  ③스스로 부족한 죄인이라고 하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로서 지옥으로 간다고 하며,

  ④정통교회의 제도와 예배형식,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축도 등을 종교와 율법이라고 규정하고 무시하거나 부정한다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에서 발간한 『사이비이단에 대한 대책과 지침 1』에서, p.36에서 인용함).


구원파는 다른 구원을 전하는 사이비기독교가 분명하다. 이러한 사상은 교회 사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율법폐기론자들과 니골라당이 박옥수, 이요한, 유병언, 윤방무씨와 같은 주장을 했었다. 구원파에서 말하는 구원은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을 받으면 사람이 겸손해지는 대신 교만해지고, 판단하기를 잘하며, 기존 정통교회를 향하여 호전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향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만이 예수를 가장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본인이 알기로는 구원파의 교주들 가운데 이요한 씨가 가장 정통교회를 가까이 흉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행태는 진짜를 흉내내는 모조품, 즉 사이비이지 참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스쿠알렌 사업을 안한다고 그들의 교리가 바뀐 것이 아니며, 기도하는 척 한다고 해서 예배관이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통교회 목사들을 모조리 바리새인으로 몰아붙이는 그의 태도는 그의 본색이 무엇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구원파는 필자의 저서 『그것이 궁금하다』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신관, 인간관, 구원관, 기도 및 예배관, 교회관, 종말관 등 모든 가르침에서 사도적인 전통과 가르침에서 탈선하고 있는 “다른 교훈”(이단)임이 분명하다.

  영적 분별력이 있는 이라면, 구원관에 대한 이 글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이단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에게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구원파를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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