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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북녘 동포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첨부 1


아래에 김일성 부자의 악랄성을 짐작할 수 있는 몇 개의 사례를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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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수용소에서 가서 3개월 째 됐을 때 영양실조로 펠라그라(pellagra)라는 병에 걸렸습니다. 펠라그라는 영양실조 병입니다. 이 병은 북한 전역에 다 퍼져있습니다. 그 병에 걸리니 눈 주위가 다 벗겨지고 피부가 벗겨지고 손톱이 뒤집어졌습니다. 이 때가 영양실조 1단계라고 합니다. 이 때 닥치는 대로 주어 먹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바퀴벌레, 지렁이, 뱀, 쥐 등을 주어먹는 아이들은 병을 극복할수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다 죽게됩니다. 2단계는 몸이 붓기 시작하고, 3단계에서는 그 부기가 빠지고 항문이 열리면서 죽어갑니다.

2. 일만 하니까 팔만 길어지고 키가 작아지면서 원숭이처럼 됩니다. 사형을 집행할 때에는 나무토막에 눈, 가슴, 다리를 밧줄로 묶어 놓고 AK소총으로 세 발씩 갈깁니다. 총살을 당하는 사람이 김일성 욕을 하자 돌로 입을 내리쳤습니다. 이빨이 모두 부서지자 돌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3. 성한 사람을 깨끗하게 죽이는 법은 없습니다. 죽이는 순간까지 고문을 해 가지고 뼈만 남게 해서 죽입니다. 사형시키는 장면보다 사형장으로 끌려나오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기겁을 합니다. 팔 다리를 강제로 꺾어버리고, 턱을 빼서 돌을 집어넣고, 이빨은 하나도 없고. 그런 모습을 보면 누구도 감히 반항하려 하지 못합니다.

4. 군인에게 인사를 할 때에는 머리를 땅에 대야 합니다. 1997년 말이었습니다. 군인 두 명이 일하러 나가는「죄수」들 옆을 지나갔습니다. 김일철(23세)이가 인사를 했는데 머리가 완전히 땅에 닿지 않았다고 총 개머리 판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때려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습니다.

5. 교수대에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사형이 끝난 다음 맨 앞줄에 앉은 사람부터 사형자의 앞을 통과시킵니다. 지나가면서 민족 반역자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게 합니다. 사형은 항상 강가에서 하기 때문에 돌이 많습니다. 그 수천 명의 수용소 수인(囚人)들이 돌을 던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시체의 살이 다 벗겨져서 흰 뼈가 보입니다.

6. 작업에 내몰릴 때면 기운이 없어 무릎으로 벌벌 기어 작업을 합니다. 인분을 퍼 나를 때도 인분 바가지를 들고 무릎으로 날라야 했고, 밭의 풀을 잡아 뽑을 때에도 돌밭을 무릎으로 다닙니다. 70㎏의 몸무게가 40㎏로 줄었습니다. 그들은 수인들을 때려잡아야 할 짐승으로 취급합니다.

7. 김영남은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밀수를 하다가 붙잡혀 왔는데 남보다 매우 힘들어하는 축이었습니다. 중절모를 쓴 웬 중년 사나이가 다가와 무릎으로 기어가고 있는 김영남의 뒤통수를 내리쳤습니다. 김영남이 반사적으로 벌 떡 일어서자 그 중년 사나이는 뾰족한 돌멩이를 쳐들고 김영남이의 면상을 들이 찍었습니다. 김영남은 단번에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며 몇 분 못 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나이는 돌 맞은 개구리처럼 발발 떨며 죽어가는 모습을 흡족 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8. 여름이면 모두가 팬티바람으로 일합니다. 이가 득실득실하여 너무나 가렵기 때문입니다.

9. 여성이 들어오면 보위부 「선생님」들에 몸을 빼앗깁니다. 작업장에 나가는 여성을 조사할 게 있다며 따로 불러갑니다. 그것도 살이 붙어 있을 때까지만입니다. 살이 빠지면 너무도 끔찍하여 건드리지 않습니다. 불응하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을 판이라 누구나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갖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은 모두 임신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임신하였다가도 노동 강도가 너무 세고, 영양이 부족하니 모두 저절로 낙태되어 버립니다.

10. 노동에 성실히 참가하지 않았을 때와 발언에서 비위를 거슬렸을 때, 또는 도주를 기획하였을 때에는 용평리에 있는 구류장에 무조건 끌고 가 고문을 합니다. 일단 가면 살아나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는 선생들의 마음입니다.

11. 1998년 7월 중순, 군인 출신인 이영철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케도 철조망을 덮은 담장을 뛰어넘었지만 기력이 쇠진해 금방 군부대의 수색에 의해 잡혀왔습니다. 그는 러시아제 지프차에 밧줄로 매달려 살이 걸레처럼 돼 버렸습니다. 군관은 권총으로 그렇게 숨진 이영철의 머리에 3발의 권총을 쏘았습니다.

12. 『모두 나와서 이 者의 피를 손바닥에 묻혀 자기의 얼굴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묻혀라』 모두 묵묵히 시체 옆에 다가가 굳어져 가는 피를 손바닥에 묻혀 자기의 얼굴들에 발랐습니다 . 원시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인간백정들의 향연이었습니다

13. 그런데 지금은 북한 사회 전체가 이런 수용소가 됐다 합니다.

14 탈북 여성이 인신매매로 팔려 갔는데 화물선에 팔려갔다고 합니다. 화물선의 선원 7명이 집단으로 강간하고 밥시키고 노리갯감으로 데리고 있다가 병이 들자 바다에 버렸다 합니다.

15. 10대의 여아들이 중국에 팔려가서 아버지와 아들에게 차례로 강간당하면서 처참하게 노예처럼 지낸다 합니다.

16. 지금 살아남은 북한 주민은 장사하고 개인 뙈기밭을 일궈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이미 죽을 사람은 다 죽었고, 이제는 사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김정일은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에서 원조받은 식량은 군대하고 보위부, 당 일군들에게만 공급해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를 계속 유지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동포애를 말하지만 실상은 북한 동포를 더 괴롭히라고 김정일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17. 북한에서 고사리, 송이버섯 등 다 뜯고 인민들의 고혈을 쥐어 짜 1년 간 버는 외화가 1억 5천만 불입니다. 그런데 만약 북한에 10억 불이 갔다고 하면, 한국의 경제규모로서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북한으로서는 대단히 큰돈입니다. 이렇게 큰돈을 공돈처럼 줘버리면, 북한 내적으로는 스스로 경제를 일으키려는 의지를 없애버리고 결국 김정일 정권을 보장해 주는 것밖에 안됩니다.

18. 얼마 전에 주한미군 장갑차에 두 여학생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여중생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 주민 수십만 명이 수용소에 끌려가 죽어가고 있고 우리 형제들 수십만이 중국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는 한마디의 외침도, 하나의 촛불도 없습니다.

19. 지난 기간에 남한의 사회교육방송(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송출하는 남한의 라디오 방송)은 북한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교육방송을 다시 들어보니 들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김정일 비판하는 소리는 하나도 없고 김정일이름 석자 끝에 꼭 국방위원장이라고 친절하게 토를 달아주고 있습니다. 김정일 우상화에 오히려 남한 방송이 기여하는 듯합니다. 요새는 남한 방송보다도 미국의 RFA(Radio Free Asia) 방송이 김정일을 잘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새 북한 주민들은 이 방송을 몰래 듣고 있습니다.

20.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외국의 기자들은 북한에 수용소가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해주면 어이없어 하고 분노를 하는데 한국기자들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좀 시큰둥합니다. 일본의 경우 몇 명되지도 않는 납치자 문제를 가지고 온 국민이 떠들고 지금은 일본인 납치자 문제뿐만 아니라 북한 인권전반에 대하여 떠들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한국은 북한의 인권 문제는 거의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 프랑스가 주도한 북한인권 실태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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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강제수용소에서 7년 간 고초를 겪은 뒤 탈북한 이순옥 (52)씨가 지난 1.29일 오전 11시 파리의 메종 드 라디오 프랑스에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인권단체 프랑스 리베르테 초청으로 파리에 온 이씨는 이날 라디오 프랑스 엥테르의 공개 방송에 출연,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문을 겪었고, 영하 35도 이하 겨울에 발가벗긴 채 추위에 떠는「동태 고문」 으로 동상에 걸려 열 개의 발톱이 다 빠졌다고 폭로했습니다.

이씨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한 여성이 집에 두고 온 아이들 이름을 부르면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북한수용소의 참상을 전했습다. 함경북도에서 당간부 전용 물자 공급소장을 지낸 이씨는 지난 85년 경찰간부의 뇌물 요구를 거절한 뒤 정치범으로 몰려 인민 재판에서 13년형을 선고받고 평남 개천 교화소에서 92년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가 94년 아들과 함께 중국을 거쳐 탈북에 성공했다 합니다.

프랑스 엥테르는 북한 인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피에르 리굴로 사회사평론 편집장을 비롯해 앙리 플라뇰(프랑스 민주 연합)의원, 「국경없는 의사회」 수석연구원 프랑스와 장, 필립 골립 파리 8대학 교수 등도 출연자로 초청, 북한 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합니다.

그런데 DJ는 북한 인권 문제의 UN상정을 막기 위해 로비를 했으며, 김창국 인권위원장 은 국회 법사위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계량화 된 자료가 없어 답변하기 어렵다고 발언했으며, 정부는 UN인권위원회가 4.16일 실시하는 대북 인권비난 결의안 표결에 정책적으로 불참했습니다.

(이하 이순옥씨의 증언 일부)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고 사형집행날 극적으로 사형을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 졌을 때 수용소 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 여명이 수용된 그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담당하고 있던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는 단단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 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곳에 가야 된다. 그리고 그 미친 자들하고는 절대 눈 길 한 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 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기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 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들이 잡혀 왔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 여섯 시간, 열 여덟 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노동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 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또 떨어지고,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 백 명의 그 죄수 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 소리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 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 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 명을 끌어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 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 하느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로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 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 뛰던 교도관 두 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 면서 달려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잡아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도 저렇게 거부하지 않고, 저렇게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언제나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믿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믿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꺾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못 보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 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일어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는 그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
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 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 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 . .

(탈북자 이순옥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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