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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두의 목회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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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교회를 개척하고 10년 만에 모든 것을 털고 떠나는 이재철 목사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그 동안의 목회를 정리하며 가장 어려웠던 일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는 설교였고, 두 번째는 모두의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책으로 많이 접했었다.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로부터 시작해서, ‘회복의 목회’, ‘참으로 신실하게’에서 그의 철학과 가치관은 참으로 신선하고 진실함이 배겨있음으로 각인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와는 사뭇 다른 목회자로서의 이재철은 어떤 인물이었을지, 참 궁금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회복의 목회’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를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리라 마음먹고 준비하고 있는 내게 있어, 그의 목회철학은 다시 한번 나의 둔한 감각을 깨우쳐주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회복의 목회’에는 참으로 수많은 충격(?)적인 고백과 결단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그 중 특별하게 나의 가슴을 울리게 하였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위에서 서술한 ‘모두의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두의 목사’가 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분의 글 속에서 드러난 그의 가치관과 삶 가운데서,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세심한 주의와 깊은 생각 속에 글을 읽고 난 후에 이를 이렇게 정의를 내려보았다.

‘모두의 목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 앞에서 목회 하는 것이다’‘

그는 모두의 목사가 되기 위하여 모든 교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고 고백한다. 교인에 따라서 더 정이 가고 더 사랑스러운 교인이 있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모두의 목사로 서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했던 것이다. ‘스스로 그 거리를 침범치 않도록 절제했다. 때로는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그 거리를 지켰다. 이것이 그를 진정으로 아끼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다.’ 라는 그의 고백 속에는 놀라운 가치관이 숨겨있다. 바로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이다. 교회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와 죽음에 자리에 거하셨던 구주를 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공동체적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었고, 예수님의 머리되심을 혹이나 방해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감정조차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린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교회의 지도자로서 생각할 수 없었고, 교회의 각 영혼들에게 일정한 꼴을 먹이는 양치기적 지위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목회의 소명적 차원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처음으로 검증, 확인, 인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얼마나 이뤄지고 있을까?

또한 그는 모두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모두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 나는 언제나 비판의 소리에 열린 귀를 가져야 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될 때에는 지체 없이 사과했다. 목회자는 모든 교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었다.’라는 부분은 그분이 겸손했다라기 보다는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했음을 나타내는 고백이라 보고 싶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과 잘못을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도 한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목사로서는 무척이나 인정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특히 이 시대에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구세주로서의 목사를 요구하기에 힘들다. 목사가 교회를 부흥시키고, 목사가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치료하는 것인 양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인격과 소양, 그리고 실력과 영성의 문제가 아니다. 목사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깨끗하고 성결하게 준비된 그릇이어야 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모두 없애 버릴 수만이 있다면 좋겠지만, ‘완벽함’보다 ‘연약함을 고백하는 진실함’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목사에게도 유효한 것임을 성도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

이와 더불어 ‘모두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교인 모두를 내 편이 아닌 주님 편에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때로 고독한 길일 수도 있다.’라는 고백 속에 그분의 사명적 의지를 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單獨者)’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려고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 앞에서 목회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신의 성향과 가치관을 은연중 내포시키고 있는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만남과 성도와의 교제의 어우러짐은 분명한 우선순위와 질에 있어서 확실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성도의 중간의 입지에 선 목사로서, 일절 치우침이 없어야 하리라. ‘내 사람’을 만드는 목회가 아니다. 내가 외롭고 고독할지라도, ‘그분의 사람’을 만드는 게 우리 목사의 사명의 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성취는 우리의 의지가 대단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부목사 시절에 세계문학전집 한 질은 반드시 읽어라. 목회의 대상은 사람이고 문학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문학은 사람에 대한 앎의 깊이를 더해준다. 사람을 알지 못하는 자의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라는 지침적 사항을 통해 다양한 인생사를 간접 경험하려는 철저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다. 책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이 부분은 저자와 나와의 공감대가 심연의 상태로 치닫는 결정적인 부분이었다. 나는 문학의 중요성을 안다. 특히 나에게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한 인생경험은 목회적 배경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문학에 진 빚이 많다. 비록 부분적인 준비의 측면이겠지만, 그는 모두의 목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마음가짐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분명히 힘든 것이다. 여간해서 해낼 수 없다.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죽여야 한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또한 자신 앞에서 올바르고 가치관과 확고한 자세, 그리고 세밀한 준비에 이르기까지 철저함을 보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참으로 모두의 목사가 되고 싶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싶다. 사람과 나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다. 준비된 목회를 하고 싶다. 올바른 가치관 아래 목숨 걸고 싶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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