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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독교의 바른 구원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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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바른 구원관에 대하여

기독교계에서 성경을 볼 때, 특히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정통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구속사적인 구원론의 출발점은 한 마디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죄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으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 인간을 위해 대형과 대행을 하심으로 이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죄 칭의 중보 새생명을 얻어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 요지입니다.

물론 이런 구원의 서정은 순서적, 역사적인 면으로는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이처럼 역사적 시간적인 개념으로만 보게 되면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면에 있어서 그 깨달음이 무언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이룰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계에서 구원에 대해 구속사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의 인간을 향하신 그 뜻을 깨닫지를 못하고 성경을 표면적 역사적인 면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과로 기독자가 구원에 대해 말할 때 만세 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존재적이 아닌 성분적으로)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그 나라를 누리며 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 하에서 창조함을 받은 존귀한 자신(택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세계로부터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큰 계획과 사랑은 보지 못한 채‘타락을 했으니 구원해 줬다’는 식으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옥갈 나였는데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가게 되는 것으로만 아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니 이는 마치 코끼리를 제대로 알려면 코끼리 전체를 관찰하고 연구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고 코끼리 몸통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서 코끼리에 대해 다 아는 듯이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당신의 택자는 만세 전, 영원 전부터 당신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옥갈 나였는데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닌 만세 전부터 아예 천국갈 자로 예정 계획된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택자인 나는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만 선악과를 따먹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사역을 하시고, 나는 그 예수를 믿고 하는 등은 구원서정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인데 현금의 기독교계의 구원개념은 하나님의 의지세계의 구원계획과, 장차 누릴 천국의 궁극적 구원의 과정은 모르거나 희미한 채 중간과정인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만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의 구원관을 풀어서 말을 한다면 영원 전,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 하나님께서 독존적으로 천국을 누리고 계실 때 하나님께서 누리시던 천국의 그 기쁨과 향락과 누림성이 인간의 말로 표현한다면 가히 100%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처럼 만세 전에 당신께서 홀로 누리고 계시던 기쁨과 향락의 극치의 그 세계를 당신과 함께 당신 차원으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다른 한 존재를 창조하시기로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예정 계획을 하셔서 그 대상자로 인간을 짓게 되었으니 그 대상자 중 하나가 바로 택자인 인간 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만세 전부터의 구원계획이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음에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의 나를 향하신 그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마치 인간이 무슨 일을 저지르면 인간의 그 뒤치닥거리나 해 주시는 정도로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으니 나를 향하신 궁극적이며 최종적이며 목적적이며 결과적인 구원(천국의 누림)과, 인간 나를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향락의 극치로 누리시던 그 세계에서 당신과 함께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가지며 영원히 그 세계를 다스리며 누릴 존재로 지음 받은 존재가 바로 인간 나(택자)이니 하나님께서 주기로 예비하신 그 세계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다스리고 누리기 위해서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이 있어야 하겠기에 이 세상을 만들어 그 세계에 가기 전까지 여러 사건과 환경을 동원해 마찰과 충돌과 대립을 겪게 해서 그 실력을 쌓도록 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의 영원 궁극적인 천국의 이 누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죽어 있던 당신의 백성들의 영을 살려주신 것이고, 영이 살림을 입은 자들이 마음껏 천국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영적 계시와 교훈을 위해 병자도 고치시고, 물위로 걷기도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하는 등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모든 성경을 바로 그런 관점으로 깨달아 나가야 하는 것이며, 세상에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앞에서 말한 천국의 그 누림에 목적을 두고 그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을 쌓기 위한 목적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렇게 해서 입어진 성화구원의 그 질(質)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누리시던 그 누림의 질과 똑같은 것이니 성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입은 이 성화구원의 성분을 그대로 천국에 가지고 가서 그 성분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의 성분을 입어 장차 그 성분으로 천국을 누리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성(性)을 덧입어 그 예수 그리스도성으로 천국을 누린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누림의 구원이라고 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천국의 영원 궁극적인 그 누림에 목적을 두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용하고 응용하면서 그 목적에 총 집중을 하는 신앙을 내세복음주의 계열의 신앙노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성으로 진행되는 세상이니 인간이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을 누리려는 목적이 아닌 이 세상과 세상 것을 이용 응용 활용하여 이 그리스도성을 내 인격화 자체화 실상화 사상화 시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재세기간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계이건 비종교계이건 여러 종류의 구원이 있는데 어떤 종류의 구원이건 모두는 언제나 사건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구원이라는 게 붙습니다.  즉 물에 빠진 사건이 먼저 있어야 만이 그 물에 빠진 데서 건져주는 구원이 붙게 되는 것이며, 또한 병에 걸리는 사건이 먼저 있은 다음에 그 병을 고쳐주는 구원이라는 게 붙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의 개념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구원’이라 하면 사건 이전에 이미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사건은 그 구원을 위해 그 구원을 위한 계획대로 진행이 돼 나가는 것입니다.  즉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만세 전,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누리시던 그 좋은 천국을 당신과 함께 당신처럼 누리고 통치하고 다스리면서 그 기쁨과 향락과 쾌락을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기로 하셨으니 이것을 궁극적 구원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기독교계에서 흔히 말하는 예수 믿어 천국에 가는 것만을 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구속사적인 관점으로만 봐서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해준다는 식의 신앙지식을 갖게 되면 이 사람의 신앙지식은 사건이 있은 후에 구원이 있는 식의 신앙관이니 예수를 믿는 자신에게 현실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닥치면 그 현실에서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 가운데서 현재적으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을 통해 앞에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인간을 향하여 가지신 궁극적인 뜻을 염두에 두고 현실에서 그 뜻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을 우선으로 놓고 그 뜻을 따라 살려고 하지를 않고 언제나 자신이 처한 현실문제를 해결해서 육신적 세상적으로 최상의 삶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또 다른 각도로 말하면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사건이 생겨야 주님께 부르짖게 되니 자신에게 어려운 사건이 없으면 주님이 필요 없다는 식의 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주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모른 채 언제나 사건이 먼저요, 그 다음에 주님이 필요하다는 식의 신앙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현실주의자 내지는 기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이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신앙으로 나가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타락입니다.

이런 사상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환경의 소산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은 할지라도 언제나 인간이, 세상이, 사건이, 활동이 앞서게 되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 속에 주님의 영적이며 천국적이며 신령하고 영원한 신앙정신은 자랄 수가 없고 육적이요 물질적이요 임시적인 세상성이 자리 잡아 세상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는 성화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결국 신령세계에서 장차 부끄러운 구원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영원 궁극적인 누림의 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종교적 사업적 세상건설 목적으로 믿어나가게 되면 자연적으로 세상정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하나의 종교인은 될지언정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수요 정통이요 전통이라 해도, 심지어 기독교 간판을 붙이고 성경을 들고 예수 이름을 내세우며 한다고 해도 영원 궁극적 누림의 세계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이 거짓종이요, 그런 교회가 거짓교회요, 그런 성도가 거짓성도이니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성이 입혀지지 않느니 만큼 현재적 심판은 물론이고, 장차의 주님의 심판 날에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은 양에 따라 받는 사심판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궁극교회 홈페이지: http://909.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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