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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지세계로의 구원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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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세계로의 구원에 대하여

우리의 구원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을 해 준 그 구원 훨씬 이전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통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천국의 누림)이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에, 그리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그 이전인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이미 인간의 구원이 예정 계획 설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궁극적 구원 때문에 세상을 만든 것이고, 또한 이 궁극적 구원 때문에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해서 이 세상을 거쳐서(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포함됨) 궁극적 그 세계에 가도록 한 것인데, 인간을 지어서 곧바로 그 좋은 천국에서 살게 하지 않고 이 세상을 거치게 한 것은 인격자인 인간의 세계에서는 격차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천국의 누림)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기본구원을 입히고 영능의 실력을 쌓게 해 그 신령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 안에는 기본구원도 이룰구원도 다 포함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계에서 구원의 개념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계획이 파괴가 돼 할 수 없이 구원계획을 다시 짜게 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서 그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구원을 얻어 이 세상을 거쳐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개념은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의 개념과 영능의 실력적인 면의 구원이 희미할 수밖에 없고, 이런 개념의 구원관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이 세상을 거치는 동안에 종교적 업적과 사역적인 업적을 많이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알게 되고, 이런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을 미리 가져다 놓고 이것을 기준으로 세우고 성경도 보아야 하고, 또한 이 세상도 이 면을 염두에 두고 만드신 것이니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도 그러한 관점으로 보아야 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사건과 환경을 겪게 하는 것도 신령계에서의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이 있기 때문이니 이 면을 염두에 두고 그 세계에서 그 세계를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적 실력을 닦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다 설정이 된 데서 나온 것이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것처럼 인간을 에덴동산에 영원히 살게 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 인간이 타락을 해서 그 계획이 무너졌기 때문에 다시 또 구원의 계획을 짜서 그 계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보통은 사건(선악과 따먹는 것)이 먼저 있고 난 후에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사건이 먼저가 아닌 구원계획이 먼저인 것입니다.(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

사건이 먼저 있고 난 후에 그 사건을 해결해 주는 식의 구원개념은 일반적 구원개념이니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도 이런 정도의 구원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일반적 구원개념은 물에 빠지는 사건이 있어야 만이 빠진 그 물속에서 건져주는 구원이 붙는 것이지 물에 빠지는 사건이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구원이라는 사역이 있을 수가 없듯이 기독교의 구원개념을 사건이 먼저 있고 난 후에(선악과 따먹어서 타락을 해 지옥에 가는 사건) 그 사건을 해결해 주는 식(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아는 것 역시도 일반적인 구원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에서는 늘 인간이 앞서게 되며, 자기가 어려운 상황에 닥치지 않으면 부르짖을 줄을 모르게 됩니다.  궁극적 구원을 모르니 이 면에 대해 부르짖을 줄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자신이 부자이건 가난뱅이이건 간에 이룰구원 성화구원은 이뤄가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일반적인 구원개념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궁극적 구원)이 먼저 있는 것이고, 이 구원을 위해 사건이 계획되어 있는 것이니 사건은 궁극적 구원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 속에는 일반적인 구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깨달음과 교훈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하신 것이고, 눈에 보이는 면의 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각종 이적과 기사 등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면은 보지 못한 채 성경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부요성이나 병고침 등만을 강조를 하면 그 강조대로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 간에 그런 교훈을 따르게 되면 궁극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만사의 모든 활동과 성경의 모든 해석을 바로 이 궁극적 구원을 기준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관점으로 깨달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먼저는 인도자들이 이러한 관점의 구원개념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교인들로 하여금 이것에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사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눈이며 하나님의 마음이며 성령님의 눈입니다. 

사단 마귀도 천국에 대해 말은 하지만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합니다.  마귀의 역사는 늘 여기에 대한 눈을 막아 놓습니다.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개념의 신앙에서는 궁극적 세계에서의 누림의 실력을 쌓아가게 되지만 일반적인 구원개념의 신앙에서는 이 면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개념을 아는 것이, 이런 차원의 인간으로 올리는 것이 교회의 운동이요 교회의 복음이요 천국복음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구원 구원’ 해도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구원의 세계가 닫혀져 있으면 성도들은 그 세계의 누림의 실력으로 성장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은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누림의 그 세계이지 물질계에 목숨을 걸면 안 됩니다. 

자기의 노력성 충성봉사 등 모든 활동이 영원 궁극적 목적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 누림의 그 세계에 속해서 이 면이 잘 되도록 운동을 하고 수종을 드는 것이 구원운동이요 영운동이요 복음운동이요 생명운동이요 예수님의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교회 홈페이지: http://909.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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