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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펌] 머레이, 토레이, 로이드존스 - 배본철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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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토레이, 로이드존스

-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

해방 이후 한국 개혁파 교회 내에는 신학적인 면과 목회적인 면에 있어서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분명한 이질감이 생기게 되었다. 신학적으로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을 받아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목회적으로 볼 때는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가옥명의 성령론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중생과는 구분되는 성령세례의 경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또한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서 있는 외국 목회자들의 저술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에 널리 소개되었다.

개혁파 계통의 인물들, 특히 케직(Keswick) 계통의 지도자인 머레이(Andrew Murray), 그리고 무디(D. L. Moody)와 함께 동역했던 토레이(R. A. Torrey)의 성령론 관계 서적들이 번역되어 한국교회 성령운동과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고, 또 뒤를 이어 로이드존즈(D. M. Lloyd-Jones)의 성령론이 또한 한국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모두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충실한 인물들이었다.

케직 운동의 지도자로서 19세기 말 영미의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머레이의 경건서적이 한국 교계에 여러 권 번역되었다. 그의 글은 성결교회 <활천>에도 창간호가 나온 1922년부터 “신유”를 비롯한 여러 편의 설교가 연재되어 실렸다. 그의 성령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강조점을 따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를 강하게 지녔으며, 특별히 그가 지닌 성령세례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통치로서의 성령세례’에 있다.

머레이는 성령세례가 예수님 사역의 절정이고 영광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거듭난 신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신자의 믿음을 통하여 명확한 성령세례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다고 본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세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에 집중하였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보았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 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세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다. 그는 성령세례가 반드시 이적을 행하게끔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증인되게끔 하는 권능을 주시는 일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가장 주목할만한 결과는 사람을 뉘우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는다고 하는 말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의 성령세례론은 또한 성결 중심도 아니다. 그는 신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지, 성령세례 자체의 목적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의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은 현저하게 성결과는 직결되지 않는 ‘봉사 중심의 능력’에 치중하고 있음을 본다. 은사의 나타남도 아니요 성결의 체험도 아니라, 오직 복음전도의 능력을 부여 받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세례론은 ‘받았으니 이제 전하라’는 복음전도의 역동성을 뚜렷이 지닌다.

현대 한국교회에 로이드존즈가 끼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 그는 누구든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또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데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고 했다. 또한 성령세례의 체험은 오순절 날 그러했듯이 여러 은사들을 동반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있으며 매번 정확히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 동반하는 은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가변적인 요소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진수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한 어떤 특별한 확신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령의 인침(sealing)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토록 하는데 있는데, 그의 성령세례론에는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와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특이함을 보여 준다.

그러면 성령세례와 성화의 관계는 어떠한가? 로이드존즈는 신약시대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성화를 보증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는 성령세례와 성화를 동일시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또 실제로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한편, 성화는 아직 성령세례에 관하여 알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지속적이고도 진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성령의 세례가 성화를 촉진시키고 자극시키는 것만은 사실이며, 실로 그것은 성화를 돕는데 있어서 가장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로이드존즈의 성령세례론은 무디와 토레이 노선의 성령세례론과 연결되면서, 여기에 그의 특이한 두 가지 성령세례의 이론이 첨가된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노선과는 또 다른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강하게 흘러가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역시 초대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가옥명의 신학적 영향 등을 중심으로 뚜렷한 성령운동의 전통을 세워나갔다. 거기에 머레이, 무디, 토레이 그리고 로이드존즈 등의 저술의 영향은 이 전통에 신학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었으며, 마침내 이인한, 차영배, 안영복, 하용조 등의 개혁파 계통의 인물들이 이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에 입각한 성령론 저술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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