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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비를 세우는 자와 기념비적 생애를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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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를 세우는 자와 기념비적 생애를 사는 사람
 
-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4년 동안 날카롭게 칼 갈아 부왕 다윗의 가슴에 비수를 들이 댄 압살롬은 분명히 불효자요, 역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압살롬의 기념비'(삼하18:18)란 비석을 세웠다. 하나님과 사무엘 선지자의 기대를 크게 벗어나 사탄의 하수인이 된 사울 왕도 길갈에 기념비를 세워(삼상15:12) 자기의 공덕을 기리고자 했다.

기념패, 공덕비, 승전비, 전쟁기념탑, 훈장, 자서전, 회고록 등 세상은 온통 반짝거리는 자기 과시에 꽁꽁 얽매인 것 같다. 명함과 이력서를 굽어다 보면 의인이 충만한 세상인데도 악취만이 넘치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기념비는 자신이 세우는 법이 아니다. 담담히 기념비적 삶을 살도록 할 뿐이다. 하나님의 평가에 평온한 자세로 맡겨라. 역사는 무심치 않다. 세상에서도 진가는 드러나는 법이다. 이순신을 사모하여 '충무로', 세종대왕의 업적이 고마워 '세종로', 살수대첩에 적군의 침공을 막아 나라를 구한 을지문덕을 추앙하여 '을지로', 청렴하고 학문이 깊은 이 황을 기리고자 '퇴계로', 서울 거리들이 감명을 준다. 로마의 공항을 '네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이라 부름도 천재적 예술가의 업적을 잊지 않기 위함일 게다.

예수님은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스라엘 중에 최고의 믿음을 가진 백부장(마8:10)의 이름을 모른다. '개'란 칭호를 들어가면서도 딸의 귀신을 고침 받은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한 그 대단한 여자도 가나안 여자일 뿐이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귀감이 된 그 인자한 벗도 단지 사마리아인(눅10:33) 이란 칭호로 족했다. 알프스 산에서 조난 만난 여행객을 사경에서 구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 고마운 분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서 "당신 이름은?"하고 물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을 아십니까? 그 이름을 안다면 내 이름도 알려 주겠오." 겸손한 구조자는 미소만 남기고 잠적했다 한다.

꼭 남기고 싶거든 남겨라. 한나는 사무엘을, 바울은 자기가 전도한 신자들을 나의 편지요, 자랑품이라 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예레미야는 눈물을, 욥은 인내의 고통을, 마리아는 옥합 깨뜨림을, 스데반은 순교를, 그리고 요한은 사랑을 강물처럼 흐르게 했다.

십자가만이 영원한 기념비가 되게 하라. 예배당 꼭대기에 꽂혀진 십자가처럼 가슴에 그 기념비를 세워 자랑하여라. 십자가 정신 아닌 것은 다 쓰레기다. 버려라.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은 그 우상을 땅 속에 묻어라. 영성에 방해가 된다. 우쭐한 생각을 폐기하라. 오직 십자가 품고 기념비적 삶을 살도록 하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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