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스캔들을 더 좋아한다

첨부 1


-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분이 나서 견디지 못할 때는 분을 풀기 위해 격한 운동을 하거나 노래방에 가서 크게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성도들 같으면 조용히 교회에 가거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을 되돌아보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누르지 못해 폭주하거나 폭음하여 자신의 격한 분노를 식히려고 한다. 아니 자신을 잊고 싶은 것이다.

또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을 다행으로 여기고 만족하는 경우가 있다. 대리 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영화나 만화를 통해 어느 3자가 통쾌하게 행하면 만족한다. 그래서 요즈음 ‘격투기’가 유행이다.

아니면 ‘록키’ ‘슈퍼맨’ ‘배트맨’ 등등 여러 영화들을 보면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주는 스타를 통해 만족하려고 한다. 한국 영화 가운데 여러 폭력영화들이 상영되어 분노에 가득차고 불만족으로 가득 찬 한국인들의 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아니면 어떤 이들은 남을 구타하여 만족을 가지기도 하고, 술에 취하여 미친 듯이 주위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기도 하고, 싸움을 걸기도 한다. 아니면 자녀들에게 화풀이하기도 한다. 또는 부모나 친구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우리는 여러 형태로 자신의 분한 감정을 풀기 위해 타인이 필요할 때가 가끔 있다.

지난 10월부터 지금까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다빈치 코드」는 기독교의 스캔들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 자신들보다 흥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우리의 생각이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잘되어가고 크게 되어가니 배가 아픈 모양이다. 그래서 소설이지만 스캔들이 있다고 하니 거짓일지라도 점검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말거리를 만들어 기독교를 비난하려고 한다.

소설이라는 미명아래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다. 홍길동, 춘향전도 소설이지만 사람들은 실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로빈훗이 실제 인물로 보지만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양 비난한다. 이렇게 남의 스캔들을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한다.

항상 스캔들은 뉴스감이다. 화제가 된다. 이야기꺼리다. 그래서 남의 불행한 일을 보고 자신의 불행에 대한 위로를 찾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래서 뉴스시간이면 항상 사고, 사건, 또는 화제꺼리를 제공한다. 뉴스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소식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부정적 사고를 알리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요청하는 것이고, 그 요청으로 인해 사람들은 화풀이할 수 있는 꺼리를 가지게 되므로 어느 정도의 정신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여하튼 사람들은 타인들이 자신보다 부족한 면을 보면, 동정을 가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극적인 간증을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한 불만을 감사로 바꿀 수 있는 심리적 요소가 있는 셈이다. 부정 속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흉을 보기 좋아한다. 한참 남을 비난하는 말을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한다. 눈덩이가 언덕으로 내려오면서 크게 불어나듯 말에 말의 꼬리를 물어 처음의 말보다 더 확장되고 더 부풀려지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소문이 실제의 말이 되기도 한다. 남의 옷차림, 남의 습관, 남의 삶의 방식, 남의 행동 등등을 비난하기를 사람들은 즐긴다. 당사자가 있었으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가 아니라 분개할 정도의 말까지도 아끼지 않는 경우를 본다.

교회사에 보면, 끔찍한 사건을 말하라고 한다면, 1-4세기 로마제국의 박해 시 기독교인들의 순교사와 아울러 10-16세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카톨릭의 종교재판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들이 사람들에게 가해졌다. 고문이 가해지는 것은 자백을 받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아픔을 견디는 모습이 보기 싫어 더욱 심하고 공포적인 모습으로 가해진다.

그래서 창살이 박혀있는 의자, 창살이 박혀있는 탁자에 사람들을 앉힌다. 여기에서 한 술 더 떠서 의자 밑에 불을 지펴 이단자들을 앉히면 살이 타면서 피를 흘리면서 정신을 잃거나 생명을 잃고 만다. 이러한 고문은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체의 부분을 자르거나 신경이 모여 있는 부분에 자극을 주어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 남의 불행과 아픔을 보고 사람들 가운데 기뻐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갑자기 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면 미워하는 증오심이 없어진다. 이것은 진정한 형제 사랑이 아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껴 악한 감정이 잠시 사라졌을 뿐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분노를 어떻게 자제하도록 말하고 있는 궁금하다. 우는 형제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형제와 함께 춤을 추라고 한다. 형제의 불행을 보고 스스로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고 명한다.

우리 주위에는 숫한 불행을 당하는 분들을 보게 된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그들의 고통이 나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다행으로 여기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그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는 우리의 겸허함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인 것이다.


-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www.eunra.com)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