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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포도원을 허무는 12마리의 여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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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라는 포도원에는 항상 여우들이 들끓는다. 그 여우들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있는’ 것을 배 아파 한다. 그래서 틈이 나는대로 포도원을 공격한다. 행복이 소복이 쌓이는 꼴을 못보는 여우들은 날마다 남편을, 그리고 아내를 유혹하고 부추긴다. 그래서 평화를 깨려고 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 여우들은 정체를 밝히지 않고 나도 모르게 들어 왔다가 어느샌가 우리를 지배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우리가 깨어 있어서 그 여우들을 근절시키지 않는 한 언제든지 여우들의 공격 사정권 안에 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여우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첫 번째 여우가 바로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이다. ‘나’라는 단어가 주가 되고 ‘우리’라는 공동체의 개념은 항상 뒷전이다. 당연히 이기주의는 관계를 허무는 주범이 된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공동체의 개념이 무너지고야 만다. 말로는 ‘우리 마누라’, ‘우리 아이’라고 하면서 그 행동은 ‘우리’라는 공동체적 용어에 전혀 걸맞지 않다. ‘우리’라는 것은 곧 ‘하나됨’을 말한다.

‘하나됨’이란 또 ‘지체’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렇다면 배우자의 아픔이 곧 나의 고통이 되어야 하고, 배우자의 상처가 곧 나의 아픔으로 다가와야만 한다. 그런데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의 삶이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가정에 무슨 소망이 있을 수 있으랴!

부부는 하나된 존재라고 말을 한다. 당연히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기주의적 가치관은 부부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나만 편하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 배우자는 나의 반쪽이기 때문에 내가 배우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고, 배우자가 또 내 마음 안에서 뛰놀아야 한다는 생각은 실종되어 버리고 없다. 이러한 이기주의라는 여우는 가정의 행복을 산산조작내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도 또다른 여우이다. ‘이해’와 ‘수용’은 가정을 이끌어가는 두 기둥이다. 서로를 알지 못함으로 인한 오해가 행복을 허문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포도원을 가꾸는 아주 중요한 비결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눈높이를 맞추려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저 멀리 떠 있는 외로운 돛단 배’가 되고, ‘창밖의 남자’요 ‘창밖의 여자’가 되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그저 상대방을 마음 속 깊이 받아 주려는 넓은 가슴이 필요한 것이다.

세 번째 여우는 ‘만족하지 못하는 성’이다.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함으로 인해 부부관계에 막힌 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막힌 담이 관계를 파괴한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성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만큼 숨겨져 있는 부분도 없다. 성은 이 땅을 살아가는 부부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성생활이 만족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곧 부부갈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네 번째의 여우는 ‘과거의 아픔들이나 상처’를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어린 시절의 상처나 아픔들이 지금의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은 인간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말은 곧 미래를 잉태하고 소망을 가꾸는 곳이 바로 가정이기에 가정이라는 포도원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아픔이나 상처들은 부부간의 사랑으로 다 녹여 주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상처받은 자’이기는 하지만 또 ‘치유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를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포도원을 허무는 다섯 번째 여우는 ‘결혼에 대한 無知’이다.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결혼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눈이 마주쳐서 사랑의 마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사랑도 훈련받아야 할 대상이다. 훈련없는 열매는 아예 생각을 안하는 것이 낫다.

포도원을 허무는 여섯 번째 여우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들 수 있다.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관계를 깬다. 용서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우리는 용서를 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내가 용서를 하지 않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용서가 연속되는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용서의 기회가 많아야만 서로의 관계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일곱 번째 여우는 ‘고난이나 위기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를 들 수 있다. 부부에게는 반드시 위기와 고난이 닥치게 되어 있다. 그 위기와 고난에 무릎을 꿇게 될 때 그 가정은 무너지고야 만다. 광야가 없는 가나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야가 있었기에 가나안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축복을 받기 위한 당연한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의 인생을 정금같이 만드는 연금술사인 것이다.

여덟 번째 여우는 ‘사랑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의 방법을 알아야 행복은 자라난다. 자신의 사랑 언어와 배우자의 사랑 언어가 당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차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둘 사이의 간격은 영원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또, ‘감사하는 마음의 실종’이 아홉 번째의 여우이다. 가정안에 감사가 넘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은 삭막해진다. 그렇기에 감사는 포도원을 넉넉하게 만드는 비장의 무기인 셈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만큼 다 채워진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만족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점이다. 모든 일에 불만의 요인을 찾기 보다는 감사할 수 있는 점들을 찾기만 한다면 그 가정에 행복은 넘치게 될 것이다.

열 번째로는 ‘황폐화된 마음’을 들 수 있다. 마음이 황폐화되어 버리면 그곳에 은혜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마음을 옥토밭으로 바꾸어야 열매맺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하덕규 집사의 ‘가시나무’라는 노랫말처럼 내 마음이 가시나무라면 내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 와 쉴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상처만 받고 아픔만을 주게 될 것이다. 황폐화된 마음은 성령의 역사까지 막아 버린다. 옥토의 마음이 아니라면 겉으로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인데도 열매맺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한번째는 ‘푯대를 잃어버린 삶’을 들 수 있다. 목적없는 인생은 부부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자녀들 역시 방황하게 된다. 미우라 야아꼬의 ‘빙점’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한 여인이 눈덮힌 언덕길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자신이 버려진 아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하려 했던 것이다. 언덕에 올라 무심코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보았다. 목표를 향해 똑바로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눈 위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은 이리저리 비뚤어져 있었다. 여기서 여인은 불완전한 인생과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를 용서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를 주는 내용이지만 목표를 향해 똑바로 올라갔는데도 이렇게 비뚤어져 있는데 하물며 목표가 없는 삶은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마지막 열 두번째의 여우는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함’을 들 수 있다. 육신의 눈으로만 서로를 쳐다보는 그 자세가 관계를 해친다. 육신의 눈으로는 겉모습만 볼 뿐이다. 마음의 눈을 떠야만 한다. 영적인 눈으로 배우자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 실체를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육신의 눈으로만 상대방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영적 소경’이다. 눈을 떴으나 진실을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의 눈을 떠야 풍성함은 솟아나는 것이다.

포도원을 허물려는 여우는 지금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다.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있질 않으면 언제나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우리 가운데 찾아 온 여우들은 없는가? 그 여우가 우리의 가정을 허물고 있지는 않는가?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지금 우리 가정에는 어떤 여우가 들어 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 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여우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대적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행복을 만드는 비결이며, 주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비결이다.


추부길 목사 (웰빙교회 담임,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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