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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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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그 이혼이라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프로그램 안에 없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도화하실 때 결혼이 잘못될 경우에 대비하여 이혼을 만들어 놓지는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크리스천 가운데도 이혼이 성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성경적으로도 합당한 이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혼에 대해 무조건 비판적인 시각을 갖거나 이혼을 책망하려는 자세도 문제이다. 어떠한 경우에는 성경에서도 인정하는 이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 이미 이루어진 이혼에 대해서는 무조건 책망하거나 비판하려는 자세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1. 이혼에 대한 네 가지 기본적인 관점

기독교계에서 이혼에 대해서는 주로 다음의 4가지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 첫 번째가 ‘결혼은 영구적인 것이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혼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레이니(Laney)가 주장하는 기본적인 핵심은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결혼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레이니는 죽음만이 결혼을 중단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임을 주장한다(막 10:6-9). 그는 기독교인들 간의 결혼은 영구적인 것이며 예외는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된 두 개의 잠재적인 예외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 부분,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레이니는 주장한다.

두 번째로는 ‘이상적으로 결혼은 영구적인 것’이지만 간통한 경우는 제외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모든 보수적, 복음주의적 저자들은 하나님은 결혼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셨고, 이혼을 미워하신다는 점에 동의한다(말 2:16). 레이니의 주장과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께서 결혼을 이상적으로 영구적인 것으로 만드셨지만 그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결혼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기독교인이 간통을 하는 경우이다(마 5:32; 19:9). 예수님 이전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간통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사형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면서 이혼으로 대치하였는데, 그것은 결혼관계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성 간의 간통 또한 이혼의 사유가 되었다.

물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간에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비기독교인들이 원하는 한에서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비기독교인이 이혼함으로 기독교인을 버리려 한다면 이혼이 허락되었다(고전 7:15). 그러나 그때에도 화해는 언제나 이혼보다 선호되었다.

세 번째로는 ‘이상적으로 결혼은 영구적인 것’이되 특별한 경우를 제외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곧 일반적으로 회개함이 없는 간통, 비신자에 의해 버림받은 경우,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의 이혼 이외에 이혼을 가져오는 예외적인 상황으로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하셨다(막 10:4-5).

여기서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a) 배우자나 아이를 학대하는 것, b) 회개함이 없는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 c)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로서(딤전 5:8) 이것은 비신자가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d) 배우자와 아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경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결혼 중에 성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모이케이아(moicheia)', 즉 좁은 의미에서의 ’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포르네이아(porneia);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 단어는 ‘간통’, ‘약혼 중에 부정을 저지르는 것’, ‘비신자와 결혼하는 것’, ‘모든 혼외의 성관계(예; 수간, 동성애, 근친)’ 등을 포함하는 단어라고 말한다.

마지막 네 번째로는 ‘이상적으로 결혼은 영구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법정에서 무효가 된 경우는 제외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입장으로 이 관점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켈리(Kelly), 영(Young), 즈왁(Zwack)과 같은 사람이다. 바아버(Barber)가 지적하였듯이 이것은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가 취하는 입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 말씀의 권위 위에 신부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

(1) 이혼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이혼이란 결혼이 갖는 동반자 관계의 언약을 거절하거나 깨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이혼이라는 말은 구약의 경우, 신명기 24장 1절이나 예레미야 3장 8절 등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혼증서 (sepher kerithuth)'를 준다고 할 때 나오는 이 이혼이라는 말은 ‘끊는다’, ‘절단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장 19절에 ‘가만히 끊고자(to divorce)'로 번역되어 있는 ‘apoluo’에서 이혼이라는 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혼하다, 떠나게 하다, 용서하다, 가게 하다, 풀어주다, 보내 버리다, 자유케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곧 이혼이라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동반자적 관계로부터 절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이혼이 생겨나는 이유?

이러한 이혼은 누군가의 죄로 인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은 항상 불행과 상처를 가져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다. 더불어 이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human institution)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증거로는 이혼이 인정되었고, 허용되었으며, 통제가 되었지만 이혼은 결혼과는 달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3) 성경에서는 이혼을 뭐라고 말하는가?

우선 말라기 2장 16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 3장 8절에도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더불어 이혼의 근거나 절차에 대한 구약의 교훈을 보더라도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신명기 24장 1-4절은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 하게 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이혼을 요구하는 것도, 권하는 것도, 허가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했다면 이전 배우자와 다시 혼인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 앞에서 가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이혼당한 여자가 전 남편으로부터 위험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는 데 목적이 있으며, 처음 남편은 다시 그녀를 데려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또, 첫 세절은 조건절로 되어 있고 결론은 4절에 나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만일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고 만일 그 여자가 떠나 재혼하고 만일 두 번째 남편이 그 여자를 싫어하여 이혼하거나 죽으면 그 여자의 첫 번째 남편은 그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남편들로 하여금 아내와 경솔하게 이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규례인 것이다.

이를 볼 때 본문에 나타난 이혼 규례는 결코 이혼을 장려하기 위한 율법이 아니라 그 당시에 이미 보편화되어 있던 이혼 풍습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율법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이혼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머레이(John Murray)는 “이혼을 허용하되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묵인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그 허용된 범위 내에서 행해진 이혼일 경우에만 그 당시의 법(교회법 혹은 시민법, civil or ecclesiastical penalty)에 저촉되지 않았고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예수님은 이혼 뒤의 재혼을 ‘간음’이라고 하셨다.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는 남자는 간음하는 것이며”(마 19:9, 막 10:11, 눅 16:18), “그와 이혼한 아내도 역시 재혼할 것이기 때문에 그 여자도 간음을 하도록 하는 것이고”(마 5:32), “남편과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는 여자도 비슷하게 간음하는 것이며(막 10:12)”, 또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남자도(다른 상황에서처럼 이 상황에서도 상호 관계를 가정할 때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여자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 간음하는 것(마 5:32, 눅 16:18)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이혼과 재혼이 하나님의 인가 없이 이루어진다면 뒤따르는 어떠한 연합도 불법이며 간음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19장 3-9절에 잘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대구법을 써 가면서 당시의 일부 랍비들의 잘못을 분명하게 반대하고 계신다. ‘너희들이 그러한 말을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분명한 대구법으로 그동안 잘못되어 온 관습이나 율법학자들(힐렐학파)의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우선 결혼의 영속성을 공적으로 승인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창세기 1장과 2장을 읽어보지 않았냐고 물으신다. 그리고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단언하신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것이 인간의 계약을 뛰어 넘는 신성한 언약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는 바리새인들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모세의 이혼 규정은 인간의 죄에 대한 임시적 용인이라고 선언하신다.

즉,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리새인들은 ‘명하였나이까’, 즉 명령했다고 질문하는 데 반해 예수님은 ‘허락’이라는 표현으로 대치해 버리신다.

이는 이혼의 허용이 신성한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 중 어느 것 하나도 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을 인간의 타락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말하듯이 다른 율법들과 마찬가지로 이혼에 대한 규례 역시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씀하신다.

(4) 이혼의 성경적인 근거

기어이 이혼을 해야 하겠다면 그 이혼을 받아줄 수 있는 근거는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indecency)되는 일’을 발견했을 때라는 것이다. 여기서 ‘수치 되는 일’이란 아내가 간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간음한 자는 이혼이 아니라 죽이는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신 22:20-27, 레 20:10). 여기서 ‘수치되는 일(ervah)’이란 뜻을 해석함에 있어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조차 의견이 일치되지를 않았었다.

BC 1 세기경의 ‘샴마이’ 학파는 이를 간음이나 난교(亂交)에는 못 미치는 정도의 성 범죄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히브리어의 어원이 ‘벌거벗음’, ‘드러내 보임’이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힐렐학파’는 1절의 ‘기쁨을 주지 못한다’, 3절의 ‘미워한다’에 초점을 두어 해석하였다. 그래서 남편을 성가시게 하거나 난처하게 하는 어떤 것도 이혼 소송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 보았다. 그래서 힐렐학파는 아내와의 이혼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남편에게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아니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혼과 재혼을 오직 부도덕한 근거에서만 허락하셨다(마 5:32. 19:9). 이 조항은 한 부류의 이혼과 재혼을 ‘간음’으로 낙인찍히는 것에서 면해 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의 예외 조항에 대해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가끔 이 조항은 필사자가 그냥 집어넣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의 발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별히 마태복음 19장 9절에서의 헬라어 ‘porneia porneiva’는 성적 부도덕을 뜻한다. 그렇다고 여기에 대한 극단적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즉, 아른트 깅그리히의 주석에 의하면 성적 부정이나 결혼생활의 부정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낱말로 모든 불법적인 성교를 포함한다.

NIV에서는 이것을 ‘부부의 불성실성(marital unfaithfulness)’이라고 번역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간음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간음을 뜻하는 단어는 같은 절 안에서 다른 헬라어 'moichao moicavw'가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porneia는 결혼 언약에 대해 불성실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요셉은 마리아가 부정하다고 의심했을 때 죽음이 아닌 이혼을 생각했었던 것이고(마 1:19), 그렇기에 그러한 연고없이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9:9).

(5) 이혼의 경우별 허용 여부

더불어 부도덕 때문에 이혼하는 것이 허용이 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외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확인 사항(checklist) 정도로 사용한다. “아, 여기 이 항목이 있구나! 나는 이제 남편과 이혼해도 되는구나!” 그러나 결혼의 언약적 성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 결혼의 의무들을 요구하셨는지 먼저 생각한다. 그들은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 그리스도인 부부의 이혼(고전 7:10-11)

먼저, 믿는 자들끼리의 이혼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7장 10-11절에 잘 나타난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끼리의 이혼은 기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예외는 없다. 어느 누군가가 불순종하여 이혼한다 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고 했을 때 그녀가 항상 회개하고 남편과 화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 버리면 그녀는 자신의 불순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회복시킬 수 없는 형편에 빠지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신명기 24장 1-4절을 참조하라).

바울이 바라는 바는 화해이다. 바울은 두 믿는 자들이 잠시 갈라섰더라도 다시 새롭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다시 합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탈 주석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혼인은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다. 혼인을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원칙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훈에서 결정해 주셨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이 말씀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혼인은 일생 동안의 결합으로, 죄 없이는 파괴될 수 없다.

부부는 어느 한편의 단순한 뜻이나 혹은 어떠한 경솔한 이유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항구성은 하나님의 지정하심에서 기인한다(참조, 마 19:6). 남편과 아내는 하나인 것이다.

혼인에는 하나님의 신성함이 함께 존재하며, 따라서 부부가 갈라섬은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두 번째로 나눔이 있다 해도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부부가 나뉘는 경우는 남편의 포악한 처우에서 아내가 남편을 떠나거나 또한 그와 비슷한 처지에서 아내가 남편과 별거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한 상황이 부부가 이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종국적으로 부부가 헤어졌다면 그들은 각기 혼인을 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야 한다.

새로이 혼인하는 것은 처음 혼인을 무효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헤어진 부부는 그대로 지내든지 아니면 서로 화합하고 처음의 생활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두 번째의 방법이 바람직한 길이며, 또한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부부는 노력하며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부부는 죄와 그리스도의 이름에 걸림이 없이는 나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간음한 창녀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셨다(참조, 호 3, 4 장).

하물며 하나님이 맺어 주신 부부의 관계를 서로 나눈다는 것은 큰 죄이다. 예수님께서도 간음한 연고 외에는 부부가 나뉠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이혼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뿐 아니라 간음한 경우라 해도 나뉘는 것은 최악의 경우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2) 불신자와의 이혼(고전 7:12-16)

한편, 불신자와의 이혼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7장 12-16절에 잘 설명된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한마디로 어느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 이혼에 대한 주도권은 믿지 않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결혼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믿지 않는 자가 이혼을 원하면 그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뜻이다. 당연히 이러한 이혼의 경우 결혼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3) 음행의 이유로 인한 이혼

한편 음행의 이유로 인한 이혼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7장 10-11절에는 언급이 없지만 마태복음 5장과 19장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읽을 수가 있다. 여기서의 분명한 뜻은 당연히 이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즉, 해도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고린도전서 7장에 대한 크리스탈 주석은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불신자 배우자가 그냥 지내기를 원하는 경우에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결합한 혼인 관계를 쉽게 나눌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믿지 아니하는…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14절)

바울은 불신자가 신자와 혼인한 그 자체의 효력에 의해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성도 된 남편 혹은 아내의 신앙적 노력에 의하여 성별 되어지거나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사하는 제단이 그 위에 놓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것처럼(참조, 마 23:19),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의 성품을 그와 관련된 것에 반영한다. 그와 같이 부부 관계에서도 성도 된 한 편이 거룩함으로 다른 한 편에 그의 거룩함을 반영하게 되고, 그 다른 한 편은 그리스도인 배우자와 함께 함으로 성별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이다.

이 원리는 이스라엘 가운데 불경건한 이방인들이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하여 개종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누렸던 이치와 같다. 이러한 원리는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14절)는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불신자인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에 바울은 그리스도인 배우자가 결합을 유지하기 위해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떠나게 하라고 했다(15절). ‘형제나 자매나 이러한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혼의 요구가 성도에 의해서 요구되어서는 안 되나 상대방의 요구에는 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을 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화평 중에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신자인 배우자라 할지라도 사랑하며 그가 회개하도록 기꺼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16절)

4) 크리스천 배우자가 화해를 하지 않고 이혼을 요구한다면?

그렇다면 만약에 크리스천 부부간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 한쪽이 이혼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할까? 우선 마태복음 18장에 의해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 그래도 안 될 경우 교회에 알리고 교회에서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고, 그 권면에도 불응할 경우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교회에 내 놓아야 한다.

그런데 그 교회의 권면도 거부한다면 출교(excommunication)처분을 하게 된다. 이렇게 출교된 자는 믿지 않는 자로 간주된다(마 18:17). 이것이 믿는 자들의 이혼에 대한 성경적 태도이다.

3. 글을 나가며

이혼은 최상의 선택이 결코 아니다. 많은 여성 단체나 사회단체들이 이혼을 오히려 부추기면서 그것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양 호도하지만 이혼은 최후의 선택이지 좋은 방법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더불어 이혼은 부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자녀들은 무슨 죄로 그러한 상처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호주제 폐지가 이혼을 부추길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도 많지만 분명한 것은 이혼에 대한 개념을 자유롭게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혼의 대중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이혼 추세는 지속적인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이혼자 수의 증가는 곧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들만큼이라도 성경적인 이혼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혼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 결혼을 어떻게 굳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행복의 질을 높일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투자를 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굳게 지키고 확장하는 길이 될 것이다.

- 추부길 목사 (웰빙교회 담임,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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