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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돈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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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부길 목사 (웰빙교회 담임,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돈에 대한 이해

어떻게 보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의 하나가 ‘돈’일지도 모른다. 그 ‘돈’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특별히 ‘돈’은 영적인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있다. 사탄은 이를 놓치지 않고 우리를 휘어잡으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돈’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돈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사탄으로 말미암은 저주의 수단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창 13:2, 14:23, 신 8:18, 왕상 3:13, 겔 12장, 살후 2:9) 사탄은 어떻게든 우리들을 쓰러뜨리려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아주 좋은 사탄의 무기가 바로 돈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고 있다. 돈이 그 사람에게서 왕노릇을 하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갈 때 하나님은 구석지로, 급기야는 밖으로 밀려 나고야 마는 것이다.

이렇듯이 돈 뒤에는 항상 사탄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돈은 우리를 지배하려 한다.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마음까지 지배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약 1,800여회 정도나 돈 또는 재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돈이 위험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돈에 대해서 우리가 영적 무장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부부와 돈, 그 성경적인 원리

1) 돈은 부부 공동의 소유이다.

어느 한쪽의 수입이건 그것은 어느 한편의 소유가 아니라 부부 공동의 것이다. ‘내가 벌었으니까 내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돈에 있어서 부부가 투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수입처도 투명해야 하고 사용처도 투명해야 한다. 이렇게 돈에 대해 서로가 투명할 때 근본적인 신뢰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2) 돈에 있어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나만의 통장, 나만의 호주머니’를 가지려 할 때 ‘부부의 하나됨’에 ‘막힌 담’이 생기게 된다. ‘딴 주머니를 찬다’는 것은 그 숨은 뜻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부부의 하나됨을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갈등의 큰 요인으로 발전함과 아울러 ‘너 따로, 나 따로’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면서 이러한 ‘너 따로, 나 따로’의 ‘따로 경제’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독립은 자칫 결혼생활에서의 독립까지 몰고 갈 우려도 상존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배우자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서 이러한 ‘따로 경제’는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배우자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돈에 있어서도 하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3) 돈을 쓰는 데 있어서도 대화가 있어야 한다.

공동 소유의 돈이니 만치 돈을 쓰는 데 있어서도 부부간에 합의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일정 범위 내의 소소한 돈에 대해서는 서로가 자율권을 가질 필요가 있지만 부부중 어느 한쪽이 큰 돈이라고 생각하는 범위(대체로 아내들이 생각하는 큰 돈의 규모가 훨씬 적다)를 벗어난다면 무조건 대화하면서 협의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흔쾌히 이해하고 인정한 범위 밖이라면 예외이지만 이러한 대화가 없었을 때 부부간에는 ‘원인이 뚜렷하지 않는 갈등’으로 번져 가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돈의 사용처라도, 심지어 교회에 헌금을 할 때에도 부부가 대화하여야 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기도하면서, 그리고 대화로 설득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부부의 하나됨을 파괴하면서까지 물질을 드리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4) 책임을 질 수 있는 지출을 하여야 한다.

무조건 쓰고 나서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무책임한 것은 없다. ‘너무 걱정하지마.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 거야!’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일은 스스로 저질러 놓고 해결은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이다. 돈은 부부가 함께 쓰는 것이 원칙이고 그렇기 때문에 함께 갚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획이 있는 지출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가끔은 어느 한쪽이 일을 저질러 놓고는 해결은 다른 한쪽에 일임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당신이 알아서 해 줘!’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서 할 수가 없는데 그냥 알아서 하라고만 말한다.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도 있다. 혼자 감동 받아서(?) 엄청난 작정 헌금을 마음대로 해 놓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끙끙대는 모습을 볼 때도 있다. ‘하나님을 위해 한 작정인데 하나님이 알아서 채워 주시겠지…’ 이런 배짱으로 그렇게 하는지도 모른다. ‘날아다니는 새들도,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조건 일을 저지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능력을 사용하기를 지시하시며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도록 가르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와주시기를 구할 때에는 더 큰 책임감이 필요한 것”(래리 버켓)이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는 누가복음 16장 12절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돈, 어떻게 벌 것인가?

그렇다면 그렇게도 중요한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까? 여기에도 성경적인 원리가 있다.

1) 돈을 버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그냥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먹고 생각나는 대로 쓰기 위해 돈을 번다면 그야말로 동물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은 ‘무언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적인 가치관만으로 돈을 번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는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관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돈을 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가치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돈을 번다(고전 10:31).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2) 돈을 버는 데도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우리 인간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쫓아다니려 하는 본성이 있다. 그러한 유혹도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아무 물건이나 만들어서 아무렇게나 파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깨뜨릴 수도 있고, 우리 인간들의 영성을 흐리게 하며 사탄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창조 세계나 그 질서를 깨뜨리는 사업이나 사람들의 가치관, 사고(思考), 습관, 태도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업, 좋지 않은 소비문화를 조장하는 사업 등을 통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수요가 있기 때문에 생산해야 한다는 생각같이 위험한 것은 없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명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느 패션 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한 바가 있다. ‘나는 하나님께 드려도 부끄럽지 않을 옷을 만들려 한다.’ 이러한 마음이 돈을 버는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돈을 버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돈을 벌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필요할 때만 적당히 활용하는 사람도 있고,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 돈을 버는 것이 목적 그 자체가 되게 된다. 어느 기업체의 사장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었다. 그 사장은 그 회사의 월요 예배 때마다 이 찬송을 지정곡같이 즐겨 찬양할 정도였다. 이 사장이 이 찬양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그 찬송의 가사 때문이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여기서 ‘기업’이라는 단어를 그 사장은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 그 기업(企業)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기 때문에 2절 가사는 그렇게 탐탁지 않게 여긴 듯하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가끔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게 하실 때도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실패가 소망이 되는’(롬 5:3) 예를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한창 커가던 회사가 갑자기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부도(不渡)로 이어진 어느 크리스천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한때는 절망했으나 바로 기도원으로 가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만약 회사가 계속 잘 나갔더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 질 수가 있었으나 회사의 실패가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로 반전되는,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고백이 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실패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성공을 위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된다.

항상 돈을 벌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돈을 버는 방법을 잘못되게 만든다. 과욕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사탄이 틈타게 된다. 욕심 내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그 사람. 고객을 대할 때 주님이 보내신 사자를 대한다는 그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 항상 관점을 하나님에게 두는 사람만이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돈이 없다고 해서 그 인생이 비참해지거나 불편한 것은 아니다. 돈의 과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주님이 주시는 부요함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더 큰 것을 채울 수가 있다”는 비밀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돈, 어떻게 쓸 것인가?

물질이란 선한 것이다. 그렇기에 잘 써야만 한다.

(1) 돈을 쓰는 데도 계획이 있어야 한다.

크리스천은 항상 무계획적이어야 할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또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시며 공중을 나는 새들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지고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아무 근심과 염려 없이 주시는 대로 먹고 마시는 삶을 산다는 것이 과연 바른 삶일까? 그렇기 때문에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러한 삶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14:28?30).
선한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 그 재물을 잘 관리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1) 예산을 세우라.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재물은 어느 정도이며, 지금 주시는 재물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한 다음, 이 물질로 우리 가정이 살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수입보다 지출이 많을 때 그 가정은 항상 빚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밖을 행한 삶이 강해질수록 수입의 고려 없이 겉으로 나타나는 겉포장만 요란하게 된다. ‘속빈 강정’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속이 비어 갈 때 그 사람의 영성도 함께 비어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산을 넘어서기 때문에 도저히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 생겼다면 기도해야 한다. 그 필요를 채워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구체적인 계획인 것이다.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분명히 채워 주심을 확신하라. 내가 일을 저질러 놓고 그 뒤치다꺼리를 하나님께 모두 맡겨 버리는 그러한 어리석은 삶을 이제는 탈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2) 충동 구매는 삶의 균형을 깨뜨리는 원천이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살면서 항상 우리가 유혹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든지 사고 싶은 대로 사고, 쓰고 싶은 대로 쓰자’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사려고 할 때 다시 한 번 점검해 봐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사고자 하는 그 물건이 정말로 필요(Needs)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욕구(Wants)에 의한 것은 아닌가, 혹시 나에게서 솟구치는 욕망(Desires)때문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욕망에 의한 구매는 사람을 망치기 쉽다.

바른 소비 생활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속한 가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 영적인 리듬이 깨어져 있는 가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공허함의 탈출구로 ‘충동적이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소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것은 바르게 살기 위한 것이지 물건을 사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누린다면 이미 그 구매 행위가 우상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먹고 입고 자는 것 이외에 돈을 쓰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가끔 여가를 즐길 수도 있고 여행을 할 수도 있으며,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이러한 행동을 ‘괜한 사치’라고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 후히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딤전 6:17)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한도를 넘어서면 문제가 되지만 그러한 정죄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충동구매를 억제하기 위해 맥그리거(MacGregor)가 제시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준다.

① 이 물건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가?
② 가격은 적절한 것인가?
③ 싼값으로 살 수 있다면, 혹시 구형 제품은 아닌가?
④ 세일 물건이 정말로 세일된 가격인가? 품질에 비해 세일 가격 자체가 높은 것은 아닌가? 할인 가격으로 사려 하는 그 물건이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⑤ 지금 사려고 하는 그 물건을 더 값싼 어느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가?
⑥ 혹시 제품에 결함이 있지는 않은가?
⑦ 내가 구입하고자 하는 제품이 정말로 나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가?
⑧ 물건만 보지 말고 그 물건을 만드는 기업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 물건을 만드는 기업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문제가 있는 회사는 아닌가? 혹시 이단 신앙의 회사는 아닌가?

먹는 것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갈 때도 맥그리거(MacGregor)가 제시하는 방법은 큰 도움이 된다.

① 배고플 때는 시장에 가지 말라. 식사 후에 시장을 가면 훨씬 알뜰하고 적게 물건을 사게 된다.
② 시장은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만 가는 것이 좋다. 소량으로 사는 것보다 대량으로 사는 것이 가격도 더욱 싸고 가끔 가는 것이 필요치 않는 물건을 절제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③ 시장을 갈 때에는 사야 할 물건의 리스트를 가지고 가라. 그래야만 쓸데없는 물건을 사지 않게 된다.
④ 시장에 갈 때에는 친구나 이웃 사람들과 함께 가지 말라.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필요 없는 물건까지 사게 된다.
⑤ 낮은 쪽 선반에 있는 물건이 의외로 값싸고 좋은 물건인 경우가 많다. 눈높이 물건은 광고를 제일 많이 하는 상품, 이익이 많이 남는 상품을 진열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⑥ 단위 가격을 확인하는 것도 좋은 지혜이다. 포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물의 양이 얼마인지, 그 양에 따른 단위 단가가 얼마인지 확인해야 한다.
⑦ 인스턴트 식품이나 몸에 해로운 음식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인스턴트로 편리할수록 가격은 비싼 반면 건강에는 좋지 않기 때문이다.
⑧ 비교해서 물건을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된다. 그 부지런함이 많은 절약을 가져오게 된다.

(2) 나눔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을 위해 무조건 쌓아 두기만 하는 사람같이 불행한 사람은 없다. 나누는 자가 행복하고 나누면 나눌수록 기쁨 또한 커진다는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나눌 줄을 모른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거저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거저 주어야만 한다(마 10:8). 그렇기 때문에 ‘주린 자에게 음식을 나눠주어야 하고 집이 없어 방황하는 자들에게 거처할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헐벗은 자들을 위해 자신의 옷이라도 벗어서 주어야’ 하는 것이다(사 58:7).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자신의 소유에 대해 청지기 정신을 갖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만 있다면, 재물에 대해 자유함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나눔이 있는 삶은 얼마든지 가능해 진다. 재물이 나의 ‘재산 목록 1호’가 된다면 주님을 따르는 데도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내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한 주님마저도 찾아오실 공간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눅 18:22)

그렇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에 대해서 ‘빈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는’(빌 4:19)법이다. 그러한 체험이 있는 삶을 사는 것 같이 복된 인생은 없다.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의 생활 중에서 ‘욕망’에 해당되는 지출을 철저히 배제하고 ‘욕구’에 해당되는 지출을 절제한다면 얼마든지 나눔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나눔을 위한 물질’은 쓰고 남은 것이 아니라 먼저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획을 세워서 미리 절제하여 나눔을 우선으로 하는 예산을 떼어놓는다면 좋을 것이다.

마음만 먹지 말고 지금 당장 실행하라. 좋은 설교를 듣고 나서 그 감동으로 마음을 먹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생각마저 사라져 버리는 게 우리의 심상이다. 한 번 마음먹었으면 철저하고 집요하게 실행하라. 그것이 바로 축복이다.

(3) 빚을 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수입 안에서만 살게 되면 빚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한도를 초과해서 지출하였거나 투기 등의 이유나 사업 등의 실패로 인해 빚을 지게 될 수도 있다. 빚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 수 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잠22:7)는 말씀을 기억해야만 한다. 물론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어느 정도 돈을 꾸는 것은 허용된다고 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돈을 꾸거나 빚에 몰리다 보면 자유함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특별히 믿는 형제, 자매들과 이러한 ‘빚’을 지는 것은 여러 사람을 실족하게 할 수가 있다. 돈 잃고, 사람 잃고, 믿음까지 흔들리는 경험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는 말씀이 재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인 것이다.

“아예 받을 생각 말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좋으나 돌려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아예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어느 집사님의 충고를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업을 하는 어느 형제가 믿는 형제들에게 약간의 돈을 빌렸다가 그 돈을 갚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물론 돈을 다 갚기는 갚았지만 서로 간에 얼마나 서먹한 관계로 변해 버렸는지 그렇게 친하던 관계가 전화 한 통화 오고가지 않는 소원한 관계로 변해 버린 사실을 생각해 본다. ‘빚’이 인간관계까지 파괴해 버린 것이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른 관계를 만드는 첩경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돈의 소유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달 월급이 100만원이 안되는 사람도, 1,000만원이 넘는 사람도 돈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마음의 부요함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만족함이 끝도 없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둔다면’ 그 사람이 바로 물질의 빈곤 속에서도 풍요를 누릴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물질이 풍족함을 두려워해야 한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8:12?14a). “차라리 재물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하는 후회의 소리를 가끔 듣는다. 재산 분쟁 때문에 가족간의 우애가 깨져 버리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물질이 많아지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도 뜸해져 버리는 교만의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항상 넘어질까 조심하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부유함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질 않다. 물질에 부족함이 없이 살았을 때와 참으로 힘들게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은혜 가운데 살았던 시절을 비교해 보면 인간을 편하게 해주는 그 물질이 영성을 깨뜨렸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편해질수록, 물질이 많아질수록, 더 잘 될수록 그 상승세에 비례해서 기도의 시간도 늘어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마5:3)이라는 말씀을 항상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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