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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배재철 <5> 발세지아 콩쿠르서 특별상 받아 오페라 주역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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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유학을 결심한 건 오페라 매력에 푹 빠져서다. 오페라 대부분이 이탈리아 작품이었다. 부모님은 유학 기간 매달 70만원을 지원해 주셨다. 빠듯한 형편에서 보내오는 유학비라는 걸 알기에 절대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열심히 언어를 공부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고 목표로 했던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에도 합격했다.

베르디 국립음악원에는 한국 유학생이 많았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꽤 유명했다. 이미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동아 콩쿠르에서 1위를 했기에 더 그랬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아내도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성악 전공자인 아내는 나보다 한 달 먼저 밀라노에 도착해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어학원을 다녔고 3개월 과정을 마무리할 때쯤인 1994년 여름 처음 만났다. 어학원 동기생들끼리 소풍을 갔다가 카메라를 들고 있던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면서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몇 번 더 만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음악을 배우는 것도 그렇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아내에게선 타인을 배려하는 예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었다. 2년을 연애하고 96년 10월 29일 결혼했다. 당시 우리는 결혼식 비용을 최대한 아껴 유학비에 보탰다.

결혼을 했으니 더 큰 책임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결혼 이듬해 한국에선 1998년 외환 위기 사태가 터졌다. 유학생 살림은 더 궁색해져만 갔다. 도심 밀라노에서 사는 게 힘들어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했다. 주 3∼4회 기차를 타고 학교로 와 수업을 받았다. 나중엔 교통비도 아껴야 해서 아예 1박2일 동안 수업을 몰아 듣도록 커리큘럼을 조정하기도 했다.

힘들었던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양한 국제 콩쿠르에 출전해 실력을 쌓는 거였다.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상금을 줬는데, 한두 달 생활비로 충분한 금액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만 열중할 수 있어 콩쿠르는 여러모로 중요한 기회였다.

게다가 콩쿠르 우승자에겐 오페라 주역으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부상으로 주어졌다. 나는 97년 발세지아 콩쿠르에서 2위에 해당하는 테너 특별상을 받았다. 솔직히 1등이 아니어서 씁쓸했는데, 극장장이 단독으로 오페라 주역이라는 부상을 내게 줬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아내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두 손을 번쩍 들고 “할렐루야”부터 외쳤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궁핍했던 삶 가운데 베풀어주신 풍요로운 은혜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오른 오페라 첫 무대가 98년 헝가리에서의 ‘토스카’였다. 주역인 카바라도시로 데뷔했다. 형편이 어려워 따로 오페라 레슨을 받을 수 없자 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오페라 전곡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 불렀다. 그날의 짜릿했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 내 나이 불과 스물아홉 살이었다.

정리=노희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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