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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학대, 그 깊고도 질긴 수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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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선영 목사 (낮은울타리 가정사역원 원장, 안양제일교회 상담 목사)

“자기 자녀들을 학대하는 부모는 대개 정서가 메마른 사람들이다. 자녀들은 사랑과 애정을 필요로 하는데, 만일 이런 것이 부족하면 아이는 금세 정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정서 장애자가 된다. 사랑과 애정 대신에 언어폭력이나 신체적인 학대, 아니면 성적인 수치감들을 겪게 되면서 정서가 건강하게 자라날 기회가 차단되는 것이다.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몸이 자라나는 것처럼 아이의 마음과 정서도 사랑과 관심과 애정을 통해서 성숙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아이는 정서 장애아로 자라게 되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아동 학대자가 되고 만다. 확실히 아동 학대자의 내면에는 어릴 적 필요로 했던 사랑의 공간이 텅 비어있다.” -[스토미] 중에서-

하나님은 결혼을 만드시고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통해서 격려받고 위로받으며 참 안식을 누리고 행복하길 원하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 안식처가 돼야 하는 가정이 오히려 고통과 상처를 받는 곳이 되고 말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 땅의 모든 사람은 학대를 받았고 또한 학대자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학대는 신체적 정서적으로 받는 가혹행위를 말한다. 또한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당할 때 그것은 학대가 된다. 학대를 계속 받다보면 스스로 학대를 합리화시키게 되고 그러면 학대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타자이며 돌봄과 사랑의 원동력인 어머니로부터 극심한 학대를 받은 스토미라는 한 여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녀가 그토록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던 것 같다. 그녀는 그 무엇인가를 붙들고자하는 본능에 의해 오컬트에 심취하고, 마약을 하고, 책임감없는 섹스 후에 임신과 낙태를 반복하는 등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신질환자였던 스토미의 어머니, 그 어머니 역시 가정 내에서 심하게 상처를 받은 피해자였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 악순환은 지금도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발견된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누군가 사랑을 주고 끊임없이 돌봐주는 시기가 없이 방임된 채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결말이 대개 우울증과 자살충동과 헛된 것을 추구하는 성향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인간의 연약성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이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서서히 치유를 받아가는 스토미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 치유의 단계를 밟아나가야 하는데, 많이 상처받은 사람일수록 오랜 동안의 치유기간이 필요하다. 치유를 받고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 나를 그토록 못살게 굴었던 학대자를 하나씩 하나씩 용서해야하는데, 스토미는 그 모든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고 완전한 회복을 맛보았으며, 마침내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자원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며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동 학대에 대해서 통찰력을 주심으로, 나는 다른 아동 학대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처럼 그들도 불행하게 함정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특별히 이 아동 학대가 대를 이어 되물림된다는 것이 무서운 일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만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스토미]중에서-

스토미가 자신의 갓난 아들에게 무서운 분노가 일었던 장면에서, 나는 나의 오래된 기억 한 토막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치유의 은총을 알지 못하던 시기였으며 큰 아이가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였다. 아기는 잠을 안자고 계속 칭얼거렸다. 처음에는 얼러도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점점 더 소리내서 갓난아기 특유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내자, 나는 갑자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왠만한 일에는 조용히 잘 참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폭발한 분노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휘몰아쳤다. 나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 박혀있던 분노가 한순간에 올라온 느낌이었다.

나는 울고 있는 아기의 발바닥을 몇 차례 손바닥으로 때렸고, 그래도 그치지 않자 이불 위로 던져버렸다. 아기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는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두터운 이불을 아기 위로 덮어버렸다. 이불 속에서 아기는 헐떡거리며 계속 울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정신을 차렸고 얼른 사랑하는 아기를 품에 안고 용서를 빌며 눈물을 흘렸었다.

내 생명보다 소중한 내 아이를 향하여 그토록 무섭게 굴다니, 나는 그때 내가 사악한 엄마인 것 같아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 나의 이런 행동이 나의 어렸을 때의 어느 시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맏딸인 나는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늘 남동생들의 잘못까지 뒤집어쓰고 엄마로부터 심한 꾸중이나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 당시에 우리 집안은 워낙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하게 뿌리내려서 여자인 나는 그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억울한 감정 속에서 분노를 삭히며 속히 자라서 집을 떠나고만 싶었다.

이러한 나의 감정은 후에 내가 엄마가 되고 난 이후에 나의 딸아이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어느새 나의 무의식의 내면 속에 흡수된 엄마의 행동들이 내안에도 형성되어 나는 원치 않았지만 엄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 역시 자신의 분노 때문에 딸을 그렇게 학대했을 것이다.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그 시절, 입 하나 줄이기 위해 가족들은 엄마를 다른 집에 팔아버렸다고 한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던지, 엄마에게는 태산 같은 한이 쌓여 있었던 것이었다. 엄마의 분노는 그렇게 내게로 이어져 내재화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기 전까지 분노와 우울증과 무기력 속에서 부모와 세상과 심지어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오랫동안 통곡하며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았었다.

학대가 참으로 무서운 것은 대물림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높은 지위에 오른다 해도, 성직자가 되었다해도 이 학대의 대물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대받은 괴로운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몸부림쳐도 이미 내면화되어 그 사람의 인격이 되어버린 뒤에 치유의 과정을 거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기 전에 나의 대에서 이 대물림의 저주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끊어버려야 나의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수년전에 목사가 그 부인을 학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에 대한 많은 자료를 읽은 적이 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해도 내면에 들끓는 분노는 아내나 자녀, 혹은 타인에게 투사되어 드러나게 마련이다. 목사라고 해도 이 폭력의 악순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 아름답고 행복해야 할 우리들 가정에 학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야 하는가. 학대의 질긴 쇠사슬을 끊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용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형제, 친구....등 수많은 학대자들을 이제 용서해야 한다. 용서와 회개는 학대의 고리를 끊는 열쇠이다. 스토미는 이 과정을 견뎌내고 자유함을 얻었다. 그녀의 용기와 결단력과 신앙의 태도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 땅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이 치유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요즘 매스컴에 이슈화되고 있는 많은 가정 폭력과 존족살인의 소식들을 보면서 끝나지 않는 저주의 영향력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으로 학대의 경험을 치유받고, 우리 자신은 더이상 학대자의 모습으로 서지 말아야할 것이다. 학대의 사전적 정의가 ‘신체적 정서적 가혹행위’라면 나는 그 범위를 좀더 넓히고 싶다.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따스한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는 것, 차가운 표정, 차가운 시선, 그저 무관심하게 한 번 힐끗 보는 것, 야릇한 비웃음을 띄는 것, 사랑이 필요한 아이에게 따스한 포옹을 해주지 않는 것,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에게 끝끝내 아무 말 안하는 것, 부모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는 아이들에게 포옹과 사랑의 스킨십을 거절하는 것, 핀잔을 주는 것, 정당하지 않은 꾸중, 부모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정서적 괴리, 내어 민 손을 거절하는 것, 등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황폐화 시키는 학대의 모습들이다. 이러한 수많은 학대의 모습은 우리 가까이에서 언제나 볼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은 사탄의 파괴의 역사도 항상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

학대자인 엄마의 임종 앞에서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는 스토미의 모습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참다운 평화가 깃들어있음을 볼 수 있다.

“엄마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엄마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평생토록 엄마에게 그렇게 사랑스런 손짓을 단 한 번도 줘본 적이 없는 나였다. 물론 엄마도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가능한 가장 아름다운 관을 골라 거기에 크고 화려한 꽃다발을 준비시켰다. 엄마가 분명 좋아할 만한 꽃다발이었다. 나는 또 커다란 나무를 등진 묘터를 찾았다. 평소에 엄마가 숲을 좋아하셨기 때문이었다. 속옷도 새 것으로 구입했다. 엄마에게 해드리고 싶었던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받으실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엄마에 대해 그 어떤 나쁜 감정도 없었기에 나는 오히려 행복했다. 더 이상 증오도, 분노도, 용서하지 않은 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말끔히 씻어주신 것이었다.” -[스토미]중에서-

책의 마지막 장에서 스토미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스토미는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하며 그들을 감동시켰다.

“내가 어릴 때에 얼마나 심한 학대를 받았는지, 그리고 자라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자세히 이야기했다. 또 그러면서 찾게 된 잘못된 길들, 곧 마약과 낙태, 그리고 자살 충동들이 얼마나 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갔는지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거절치 않으시고 만나주신 그 날에 대해 말할 때 마음 가운데 성령님으로 인한 감동이 넘쳐났다.”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셨다. 하나님 안에서 이제 내 삶은 참 의미와 목적을 되찾았다. 물론 그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14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통해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의 치유와 구속의 사역이 계속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루아침에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아픔과 상처들을 싸매시고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일 수 있는 더욱 소중한 것으로 바꾸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이었다!” -[스토미]중에서-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서 또한 상처를 주고 있다. 이미 받은 상처와 학대의 경험을 치유받지 않으면 우리를 학대한 그들보다 더 심한 학대자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그릇들인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스토미처럼 어느 순간 완전한 치유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와 학대의 경험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강력한 치유 자원이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스토미가 그렇게 아파보지 못했다면 똑같은 아픔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치유의 길로 안내할 수 있었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치유 받은 후에 더 큰 감사와 구원의 감격을 가지게 될 것이며 치유자로 세워주실 것이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울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스토미들’에게 이 책 [스토미]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조금씩 치유를 맛보게 될 것이고, 치유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상담 이메일 [email protected]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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