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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승율 <13> ‘기적의 동산’ 옌볜과기대, 명문대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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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16일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옌지시에 2년제 옌볜조선족기술전문대학이 문을 열었다. 이듬해 4년제로 승격하면서 교명은 옌볜과학기술대학(YUST)으로 바뀌었다.

옌볜자치주는 일제강점기 조국을 떠난 우국지사들이 룽징(龍井)을 중심으로 만주 서간도, 연해주 지역까지 벌이던 독립투쟁의 결과로 생긴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장소에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다음 달 개교 행사가 열렸으니 상징성이 남달랐다. 해외에서 중국에 대학교를 설립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옌볜과기대는 흔히 ‘기적의 동산’으로 불린다. 옌지시 북산가의 20만평(66만1157㎡)에 이르는 캠퍼스 부지는 원래 공동묘지 자리였다. 마오쩌둥 정부가 화장제로 바꾸면서 폐허가 된 공동묘지를 김진경 총장이 구입한 것이다. 화장터 건물은 개조해 캠퍼스 내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캠퍼스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엘리사 선지자를 생각한다. ‘물 근원’으로 올라가 소금을 뿌려 쓴물을 단물로 바꾼 엘리사의 기적(왕하 2:19∼22)처럼 옌볜과기대는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변화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옌볜과기대는 국내외 기독교계의 후원으로 운영하다 보니 재정 문제로 대학원을 설립하지 못했다. 대신 학부를 졸업하면 해외 유학을 보내는 전략을 세웠다. 학생들은 조선족 80%, 한족 17%, 고려인과 소수민족 3%로 구성돼 있다.

옌볜과기대가 고려인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한 것은 내 처가의 슬픈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아내의 백부는 1937년 중일전쟁 때 독립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갔다. 그곳에서 소련군에 붙잡혀 일본 첩자로 오인받는 바람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소개(疏開)됐다.

처가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61년 만에 타지키스탄에서 온 편지를 통해 생존한 줄 알았다. 8개월 후 고려인 부인을 데리고 귀국한 처 백부가 한국 부인 곁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면서 석 달 후 고려인 부인만 타지키스탄으로 돌아갔다. 공항 출국장에서 처 백부와 생이별하는 고려인 부인의 안타까운 눈물은 내 심장에 깊이 박혔다.

2000년 중앙아시아를 방문할 기회가 왔을 때 고려인 부인의 그 눈물이 생각났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는 고려인 집성촌에 의뢰해 10명의 장학생 명단을 받아 입학시켰다. 이후에도 나는 매년 7∼8명씩 고려인 장학생을 후원하고 있다.

옌볜과기대는 그동안 학부와 부속 과정을 포함한 졸업생 2만2000여명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3개 국어에 능통하다. 컴퓨터를 잘 다루고 13개국에서 온 교수들에게 배우다 보니 국제 감각도 뛰어났다.

지금은 베이징대 칭화대 인민대처럼 중국 100대 중점 대학 중 하나여서 신입생 1차 선발대학에 지정돼 있을 정도로 속칭 일류대학이 됐다.

이렇게까지 급성장한 데는 무보수 자원봉사로 기꺼이 참여한 교수들의 공로가 크다. 교수진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뉴질랜드 호주 영국 캐나다 독일 등에서 온 외국인 교수까지 250명에 달한다. 가족을 포함하면 500명 이상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화장터 교회가 있긴 하지만 교정과 강의실에서 공식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찬송가를 부르지 못한다. 그래도 학생들은 졸업할 때쯤 대부분 거듭난다. 어느 학생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간증을 했는데 그 후 동네 전체가 변화된 일도 벌어졌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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