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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12>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가난함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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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친 아내는 중요한 발표가 있다며 싱긋 웃었다. 생명을 잉태했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동시에 과연 아빠가 될 준비가 됐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수입이 없는 신학생으로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형편을 생각하니 태어날 아기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기가 엄마와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동두천과 가까운 의정부로 이사하기로 했다. 나는 월간 ‘새벗’에서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낮엔 학교에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밤에는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며 날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아빠가 될 거라는 설렘이 커서 피곤한 줄 몰랐다.

1983년 2월 봄방학 동안 의정부로 집을 옮겼다. 어렵사리 미군부대 옆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다가구주택 한 층을 빌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하지만 잔금까지 치르고 보니 집은 비행장 바로 옆이었고, 수도에는 황톳물이 섞인 지하수가 나왔다. 우는 마음을 달래며 그냥 살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아이가 태어났다. 기도 중에 아이의 이름을 ‘산’으로 짓기로 했다. 산처럼 우람하고 듬직하며, 모두에게 이롭고 높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다.

나는 다시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다. 아내는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내 수입으로 살기로 했다. 서로 이의 없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이 때문이다.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곁에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당시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인간답게 살자’고 비장하게 결의했고 거처는 서울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종로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사례비는 17만원이었다. 십일조를 빼고 나면 15만3000원이 세 가족의 생활비 전부였다. 각오는 했지만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든 수입에서 오는 궁핍함은 생각보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아이의 우유를 제외한 모든 물건의 수준을 전보다 현격히 낮췄다. 옷은 살 엄두를 내지 못해 늘 얻거나 빌려 입었다. 차비가 없어 광진교를 걸어 등하교를 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학교 뒤 아차산의 약수로 점심을 때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티내고 싶지 않아 웃고 다녔다. 아내와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면서 살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궁핍을 즐기는 삶을 이어갔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당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지인들이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친구들은 장신대 성종현 교수의 집에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곤 했다. 어느 가을날 성 교수는 고향 나주의 맛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배와 감이 담긴 종이가방을 갖고 불쑥 우리 집을 찾았다. 85년 딸 가람이가 태어났을 때도 방문해 기도해주셨다.

내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과로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병실에 찾아와 눈물로 기도해 주신 오성춘 교수님과 식권을 사주시고 토큰과 아이 분유를 사주신 조활웅 교수님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는 너무 배고프면 친구들을 찾아가 밥을 실컷 얻어먹고 왔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주머니 쌈짓돈을 슬쩍 내게 건네기도 했는데 그들이 건넨 돈으로 가람이의 분유를 사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가족의 친밀함은 날로 깊어졌지만 냉혹한 현실은 서러운 눈물을 자주 흘리게 했다. 둘째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신학생 수입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는 미래를 위한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아내는 다시 교사로 복직하기를 원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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