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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패러디의 마지막 정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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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태화 교수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1∼2절) 이 찬양시가 모든 기독교인의 애송시인 것을 의심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시가 언젠가 이렇게 귓가에 울린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따뜻한 아랫목에 누이시며 쉴 만한 자리로 인도하시는도다.” 영양 과다와 빅 사이즈 시대에서 불룩해진 아랫배와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푹신한 침상을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새로운 우상을 풍자한 시구였다. 패러디는 그렇게 참을 수 없는 현대인들의 모순성을 비꼬고 뒤집어엎으며 우리 곁에 다가왔던 것이다. 패러디의 행진은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런 패러디가 노래로 불린다. “만화영화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무아지경에 누이시며 한없는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시는도다.” 청소년들은 이런 노래에 이끌린다. “게임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게임방에 누이시며 주먹의 세계로 인도하시는도다.” 청춘 남녀들은 어떤가. “성형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뜨거운 열기에 누이시며 콧대 높은 으쓱거림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한편 장년들은 이렇게 패러디하지 않을까. “대형 아파트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로열층에 누이시며 선민(選民)의 공간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다면 노년층은 어떨까? “실버타운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안락한 침대로 누이시며 품위 있는 죽음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패러디는 재미있다. 패러디는 유쾌하다. 때로는 일상의 반복으로 인해 미처 관통할 수 없었던 진실의 스펙트럼을 엿보게도 하며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패러디만으로는 삶의 폐부에 도달할 수 없다. 역전(逆轉)의 안간힘이 안쓰러울 뿐이다. 패러디가 남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바로 지금이 서글픈 패러디를 멈추고 삶의 진실성을 찾아나서야 할 때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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