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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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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마 6:1-4


중국에 '소림광기'라는 유머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마침 침대 하나를 새로 샀답니다. 집안에 들여 놓고 보니 너무 아름다운 침대입니다. 그래서 자랑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자랑할까 궁리를 했습니다. 한참 궁리를 하다가 '내가 꾀병을 앓아 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병문안을 와서 침대를 보겠지.' 하고는 꾀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이 나자 이웃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병문안을 오게 됐는데,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의 애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속바지를 하나 샀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자랑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문안을 와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한 발을 침대 위에 탁 올려 걸치고는 바깥에 있는 옷자락을 펼치면서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니, 어디가 아프셔서 그렇게 거동을 못하고 누워 계십니까?' 그랬더니 침대 구경을 시키려고 꾀병을 앓던 사람이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이나 댁이 앓고 있는 병이나 똑 같은 병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자랑하고 싶어하는 심리입니다.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사람들이 자랑을 잘 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물 잘 난 것, 또 하나는 자기 혈통, 그리고 자기 지위, 마지막 하나는 남보다 의롭게 산다, 선하게 산다, 양심적이다 하는 소리를 듣는 것 즉, 경건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특별히 자랑하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경건, 특별히 종교 생활하시는 분들이 이 경건을 자랑하기 위해서 남보다 특별히 선한 체하고 의로운 체하는 이것은 가장 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흔히들 말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질이 좋지 못한 자랑을 하는데 특별했습니다. 유대 나라에는 종교 생활 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세가지 기본 요건이 있다고 모두 믿고 있었는데, 첫째가 구제하는 것이요, 둘째가 기도하는 것이요, 셋째가 금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세 가지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의롭고 경건한가를 인정 받고 싶어했고 사람들에게 또 자기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구제는 이웃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경건 행위가 아닙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경건 행위입니다. 금식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경건 행위입니다. 얼마나 극기할 수 있느냐,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일종의 훈련이기 때문에 그것이 경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가지를 철저하게 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은근히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본문 말씀, 특별히 1절부터 18절까지는 이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건하게 믿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는 이 세가지를 등한히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제를 등한히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하다 말다 하겠습니까? 가끔 필요할 때는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 세가지가 나쁘다거나 이 세가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이 1장에서 특별히 주님이 지적하는 것은 동기가 좋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금식하는 동기가 안 좋고, 구제하는 동기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주님이 지적하시는 이 구제 문제에 있어서도 주님이 보실 때 아주 좋지 못한 마음 바탕이 깔려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경건 생활을 은근히 자랑하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우리가 얼마나 구제를 하고 사는지는 모르지만, 과연 주님이 인정할 만한 구제를 하고 사는 사람인지 우리 스스로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깊이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구제가 무엇입니까? 야고보 1장 27절에서 야고보가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게 정의를 했습니다. '구제는 과부와 고아가 환난을 당할 때 돌아보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당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돌보아주며 자기의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구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제야말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구제는 경건이라고 그랬습니다. 정결한 경건, 깨끗한 경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이라고 야고보는 정의를 했습니다. 성경책만 끼고 다니고 예배만 잘 본다고 경건이 아닙니다. 날마다 엎드려 기도만 한다고 경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정결하고 거룩한 경건은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돌아보는 구제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구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 보십시오. 정말 눈물 겹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의교회라고 없는 줄 아십니까? 많습니다. 더욱이 가슴이 아픈 것은 그럴 듯한 개인 단독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은 지역일수록 가난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하에, 반지하에, 옆모퉁이, 문간방에 전부 세 들어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촌 같은데 너무나 가난한 사람들이 구석구석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서 나오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는 한두 명이 아닙니다. 봉천동 달동네는 또 말할 것도 없습니다.
30대의 부인이 있습니다. 과부입니다. 자기 남편은 동생이 휘두르는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6살, 8살 먹은 딸 둘하고 가난한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봉천동 달동네에 겨우 사람 둘 정도 기거할 수 밖에 없는 작은 방을 얻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딸만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대, 30대 남동생도 같이 삽니다. 그 남동생들은 발바닥 각질이 자꾸 벗겨지는 희귀한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합니다. 발바닥이 아프니 나가서 활동을 못하고 날마다 집에 앉아 있어야 됩니다. 이런 남동생 둘까지 다섯 식구가 사는 것입니다. 그 좁은 방에서. 그 부인이 새벽에 봉제 공장에 나가서 열심히 재봉틀을 돌려 가지고 한달에 80만원을 벌어 겨우겨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들도 우리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 보다도 더 험악한 가정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마음에 늘 두고 기도해주고 필요할 때는 도와주는 것이 구제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하루종일 일하고 가난한 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동분서주 하는 것을 보고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입 방아를 찧었습니다. 원래 자기가 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테레사를 비판했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날마다 물고기를 잡아다가 입에 넣어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가난한 자들은 더 게을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낚싯대를 들려 주어야지, 물고기를 자꾸 입에 넣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돌보아 주는 사람은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병들어 자기 스스로 숟가락도 입에 넣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신 이상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낚싯대를 들려 줄 수 없습니다. 입에다 물고기를 넣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물고기를 넣어 주어, 그들이 다행히 자기 힘으로 일어서게 되면, 당신들에게 그 사람들을 보낼 테니 낚싯대를 들려 주십시오.'
맞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낚싯대를 갖다 주어도 그것을 들고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필요하면 그들을 도와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이 구제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하나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호렙산에 임하시면 산이 진동하고 구름이 온 산을 덮고 불꽃이 타오르고,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말하면 모든 백성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땅에 무릎을 꿇는, 그런 이미지가 있지 않습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굉장히 무서운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인식되지만 그 배후에는 사랑과 자비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늘 염두에 두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주자주 교훈 하시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봅니다.
신명기 15장에 가면 특별히 가난한 자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네요. 15장 11절입니다. 땅에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끊이지 아니하겠다고 전제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이 택한 백성 가운데는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도록 하실 것 같은데, 역시 세상인지라 가난한 자가 없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네가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구역 안에 있는 네 형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반드시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구제하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만큼 가난한 자들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그래서 '과부와 고아는 내 것'이라고까지 심지어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면제년이라고 하는 특별한 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하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가 세상을 살다 보면 쌓아 놓은 것 없습니다. 저금통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보면 가정에 우환이 덮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식구가 아픕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웃집에 사정 사정해서 빚을 낼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빚을 내 가지고 병든 집안 식구를 고쳐야지요. 빚을 냈는데 어떤 때는 가뭄이 들어서 1년 내내 일거리가 없습니다. 요사이 말로 하면 실직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 남의 집에 가서 정말 애걸복걸해 가지고 빚을 얻어 식구들을 먹어 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가난한 자들이 빚을 지게 되면, 사실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느냐 하면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자꾸 빚만 쌓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5,6년 빚이 쌓이다 보면 그 다음에는 채주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빚을 안 갚으니까 결국은 아들을 종으로 빼앗아 가고 딸을 종으로 빼앗아 가고, 나중에는 부인까지 뺏기고, 자기도 종으로 팔릴 수 밖에 없는 아주 피 맺힌 극한 상황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아시고 면제년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시행하게 하셨습니다. 빚을 진 사람이 7년이 되면, 즉 면제년이 되면 반드시 그 빚을 전부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얼마를 빚졌던지 간에 더 이상 받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숨을 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중에 고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제도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땅이 저주 받은 것 아닙니까? 그만큼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십니다. 신명기 15장 10절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그렇게만 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마.'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약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저 천상에 있는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이 세상에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오신 하나님,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세상에 오시면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먼저 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뿐 아닙니다. 그는 일평생 가난한 자, 병든 자, 세상에서 사람 대우 받지 못하는 자들 편에 서 계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기의 진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 지구상에 지금 세워져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세상 사람 앞에 교회의 이미지는 어떻게 비쳐져야 합니까? 작은 예수로 비쳐져야 합니다. 교회를 드나드는 모든 성도는 작은 예수로 세상 사람 앞에 비쳐져야 되는데, 그 작은 예수는 어떤 모습입니까? 가난한 자요, 가난한 자 편에 서 있는 자요, 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 앞에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제라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렇게 중요한 구제일수록 사람들이 외식하기가 쉽다는 사실입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을 싸는 것, 겉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외식을 사람 앞에서 나팔을 분다는 말로 비유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자랑 하기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구제를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외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사랑의교회는 그런 사례가 별로 없지만 제가 과거에 몸 담고 있었던 교회들에서는 생각하면 이상한 사람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구제하면서 나팔 붑니다. 돈 좀 내고 나팔 붑니다. 헌금 좀 하고 나팔을 붑니다. 그래서 인정 받고 싶어합니다. 목사나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이 인정을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그것 때문에 불평하고 돌아 다닙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부자들이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할 때도 TV나 신문에 자기 이름이 난다고 하면 남보다 앞장 서서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잘 안합니다. 칭찬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제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장 최고의 선입니다. 구제를 좀 했다 하면 세상 사람도 그의 덕을 기리며 성자로 대우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구제를 대단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나도 모르게 구제하면서 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기 위해 구제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6장 1절에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구제할 때에 사람에게 나팔 불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그런 함정이 너희 앞에 있다.'는 것을 주님이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백에 하나라도 이런 외식의 근성이 남아 있으면 이 시간 성령께서 저나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이 잘못된 것들을 다 청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나쁜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대로 하면 이것은 정결한 경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린내 나는 경건이요, 외식하는 구제입니다. 불결한 경건이요, 하나님이 보실 때 얼굴을 돌리시는 경건입니다.
이렇게 외식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으면 하나님의 상을 잃어버린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구제를 하는 사람에게 다 상을 준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구제를 하는 사람에게만 상을 주신다고 합니다. 4절에서 특별히 이를 언급합니다. '네 구제함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은밀하게 하나님만 알 수 있도록 구제를 할 때 하나님이 그 구제를 좋아하시고, 하나님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고, 하나님이 그 구제를 마음에 담아 기억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하나님이 불러서 상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근히 알아주는 일이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이렇게 상상해 보십시오. 자부를 둘 가진 시아버지가 계십니다. 큰 자부는 그런 대로 아들이 잘 벌어서 잘 사는데, 둘째 자부는 아들이 잘 벌지 못해서 늘 가난하고 생활에 쫓깁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 네의 그 어려운 생활 때문에 항상 마음 아파합니다. 그런데 큰 자부가 남 모르게 자기 동서를 돕는 것입니다. 동서를 불러서 위로하고, 남 모르게 음식도 나누어 먹고, 필요할 때는 돈도 보태주고, 애들 학비도 좀 주고, 남 모르게 큰 며느리가 자기 동서에게 자꾸 그렇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시아버지는 모른체 하지만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며느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어느날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큰 며느리를 부릅니다. "얘야, 여기 한번 앉아 봐. 네가 하는 일을 내가 다 알고 있어. 너에게 너무 감사해. 우리집에 너와 같은 며느리가 들어 온 것 너무 나는 행복하게 생각해.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해야 돼. 네 하는 일이 너무 고마워서 내가 조금씩 조금씩 준비를 하고 숨겨 놓은 게 있는데, 오늘 그것을 내가 너한테 주려고 한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서 며느리에게 줍니다. 며느리가 놀랬지요. 자기가 어떻게 하는지 시아버지에게 보고한 일도 없고 또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다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만 봉투 하나를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은밀히 보시는 자기 시아버지의 그 정성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 방에 들어가서 열어 봤더니 천만원 짜리 수표가 2장 들었습니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여러분,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히 구제하는 자를 마음에 두셨다가 상을 주신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 상을 받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게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약속하신 이 상이 무슨 상인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분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똑같은 것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하고 옥 목사하고 어떻게 똑같이 상을 받겠습니까? 그가 18살 어린 나이에 평생 가난한 자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 집을 나서는 날, 어머니는 그를 따라 나오면서 딸의 손을 잡고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아, 너 꼭 예수님의 손을 평생 잡고 있어야 돼. 그리고 네 손도 예수님 손처럼 되어야 해. 꼭 기억해라." 그 말을 마음에 평생 새기고 죽을 때까지 가난한 자와 함께 살다가 간 테레사 수녀하고 이렇게 팔자 좋게 수 만 명 앞에서 설교나 하면서 존경이나 받고서 살던 옥 목사하고 어떻게 상이 똑 같습니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상이 같다면 하나님은 물론 불공평한 분이십니다.
분명히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 상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된다고 주님이 말씀합니다. 오직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만 아시게 구제하라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구제하는 자기도 모르게 하라는 말입니다. 오른손이 할 때 왼손이 모른다면 자기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은밀하게 해야 하나님이 그 구제를 축복하신다고 하니 사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남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도우면 막 자랑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못 견디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정말 어려운 것이 구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그러십니다.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는 것, 여기에는 두 가지의 암시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동기가 깨끗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구제입니까? 하나님을 구제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입니까? 아니면 나를 위한 구제입니까? 누구를 위한 구제냐 그 말입니다. 동기가 순수해야 됩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기쁘게 구제한다면 그 구제는 아름다운 동기, 순수한 동기, 깨끗한 동기를 지닌 구제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그러나 은근히 나 자신을 위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구제합니까? '내가 구제 좀 많이 해야 사람들이 인정해 줄 것 아니야. 교회에서도 내가 구제 많이 한다는 소문나면 권사도 시켜주고 장로도 시켜줄지 모르지 않느냐?' 은근히 자기 의를 자랑하고 자기 선을 자랑하기 위해서 했다면, 집을 팔아서 구제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구제 인정 안하십니다. 벌써 동기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가 어떤 것이냐면 다 잊어버리는 구제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얼마 주었다고 일기장에 써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언제 누구를 만나서 겉옷을 벗어줬다고 컴퓨터에 입력시키고 나중에 검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잊어버려야 됩니다.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를 여러분이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마지막 재림하실 때에 온 인류를 자기 앞에 불러 모으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불러 모으실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크신 하나님이 이 지구 역사상 태어난 모든 인류를 한 자리에 불러모으는 것이야 누워서 식은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천사들이 딱 갈라 놓는다고 합니다. 오른쪽에는 하나님을 잘 섬긴 거룩한 성도들이 모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일컬어 양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왼쪽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세상 사람들, 그리고 예수를 믿어도 엉터리로 믿었던 모든 사람들을 전부 그 자리에 모은다고 합니다. 그들을 일컬어서 염소라고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 날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때는 소름이 끼칩니다. 정말 대단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왼쪽에 있는 염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가난한 자를 봐도 못 본 체했다. 너희들은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는 자를 한번도 찾아간 일이 없다. 너희들은 병든 자를 보아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고통 당하는 자를 봐도 못 본 척했다.' 그랬더니 염소들이 대뜸 합창을 했습니다. '예수님! 언제 우리가 안했습니까? 1985년 12월 25일 우리가 저 형무소를 찾아간 것을 모르십니까?' 어떻게 날짜까지 다 외우고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불행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모른다.' 이것이 엉터리 구제입니다. 자그만 하게 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양들에게 얘기 하십니다. '너희들은 가난한 자를 부지런히 찾아보았구나. 감옥에 갇힌 자를 불쌍히 여겼구나. 병든 자를 위해서 너희들이 많은 희생을 했구나. 감사하다. 너희들이 1985년 1월31일 날 저 서대문 형무소에 찾아간 것을 내가 잘 기억한다.' 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도무지 기억이 안나는데요. 언제 우리가 형무소에 갔다 왔습니까? 저는 아직 형무소 구경도 못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나는 다 알고 있다.' 이것이 진짜 구제입니다.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는 해 놓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구제입니다.
최근에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했지 않습니까? 89세 먹은 전 대통령 레이건이 자기 응접실에서 그 대통령 취임식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가 과거에 그 취임식을 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대통령이었다는 것도 기억을 못한다고 합니다. 알츠 하이머 병이라는 소위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얼마나 재미 있습니까? 제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맞았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슨 작은 선을 행한다든지, 구제를 할 때 알츠 하이머 병을 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놓고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이 많습니까? 누구만 기억하면 됩니까? 예수님만 기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철저하게 잊어버리자 그겁니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작은 예수로서 이 세상 앞에 빛이 되려면, 소금이 되려면 구제를 등한이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 중에 상당수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의교회 금년 예산에서만 해도 약 17억에서 18억원이 가난한 이웃을 돕는 예산으로 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한달에 1억 5천만원 이상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시는 만원짜리 한장, 천원짜리 한장이 이렇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감사하십시오.
외환은행에 다니다가 실직을 당한, 예수를 안 믿었던 어느 형제가 이혼하고 자살하려고 계획을 다 세웠다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30만원을 교회에서 구제했습니다. 평생 받아보지 못한 구제금입니다. 30만원을 받고는 너무나 감격해서 '나 같은 사람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는 외롭지 않다. 그래도 나는 사람대우를 받고 있구나.' 하며 그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지금은 취직을 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헌금하는 것으로 구제한다고 하는 내색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거지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실직 당한 자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병든 자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가끔 스쳐 지나가던, 전에는 몰랐던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눈을 고정시키도록 만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는 가난한 자, 고통 당한 자는 누굽니까? 예수입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런 사람을 외면하시면 안됩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돈 좀 모으면 구제하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텔레비전에 광고나 난다고 한다면, 신문에 대문짝만한 이름이나 난다고 하면 몇 푼 낼지 모르지만, 돈 생기면 구제하겠다고 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시카고 트리뷴지에서 갤럽조사를 수년 전에 한 일이 있습니다. 1년에 만 달러 수입이면 빈민층입니다. 한달에 천불도 못 버니 빈민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소득층에 속한 사람들이 1년 동안 구제를 하기 위해서 내는 돈이 자기 수입의 4.3%라고 합니다. 그래서 4백 30불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이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만불 이상 고소득층의 경우는 어떤지 아십니까? 자기 소득의 1.3%밖에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겨우 600불을 낸다고 합니다. 만불 미만의 사람들이 내는 비율대로 한다면 적어도 2,200불은 내야 하는데 그런데 2,200불은 고사하고 600불을 내서 땜질을 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구제하는 줄 아십니까? 돈이 많아야 구제가 가능한 줄 아십니까? 그런 생각은 깨끗이 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루미네'라고 하는 간판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루미네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큰 백화점 체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설명을 합니다. "저 백화점 주인이 배우 출신의 여자라는군요. 아주 잘생기고 예쁜 여자인데 혼자 산다고 해요. 그런데 최근에 30억엔, 우리나라 돈으로 300억원을 들여서 고급 저택을 짓고 있었는데 다 짓기도 전에 그만 가버렸습니다. 나이가 이제 갓 60에 들어서는 사람인데, 집 짓다가 갔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300억원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대체 그 큰 저택을 지어놓고 혼자서 헤엄을 치려고 했나? 아니면 날아 다니려고 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 돈 가진 사람들이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돈을 쌓아서 무엇하실 겁니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거룩한 일에 쓰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도 모르게 인간적인 감정으로 하는 이야기니까 욕하지 마세요. 속으로 '그 여자 잘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헛된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오래 살면 무엇합니까? 그러므로 구제는 없다고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만원이 있으면 천원을 나눠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보고 구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나누면서 살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구제를 하다 보면 탐욕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가난한 자와 함께 울면서 그들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 놀라운 기쁨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샘이 생깁니다. 내가 움켜쥐고 있으면 염려와 고민과 갈등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눠줘 보십시오. 기쁨이 생깁니다. 돈으로부터 자유와 해방감이 얻습니다. 마음에 놀라운 평화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요사이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병들어 망합니까? 아닙니다. 마음의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없어서 병들고 망하고 잠 못자고 고통 받는 것 아닙니까?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도 조직이기 때문에 부패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패하지 아니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느냐? 결론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교회가 초점을 맞춤으로써 교회는 부패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후미진 곳에 교회가 뻗칠 때에 교회는 교회 스스로 부패할 수 있는 요인들을 쓸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관심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로 옮길 때, 늘 새로워 질 수 있다고 그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 누굽니까? 교회의 짐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축복의 채널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드디어 교회 다울 수 있고, 가난한 자들로 인해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나 가난한 자들을 여러분이 마음에 두고 기도해 줍니까?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여러분이 없는 중에서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정성을 쏟습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은밀히 아시는 구제를 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는 예수로써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 편에 서고 가난한 자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한 자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면서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읍시다. 이 말씀대로 우리 모두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나도 살고 가난한 이웃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듭시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 우리 모두 은밀히 보고 계시던 하나님이, 은근히 마음에 두고 계시던 하나님이 나를 따로 불러서 특별히 나를 위로 하시며 상을 주시는 놀라운 행복을 우리 모두가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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