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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이 없는 믿음 (약 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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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약2:14-17)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신약성경 안에는 모두 21권의 서신서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각자의 서신서를 기록할 때 나름대로 강조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믿음을 강조해서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해서 교훈했습니다.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든든히 붙드는 길임을 우리에게 강조하면서 가르쳤습니다. 또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려질 만큼 특별히 사랑을 강조해서 우리에게 교훈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야고보서는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행함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아름다운 행실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하고, 소망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하고, 사랑도 선행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돈 많은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 일에는 그다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왔습니다. 심장이 마구 조여오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 병세는 좀 어떠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풀이 죽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있다 원장선생님이 와보셔야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원장선생님이 간호사 한 사람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장로님을 이리저리 진찰을 했습니다. 눈꺼풀을 한 번 뒤집어보고, 가슴에 청진기도 대보았습니다. 또 손으로 배도 꾹꾹 눌러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원장선생님은 갑자기 간호사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간호사, 빨리 가서 장의사를 불러 와!"
그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제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원장선생님이 자기를 진찰한 뒤 갑자기 장의사를 불러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급하게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종이와 연필 좀 갖다주세요! 제가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겠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 제대로 헌금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치니까 겁이 덜컥 난 것입니다. 그는 목사님이 전해주는 종이와 연필을 받아 쥐고서 아라비아 숫자로 1자를 적고 동그라미를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원, 십만원, 백만원, 천만원, 일억, 그는 다시 한 번 숫자를 확인하고 난 뒤에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적고서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목사님에게 건네주면서 자기가 그 금액을 헌금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그것을 받아 쥐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문이 다시금 열리면서 밖에 나갔던 간호사가 젊은 의사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젊은 의사를 보더니 야단쳤습니다.
"이봐, 장의사! 아니 진찰을 했으면 차트에 기록을 남겨야지. 이렇게 비워놓으면 어떻게 하나? 이 정도 같으면 퇴원을 시켜도 되잖아? 왜 환자를 이렇게 붙들어 놓고 고생을 시키나?"
알고 보니까 젊은 의사의 성이 장씨였습니다. 성이 장씨인 장 의사(醫師)를 불렀는데 죽고 난 뒤에 장례를 치르는 장의사(葬儀社)를 부른 줄 알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입니다. 장로님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목사님을 찾아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 전에 써 드린 숫자에서 동그라미 하나만 좀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헌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지 저 혼자 독차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조금 양보하지요."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내게도 유익이 없고 다름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믿음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사도 야고보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3:5에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까?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안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 우리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그의 행함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거짓 믿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바른 믿음, 참 믿음, 살아있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는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해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14절 말씀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자기의 신앙을 자기의 입술로 고백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해야될 일입니다.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그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행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 말뿐인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결과가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익한 믿음입니다. 소위 말하는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 자신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7:21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뿐인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처럼 천국의 성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천국의 문은 엄청 컸는데 그 문 전체가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힘껏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베드로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알아보고서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어느 교회에 다니는 아무개 집사입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오려면 믿음의 증표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한 번 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에게 믿음의 증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믿음의 증표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사정을 했습니다.
"제게 믿음의 증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까 없네요. 그렇지만 저는 수십년 동안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니 좀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베드로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됩니다. 믿음도 없이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교회 마당을 밟고 다니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되돌아가십시오."
그는 다시금 베드로에게 애원했습니다.
"제가 그냥 교회 마당만 밟은 것이 아니고, 십 수년 동안 집사로서 직분을 가지고 봉사했습니다. 그러니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베드로는 그 소리를 듣고서 큰소리쳤습니다.
"뭐라고요? 믿음도 없이 집사 노릇을 십 수년 동안 했다고요? 이 양반 교회에서 꽤나 말썽을 피웠겠구먼. 당신 같은 사람은 더더욱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천국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습니다. "쾅!"하는 그 소리에 놀라서 깨어보니까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다음부터 그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름뿐인 집사가 아니고, 정말 충성하면서 신실한 일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행함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겠습니까? 이제는 구원받은 자답게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함을 위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다운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본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사흘 뒤에 부활하셨습니다.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의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나서부터 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약1:1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이렇게 칭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이제 자기는 예수님의 동생이 아니고 예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의 형이 아니고 자기의 주님, 곧 그리스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나중에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담임목사였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예루살렘 교회를 담임하면서 그는 수도 없이 말만 많이 하고 행함이 전연 없는 명목상의 교인들을 많이 봤을 것입니다. 말로는 믿노라 하면서도 행함이 따르지 않는 교인들을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뿐인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 자신을 능히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나 자신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것을 15∼16절에서 하나의 예로 들어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로만 생색을 내려고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강도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았습니다. 거반 죽게 되어서 길거리에 내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사장 한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하찮은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결코 우연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때 그 순간에 마침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 곁을 지나가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그를 돕지 않고 피해 지나갔습니다.
잠시 뒤에는 레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레위 사람은 제사장보다 더 나쁩니다. 성경에 보면 그가 강도 만난 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고 했습니다.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자가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 사람은 그를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말로는 잘 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다.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는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니까 틀림없이 누군가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돕고 싶은데 너무 일이 바빠서 그냥 가야 되겠습니다. 제가 기도할게요. 그러니 조금만 견디세요."
말로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달랐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서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붓고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짐승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하룻밤 옆에 묵으면서 그를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난 피도 닦아주고 또 목이 마를 때는 물도 마시게 했을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주막을 떠나면서 그는 주막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저 불쌍한 사람을 저 대신에 잘 돌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돈이 더 필요하면 제가 돌아올 때 꼭 갚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마감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은 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말과 혀로 하려고 하지 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사가 퇴근을 했습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길가에 어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아주머니가 어린 딸을 등에 업고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 옆을 지나쳤습니다. 그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저녁식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녁을 들기에 앞서서 식사기도를 드리려고 하는데 문득 조금 전에 지나쳤던 거지모녀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원망 어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 거지모녀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왜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까?"
그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불쌍한 모녀를 위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순간에 너로 하여금 그 곁을 지나가게끔 만들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도움을 주면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유명한 동화 「세 가지 질문」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세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제일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이 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에 한 도사가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드디어 숲 앞에 이르렀습니다.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모두 돌려보내고서 혼자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때마침 노도사는 혼자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왕은 도사에게 물었습니다.
"도사님, 제가 도사님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때는 언제입니까?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또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좀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노도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밭가는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보니까 이미 도사는 너무 늙어서 몸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왕은 자기가 대신해서 그 일을 해주겠다고 도구를 받았습니다. 왕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밭을 갈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녁이 되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때 갑자기 숲 속에서 누가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왕과 도사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를 자세히 보니까 사나운 맹수의 습격을 받아서 다 죽어 가는 몸이었습니다. 왕과 도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른 부상당한 사람을 도사의 암자로 옮겼습니다. 왕은 하루 밤 그를 극진하게 보살펴주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겨우 건졌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건진 사람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서 뜻밖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폐하, 저는 평소에 폐하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서 이번 기회에 폐하를 죽이기 위해서 뒤쫓아온 자객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저의 목숨을 살려주셔서 이제는 저의 마음 속에 있는 원한이 다 사라졌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소리를 듣고 왕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도사를 찾았습니다. 도사는 어제 자기가 갈았던 밭에서 씨앗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도사님, 도사님 때문에 저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저의 원수를 저의 친구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사님께서는 아직도 저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발 대답을 좀 주시기 바랍니다."
도사는 씨앗을 뿌리는 일을 계속 하면서 입을 열어 드디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폐하 스스로가 이미 찾으셨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어제 저를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이미 폐하는 자객의 칼에 맞아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가시면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 그 순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폐하가 대하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늘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가 대하고 있는 그 사람이 제일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서 선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베푸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따로 있고 행함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 진실된 믿음, 산 믿음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행함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애당초 믿음이 없으니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달걀 두 개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유정란이고 하나는 무정란입니다. 유정란은 그 안에 생명인자가 있습니다. 산 달걀입니다. 그러나 무정란은 그 안에 생명인자가 없습니다. 죽은 달걀입니다. 그래서 어미 닭이 유정란을 품고 있으면 때가 되어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무정란은 아무리 오래 품고 있어도 병아리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은 달걀이기 때문입니다.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둘 다 똑같이 얼굴이 있고, 팔이 있고, 다리가 있습니다. 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움직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아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울음을 터뜨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산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살아있느냐, 죽어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도 바른 믿음, 산 믿음 같으면 자연히 행함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이하에서 두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또 한 사람은 기생 라합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연히 행함으로 따라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아들 이삭을 기꺼이 번제로 바쳤습니다. 기생 라합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무릎 쓰고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자연히 행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믿음이 아닌 것, 죽은 믿음, 거짓된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예가 사도행전 8장에 나옵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빌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많은 병자가 병고침을 입었습니다. 귀신들이 쫓겨났습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보니까 빌립에게서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술사 시몬도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빌립을 열심히 쫓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소문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이 가만히 보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니까 성령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마술사 시몬은 마음 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뇌물을 주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행8:19입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베드로가 그것을 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8:20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마술사 시몬은 예수를 믿노라고 했습니다.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열심히 빌립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애당초부터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은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8:21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마술사 시몬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그 옛날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자답게 살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니까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구원받은 자답게 살지 못했다면 우리도 이 시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정말 행함이 있고 실천하는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 우리의 소망, 우리의 사랑은 아름답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 다음에 언젠가 우리 모두가 천국 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예화의 집사님처럼 천국 문이 닫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문 앞에 설 때는 자동적으로 그 문이 활짝 열리면서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먼저 간 성도들과 또 예수님이 반갑게 우리를 환영해 주시는 놀라운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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