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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에 선을 행하심 / 눅 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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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6:6-11
제목: 안식일에 선을 행하심
설교 : 이승우 목사 (옥곡대죽교회)


또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희년의 때를 선포하는 것으로 증거 합니다. 예수는 성령의 충만과 권능으로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 포로 된 자들에게 은혜의 해를 전파하십니다. 예수는 그 해를 전파하는데 구약 선지자와는 다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앞으로 있을 은혜의 해를 예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은혜의 해를 가져 오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은혜의 해를 가져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며, 귀신을 쫓아 내시었습니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과 행위는 모세 율법의 증거를 따르는 것이며 그 증거의 완성자로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면서도 예수의 증거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고 또한 그 권세로 죄인들을 부르시고 함께 먹고 마셨을 때 비방하였습니다. 그들은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것이 좋다 하는 자들입니다.

안식일에 있었던 일들도 예수께서 희년의 때를 가져오시는 안식일을 성취하는 분으로 증거 합니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들의 밀을 새로운 안식의 생명의 양식으로 주셔서 배부르게 하심으로 안식일의 주인으로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주린 자들이 배부름을 얻는 안식의 때, 희년의 때가 왔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서에서는 앞선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기사와 이 기사를 한 날에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마가복음은 독립된 한 사건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은 또 다른 안식일로 말씀하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첨가합니다. 누가복음의 강조점은 예수께서 항상 가르치시면서 이적을 베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구원과 자비와 긍휼이 나타났다는 권세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적과 표적이 나타난다는 것이 누가복음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그의 권세는 자기 백성을 자유롭게 하는 긍휼의 이적과 권세입니다.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구실을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면서 병든 자를 치료하신 사실들을 알고 있었고, 안식일에 생명의 위급한 자가 아닌 이상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은 안식일 계명을 어긴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말하고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하였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먼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먼저 안식일에 고쳐 주어도 되냐고 물었고 예수께서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안식일 규례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율법의 성취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구약 율법은 자기 백성에게 멍에였습니다.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율법은 온전한 생명의 회복과 생명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옛 율법을 성취하여 온전한 생명의 회복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마태복음에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마가복음도)는 율법의 증거를 따라 그렇게 하지는 않고 병든 사람을 가운데 세우고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을 물으면서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에게 이 사람은 긍휼을 입어야 될 사람, 치료를 받아야 될 사람임을 내 세우고 물음으로 병을 치료하십니다. 예수의 이러한 변론은 단순히 그들의 잘못된 안식일 규례를 교정하기 위한 변론이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이러한 선을 행해도 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안식일 규례에도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생명을 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마태복음처럼) 지금 손 마른 사람은 당장 치료함을 요구 받을 상황이 아니며 다른 날 충분히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오히려 병든 자를 치료하신 것은 그가 긍휼 얻을 자에게 긍휼을 베풀므로, 도움을 받을 자에게 도움을 주심으로, 생명의 회복을 받을 자에게 생명의 회복을 주심으로 그가 생명의 회복자로서 안식을 성취하는 분으로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사역 초기부터 안식일에 회당에서 항상 가르치셨으며 병든 자를 치료하였고 귀신을 쫓아 내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행함으로 구약 선지자에게 약속하였던 은혜의 해가 이루어짐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변론의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잠잠하였다고 말하며 예수께서 그들의 반응을 보고 진노하시어 둘러보시며 그들 마음의 완고함을 애통해 하셨다고 말합니다. 생명을 구하러 오신 권세 있는 하나님 아들의 증거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처럼 은혜의 해를 가져오시는 분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략을 앎에도 불구하고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 말하고 그 손이 회복되게 하심으로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긍휼과 자비의 은혜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가져 오시는 새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옛 것을 주장하고 옛 것에 머물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께서 생명의 회복을 주심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종말의 긍휼과 자비를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부요하며 위로를 받았고 배부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요와 위로와 배부름은 가나안 땅의 것이며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먹고 마심의 부요함과 생명의 온전함 때문에 그것에 만족해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 비천한 자들, 병든 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부름과 높임과 생명의 치료와 자유와 놓임을 입습니다. 예수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여 그가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배부름과 높임을 증거하고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제 희년의 때의 자유와 놓임과 생명의 회복이 주어졌습니다. 구약 율법 자체에서는 손 마른 자들은 놓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희년의 때에도 병든 자들의 생명의 회복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으로 가져 오시는 안식과 희년의 때는 다릅니다. 병든 자들이 치료함을 받고 귀신에 눌린 자들이 자유함을 받으며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생명의 온전한 회복과 자유가 나타난 것입니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료함으로 선을 베풀어 생명을 구원하여 안식과 희년의 때의 이룸을 증거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승천하여 선을 베풀며 생명을 구원하는 구주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의 증거를 받지 않고 예수를 죽음에 내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며 악한 자들로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가져 오신 의인 예수를 죽음에 내어 놓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영광스럽게 하셨는데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어 주와 그리스도가 됨으로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하늘 보좌 우편에서 희년의 때를 선언하시는 안식의 완성을 선언하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고난 중에 가난함 중에 비천함 중에 있었던 구약 의인들의 소망과 구원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전에 구약 때 의인의 소망은 다윗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은 다윗을 하나님이 건짐으로 영광스럽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의인들은 이방의 지배 아래, 교만한 자들의 압제 아래 있으면서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 아래서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나타난 위로와 영광은 가나안 땅의 것이며 죽음을 영원히 이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신 다윗으로 말미암아 세우신 가나안 땅의 안식의 나라는 이방의 힘 앞에서 이방의 부요함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부터 살림을 받고 영원히 살아 계신 구주로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어 영광스럽게 되셨음으로 이 나라는 세상의 부요함과 힘에 의하여 무너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죽음이 무너뜨리지 못하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이제 예수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안식의 주요 그리스도로서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 온전한 희년의 때의 생명과 안식을 주십니다. 가나안 땅 밀로 자기 백성을 배불리고 손 마른 자를 치료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구약 약속이 이루어짐을 선언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가나안 땅의 생명과 병든 자의 치료를 통하여 생명의 회복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늘에 승천하신 분으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으로 생명의 회복자이며 안식의 주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과 안식의 선물은 보좌 우편의 나라의 권세와 영광과 생명입니다. 그 권세와 영광과 생명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령의 권능을 입히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그의 나라와 권세와 생명과 은혜를 입히셨기 때문에 죽음이 가난이 질병이 더 이상 애통하게 하거나 얽매이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권세가 그의 백성을 지배하여 삼키거나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지배하거나 죄가 지배하거나 귀신이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 나라는 죽음으로부터 살으신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에 속한 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 우편에 속했기 때문에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고 귀신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고 어둠의 권세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예수를 죽음에 내어준 유대 당국자들의 핍박과 세상 권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난하고 비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회개를, 천하만민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안식일이 무슨 날이며 희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약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손 마른 자들보다 더 비천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둠의 종이었고 귀신의 종이었고 사단의 종이었고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복이 귀신과 썩어질 우상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희년과 안식의 복이 생명의 회복의 복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 땅을 넘어 가나안 땅을 넘어 변방에 있는 우리 민족에게도 전파되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구주로 믿음으로 생명의 회복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생명의 회복과 구원은 예수 죽으시기 전처럼 질병이 치료됨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표적이 나타나고 이적이 보여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 받음으로 선물 받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성령으로 주의 나라와 권세와 생명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질병이 치료 되고 우리의 물질이 부요하게 되어 부자가 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질병이 있고 우리에게 죽음이 세력이 엄습하고 우리가 여전히 가난하다 할지라도 복되다 말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의 나라의 권세와 생명과 안식의 복을 선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 중에도 부요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질병 중에도 생명의 복의 충만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핍박 중에도 승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과 아픔 중에도 참다운 안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가난합니다. 질병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의인들처럼 슬퍼하거나 애통해서는 안됩니다. 아직까지 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고 아직도 나는 생명의 회복을 받지 못하였다고 근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으로 마음 아파해도 그것은 참다운 경건도 참다운 겸손도 아니며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눈물 흘리면서 마음을 찢는 것은 종교적인 위안일 뿐입니다. 또한 그러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밤 낮 하나님 앞에 구하여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전혀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긍휼과 자비의 주님이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하는 것이 우리의 간구하는 것이 먹고 마심의 부요함 때문에 그러한 것이 없으면 아직 온전한 생명의 복을 받지 못한 것처럼 어리석음으로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함중에도 가난함 중에도 질병 중에도 곧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우리 주께서 주신 성령의 선물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부요함과 권세의 높음을 선전해야 합니다. 세상에 교만하고 악한 자들이 오히려 부요하고 권세가 높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담대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안식과 생명과 권세를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조금 부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 건강하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 지위가 높다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복과 생명을 다 받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주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주신 것은 다른 형제들보다 내가 더 복을 많이 받았다고 교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를 부요하게 하고 형제를 섬기도록 위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육체의 강건함과 물질의 부요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 때는 그러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의 증거였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이 말씀을 바르게 알고 믿음의 확실함에 굳게 거할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가 세상에 선을 베풀고 생명을 구하는 구원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입히신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다니시면서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주님의 일을 우리가 하는데 이제 우리는 더 큰 일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제자들처럼 이런 저런 이적을 베풀어서가 아니라 이제 우리는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들을 회개시키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함으로 우리가 세상에 선을 베풀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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