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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엡 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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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성 경 : 엡6:10-12
설 교 : 윤일문 목사 (사도교회)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 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얼마 전에 말레이시아에서는 큰 산불이 발생해서 엄청난 자연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말레이시아의 학교 대부분이 그 연기 때문에 휴교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현지에 근무했던 한국 회사 간부의 말에 의하면 불이 땅 속 2미터까지 들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불이 땅 속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나무가 뿌리까지 타들어 갔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한 물로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있는 불씨를 잡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영적인 전쟁도 이와 같은 현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깊이 2미터까지 죄악의 불씨가 있어서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엄청난 불이 살아날 수 있고 이것이 자신을 비롯해 가까운 사람들까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불씨가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열심히 살아가느라고 바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기 바쁜데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또 다른 군대가 엄청난 훈련을 하면서 지하 깊숙이 참호를 파고 숨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연구하며 연습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서 승리를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기발한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 안에 있는 혈기나 죄의 본성을 충동질해서 우리로 하여금 남을 무너뜨리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왜 이러한 형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에 여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한 순간도 죄 짓지 않는 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거의 대부분의 승리를 놓치고 있으며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악의 수단으로 본인도 모르는 가운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매순간 주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끝 부분에서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를 가르치신 이유는 우리가 얼마든지 악의 세력과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악"과 "시험"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악"은 외부적인 공격을 의미하며 "시험"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죄스러운 충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다가 술 취한 사람이 차를 몰고 인도에 뛰어들어 사고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것은 악에 해당합니다.
여자들이 밤길을 걷는데 악한 사람이 쫓아와 때리거나 돈을 빼앗고 추행하는 짓도 악입니다.

또 사업이 그런 대로 잘 되고 있는데 거래처에서 부도를 내는 바람에 나의 사업까지 피해를 입어 연쇄부도가 났다면 이 또한 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죄스러운 충동입니다.

어느 날 이유 없이 화가 나 가족이나 동료를 미워진다든지 가만히 있다가 성적이 충동이 일어나 죄를 짓고 싶어한다거나 다른 이에 대한 의심으로 내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이미 만연해 있는 악의 요소가 공통적으로 우리를 포로로 삼고서는 그것이 악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서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악의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나와 관계된 모든 상황은 이미 악이 지배하고 있어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데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험은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유혹해서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즉 시험을 유혹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악과 시험이 우리를 항상 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이 걱정스러워서 악에게 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들어옵니까?

엡 4:25-32절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 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 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 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 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와 같이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에서 이와 같은 것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여기서 "종말로"라는 말은 "결론적으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론을 세워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하던 바울은 결론 부분에서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하는 말씀, 즉 교회가 해야하는 역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이 말씀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 되겠지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 가운데서 이 말씀의 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 가운데 자기 자본이 별로 없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는 중간에 빚을 더 많이 얻어 사업이 큰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행은 망하게 버려 두지 않고 더 많은 공적 자금을 대주며 사업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내용을 살펴보면 자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행의 것입니다.
은행의 눈치만 살피면서 살뿐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형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을 흥청망청 쓰고 외국에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니까 돈이 많은 나라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대부분 외국에서 빌려온 돈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IMF 사태를 맞게 되고 이제는 IMF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잘 나서 잘 사는 줄 압니다.
그래서 저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모두는 주님이 빌려주시는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한순간이라도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순간에 엄청난 재앙과 유혹에 빠져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일들이 잘 되는 것 같은 것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기도하지 않아도 일이 뜻대로 잘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삶이 형통하고 일이 술술 잘 되어 가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형통할 때에는 기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일을 이루어 가시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자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를 한 순간이라도 멈추시면 우리는 삶 전체가 부도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더욱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떼어놓으려는 세력이 항상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이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든지 하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사단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쉬지 않습니다.
이 세력은 우리 안에 불을 질러놓거나 혹은 갑작스런 악의 공격으로 우리를 파산시킵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하고 파산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서 주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또한 내가 교만해서 주님을 멀리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러한 무장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 해답은 12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잊어서는 안 될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1. 우리의 적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씨름"이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는 "레슬"이라고 적고 있고 헬라어 원문을 보면 "팔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고대 사회에서 노예들에게 싸움을 하게 하던 격투기를 말합니다.

그 격투기는 둘 중에 한 쪽이 죽어야 끝이 나는 싸움입니다.
우리나라 씨름은 신사적인 경기입니다.
그러나 이 때의 격투기는 상대방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하는 목숨을 건 사투였습니다.

물론 구경하는 사람들은 재미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경기를 하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목숨을 건 혈투입니다.
만일 상대방에게 한순간이라도 손목이나 방을 잘못 잡히든지 약점이 드러나기만 하면 절대로 사정을 봐 주지 않고 순간적으로 끝이 나는 피비린내 나는 경기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나의 약점을 많이 알아내려고 사전에 모든 정보를 수집할 것이며 그것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서 결정타를 가할 것이며,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됩니다.
비겁한 반칙도 무제한 허용되는 싸움입니다.
마귀가 우리들을 공격해 올 때에 이와 같은 모습으로 공격을 해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공격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계속 당하고 살아왔습니다.

성격이 급하면 급한 부분이 약점이 되어서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잘난 척하는 공명심이면 그 부분을, 거짓말을 잘 하면 그 부분을, 음란에 대해서 약하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야비하게 공격해 오는 상대가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상대는 "혈과 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사람을 가리키는데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할 대상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싸워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과 씨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어떻게 작전을 세워야할지를 모를 것입니다.
내가 눈을 감고 장님과 같은 상태에서 그냥 씨름도 아니고 목숨을 건 격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오싹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싸움을 하다가 자꾸만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온갖 악한 행동을 가해올 때 그 사람과 싸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은 단지 속아서 악하게 사용되는 하수인일 뿐이지 진짜 적은 그 사람 뒤에서 그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과 싸우려고 하면 더 크게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반드시 악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가장 무서운 거짓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이나 마귀가 전혀 존재하는 않는 것처럼 믿게 하거나 혹은 흥미 있는 이야기 거리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또 어떤 이야기는 머리에 뿔이 달린 무시무시한 도깨비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는 귀신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침대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도 합니다.

머리를 산발한 처녀 귀신으로 등장시키기도 하고 드라큐라 같은 흡혈귀로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귀신의 모습을 자꾸 보게 해서 정작 귀신이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을 위장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절대로 죽은 혼이 구천에 떠도는 것이 아닌데 자꾸 그렇게 소개함으로 진짜 귀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막아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북한 공산당을 빨갱이라고 교육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 곁에 내려와서 이웃이 되어서 간첩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빨갱이를 강조하다보니 어딘가 빨간 사람만 간첩인 줄 알았습니다.


(마귀의 공격 방향)
마귀는 세 가지의 방향에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1. 그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자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귀가 직접적으로 사람을 공격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의 분별력을 어둡게 해서 사람들의 가치관을 왜곡하고 그들을 지배합니다.
사실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사회의 문화는 귀신 문화였습니다.

모든 것에 귀신이 지배를 했고 그 결과 마땅히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해도 궁합이 맞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못했고 더욱이 여자는 사회 제도의 틀 안에 가두어 의도적으로 무지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에서는 처녀나 총각이 순결한 상태에서 있으면 너무나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 순결을 헌신짝처럼 버리게 만듭니다.
이것은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정은 무엇이고 결혼은 무엇인지를 모르게 하는 귀신의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이나 입시의 제단 위에 모든 청소년들의 시간과 생각을 다 바치게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입시뿐이며 입시는 전쟁과 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험 성적이 좋지 않다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는 것보다는 정부와 결탁을 해서 쉽게 돈 버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게 해서 나를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갑갑한 공식과 같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공부, 취직, 결혼에 이르는 모든 길을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길로 걸어가야지 조금이라도 거기서 벗어나면 가차없이 비난을 가하거나 사회에서 도태시켜버립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남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극히 위험합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가야 하는가?"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교회의 모습이 마치 중세 종교 암흑기와 같은 틀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분별하지 못하고 그냥 따라갑니다.
마치 남들이 장에 가니까 거름을 지고 장에 가는 것처럼 많이 모이는 것으로 더 크고 좋아 보이면 더 많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결국 사탄은 잘못된 가치관을 이용해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그 가치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점점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을 불러 일으켜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생각조차하지 못하고 그냥 따라가고 있습니다.

2. 가치 중립적인 면을 장악해서 사람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정사와 권세"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의 정치나 권력을 주장하는 천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정치나 권력은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즉 권력은 그 자체로는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나 권력은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해서 세상이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서 더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 자리에 앉음은 바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권력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은 권력을 가진 자를 충동질해서 그 이상의 위치에 서게 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산과 같은 대우를 받으려 한다거나 사람들의 인격까지 지배하려 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유통 수단이기 때문에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선한 일을 도모하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돈이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돈으로 사람을 사려고 할 때 그 돈은 이미 보통 돈이 아니라 죄를 짓는 돈이며 사탄의 입김이 들어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돈에게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희노애락이 많은 경우에 돈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학식도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학식이 많다고 해서 더 선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고 해서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공부 잘 하는 사람이 교만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학식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든지 혹은 그것으로 사람을 악한 길로 이끄는 이론을 만든다면 이미 그 이론은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과 마찬가지로 요즈음 학생들이 바로 이러한 학식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는 체 다른 사람보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저 공부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학식이 사람들은 지배하는 것이 바로 사단에게 조종당하는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생각하거나 주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학식이 있다 싶은 사람은 거의 아슬아슬한 자리까지 올라가 곡예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으로서는 거의 말해서는 안 되는 수준까지 갔다가 오는 것을 재미있어 합니다.
그러다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것처럼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면 그의 학식은 이미 사탄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심리적인 부분인데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자극해 우리의 몸을 악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합니다.

대개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사탄이 선호하는 대상입니다.
그는 앞 뒤 재지 않고 화부터 내기 때문에 이 혈기로 인해 악한 수단에 너무나 많이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성격이 급하다고 생각되면 항상 3초만 다스리는 묵상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급하게 반응하려고 할 때 3초만 기도하면 그 순간을 이기게 되고 그것을 이기면 영원까지 이기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우리는 사탄이 쳐 놓은 덫에 걸려들게 되고 심판대 앞에서 아차 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자주하는 사람을 충동질합니다.
직접적으로 아무나 닥치는 대로 공격하게 합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반응만 오면 악한 생각이 일순간 폭발해버리고 맙니다.

또한 마음 속에 쓴 뿌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의 상처가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사탄은 그 약점을 계속 건드립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점점 어두워지게 되고 대인 기피증까지 생기게 됩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것은 내 안에 잠재된 무서운 죄성을 사탄이 충동질해서 성령의 통제나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러한 것들이 십자가와 함께 다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 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서 죄와 정욕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지만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때로는 거기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만일 풀어주기만 하면 절대로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속이기도 합니다.
나를 괴롭히던 악당이 체포돼 감옥에 들어갔다고 가정을 할 때 그는 거기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가석방이라도 돼 풀려나기만 하면 나를 더 해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죽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정욕을 절대로 석방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너무 자신만만해 하기도 하고 방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동안을 영적으로 승리하는 생활을 했고 또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무에 달려 있는 정욕을 한 번쯤은 풀어놓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욕에게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동안 좋았던 것은 다 잃어버리고 은혜 받았던 것은 다 까먹어버리고 걷잡을 수 없는 악의 수단으로 실컷 죄를 지은 후에야 정욕에서 손을 뗍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 라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육체의 정욕에게 기회를 주지말고 철저하게 봉쇄하라는 뜻입니다.
즉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영구적으로 매달아 철저하게 무력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육체의 유혹에 충동을 받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과거에 짓던 죄에 익숙해 있어서 아주 작은 충동을 받아도 스스로 엄청난 자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정욕은 마치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불씨와 같습니다.
일단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만 하면 한순간에 불타 올라서 그동안 주님이 우리 안에 만들어 놓으셨던 아름다운 세계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렇게 매달아 놓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 위에 성령을 충만하게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제대로 무장하는 것을 도와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죄성이 다시 꿈틀거리려고 할 때마다 다시 우리를 도와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성령님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하려고 하다가 자신도 힘들게 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됩니다..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완전해지려고 할 때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자꾸만 비교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만든 가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사탄이 내 안에 있는 이러한 근성을 자꾸 자극해 엄청난 죄의 불씨를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분명히 죄의 본성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생기면 그 불씨는 맹렬한 기세로 우리들을 다 태워버리게 됩니다.

결국은 구원의 기쁨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자기가 과연 구원받은 백성인지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면의 시계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에게도 항상 이러한 위험한 상황은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침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권투로 표현하자면 수없이 많은 잔 펀치를 맞다가 크게 한 번 맞고는 완전히 쓰러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서서히 기쁨이 식어지고 예배가 시들해지기 시작하고 자꾸만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초기 증세로 알고 여기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화를 내는 것이나 입에서 욕을 하는 것, 찬송보다는 유행가가 익숙한 것, 그리고 집에서도 말씀을 보는 기쁨보다는 세상 적인 오락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더 잦은 것, 그리고 걱정거리가 생겼는데도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들고 나가기 전에 자꾸만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것

이러한 모습이 바로 잔 펀치를 맞고 있는 증거입니다.

초기에 잡지 않으면 치료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진단하거나 목회자와 상담을 통해서 이러한 잔 펀치를 맞는 상태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승리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의 삶에서 나 자신은 완전히 가리워지고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분들은 위기가 닥칠 때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반응하면 사탄의 깔아 놓은 덫에 걸리게 됩니다.

악한 마귀에게 속지 않으려면 우리 안에는 구조적으로 선한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과대 평가해서 능력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입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안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온전하게 발견하고 성령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 성령님이 내 마음에 충만하게 오셔서 나의 온 삶을 지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나의 삶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찬송이 항상 넘쳐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따로 시간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매일 훈련을 해야하고 그 훈련을 위해서는 따로 거룩한 시간을 구별해서 드리는 예배의 삶이 필요합니다.

또한 마귀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가치관을 그대로 좇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갑니다.
그들을 따라가면 결국 인생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이나 지식 따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안에 있는 죄성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은 이러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 안에 있는 죄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역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성에게 기회를 주고 불씨에 대한 미련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속에 있는 죄의 불씨를 죽이려면 자기를 믿지 말아야 합니다.
큰소리 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닌다고 이 영적 전투에서 안전지대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 자체가 안전지대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안전지대는 오직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내 안에서 손수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즉 말씀이 인도하신 대로 순종하며 좇아가면 됩니다.

기도하면서 지시를 받으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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