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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픔의 세월 / 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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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출 1:1-7 
제목/슬픔의 세월


성경을 읽으면서 인물들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은 참 재미있습니다. 그럴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나이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이삭은 180세를 살았습니다. 야곱은 애굽에 갈 때가 130세였는데,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고 1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17살 때 형님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극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생애가 펼쳐졌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살이하던 일, 억울하게 감옥에 간 일, 그리고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한 일, 그리고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극적인 일들이 전개됩니다. 그가 총리가 된 나이가 30세입니다.
자 이 때부터 요셉의 나이를 한 번 따져 봅시다. 그 후 7년 동안의 풍년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창고를 늘려짓고 곡식을 사서 채웠습니다. 그 후 예고된 무서운 일곱 해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흉년이 시작되던 첫 해의 요셉의 나이는 38세였겠지요. 그리고 흉년이 2년째 들 때에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오게 됩니다. 그 때가 요셉이 39살 때입니다. 그 후 5년 동안 흉년이 더 들었습니다. 흉년이 모두 끝날 때의 요셉의 나이는 44세였을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던 30살부터 일곱 해 풍년과 일곱 해 흉년이 모두 끝난 때까지 14년 동안 요셉은 애굽 최고의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애굽의 정치가 요셉의 손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애굽 사람들 중 요셉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가 요셉의 생애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끝났다고 해서 요셉의 영광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세상을 떠난 것은 그가 애굽에 온 지 17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애굽에 왔을 때에 요셉의 나이가 39세였으므로, 거기에 17년을 더하면 요셉이 56세가 되었을 때 야곱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때는 흉년이 모두 끝나고도 12년이나 지났을 때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었을 때 장례를 지내는 장면을 보세요. 창세기 50장을 보면 그 장례가 대단히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십 일을 애곡하고 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야곱의 유해를 가나안 땅의 가족 묘지인 막벨라 굴까지 운구해서 장례를 지냈습니다. 총리의 아버지가 아니면 이런 화려한 장례식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흉년이 끝났지만, 요셉이 권력을 잃고 쫓겨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애굽의 총리 자리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까지만 계산해도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어서 무려 26년 동안 총리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다음 이야기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요셉이 56세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은 그 다음 요셉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세월이 수십 년 흘러버립니다. 그래서 창세기 50장 22절을 보면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 세를 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대체 아버지 야곱을 장례한 후, 즉 그가 56세였던 때로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10세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요셉이 죽었을 때가 110세이므로, 성경은 무려 54년의 세월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요셉의 생애를 두고 성경은 무엇을 기록했고, 무엇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그가 노예로 고생하고 감옥에 가고, 총리가 되기까지의 격동의 세월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안정된 후의 일에 대해서는 왜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요?
우리 교회가 속해있는 부산노회는 지금 노회사를 편찬하는 중에 있습니다. 제가 그 일에 참여하고 있는데, 간단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자기 교회 역사를 포함시켜 줄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부산 지역에 복음이 뿌리내리는 과정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교회와 인물들은 당연히 기록되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와 사람들은 생략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란 의미 있는 것의 기록입니다. 과거의 일이라고 모두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과거의 기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은 기록하고, 기록할 가치가 없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요셉의 110년의 인생 중에서 17살 이전의 꿈을 꾸던 그 소년 시절부터 그가 총리가 되고 흉년을 극복하고, 아버지를 장례하기까지의 삶은 성경에 기록할 가치가 있는 세월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하여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삶은 기록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요셉의 후반부 생애는 기록할만한 가치가 없을까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이 설교의 초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요셉의 후반부 인생에는 새로운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는 형제들보다 존귀하게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추수 마당에서 형제들의 단이 자신의 단을 향해 절하는 꿈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의 별을 향해 절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그는 그 꿈들을 가슴에 품고 비전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러다가 그 꿈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노예가 되었고, 감옥에 갔고, 우여곡절 끝에 총리가 되었으며, 승리자의 위치에서 형제들을 만났고,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려왔습니다. 여기까지는 기가 막힌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요셉의 전반부 인생은 꿈을 품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꿈을 이루어간 세월이었습니다. 그 세월은 눈물도 많았지만, 보람도 있었고, 사는 흥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이미 꿈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로서의 평안한 삶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가족들과 형제들의 가족들은 아무 것도 부러운 것이 없이 고센 땅의 비옥함을 누렸습니다. 더 이상의 눈물도 없고, 고난도 없었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은 아무 것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냥 흘려보낸 세월이었을 뿐입니다. 평안하지만, 창조적 열매가 없는, 그냥 낭비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런 세월은 성경에 기록할 가치가 없습니다.

둘째로, 그 세월 동안에는 아무런 새로운 도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꿈이 없으니 새로운 도전도 없었습니다. 마치 오로지 대학 입시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수험생이 일단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다음에는 긴장이 풀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젠 아침 일찍 일어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젠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늦게 일어나, 빈둥대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분초를 아껴가면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던 그 소중하게 사용하던 시간을 물처럼 흘려보냅니다. 빈둥거리면서 축복된 대학 시절을 낭비합니다. 그런 세월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 3 시절에는 자신이 이런 잠재능력이 있는가를 날마다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도 견딜 수 있는 자신을 보면서 대견스러웠습니다. 물론 초조하기 이를 데 없어도 인생을 사는 긴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그저 그렇게 지낼 뿐입니다. 그런 세월은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요셉의 인생 후반부에도 기록할 만한 새로운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총리로서 평안히 하나님 안에서 살았을 뿐입니다. <좀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몸부림은 없었습니다. 이 때의 요셉은 한없이 느긋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는 이미 지났습니다.

저는 이제 우리 교회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의 지난 십 여 년은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예배당을 이전 신축하는 꿈을 가졌습니다. 요셉이 꿈을 가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노예살이를 하고 감옥에 가듯이, 우리도 눈물 흘리는 시간을 겪었습니다. 주민들의 예배당 건축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IMF의 어려움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엄청난 이자 부담 속에서 교회는 긴축재정을 하고, 성도들은 금반지까지 빼어 바치면서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도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이리로 처음 이사올 때보다 많은 교인이 증가했습니다. 부산 노회와 영도 안의 다른 교회들이 우리 교회를 부러워했고, 목사님들은 저를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 안에 있었던 일들은 기록해 둘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영도중앙교회 역사 안에 빛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목사로서의 제 사역과 우리 교회를 두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새로운 꿈도 가지지 않고, 새로운 도전도 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요셉의 후반부 인생과 같은 때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배당도 다 지었겠다, 교인도 이만하면 조금씩이라도 늘고 있겠다, 별 큰 문제도 없으니, 이제 잘 될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고센 땅이 주는 비옥함을 누리면서 하루하루 평안히 살던 요셉의 가족들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요즘 우리의 시간들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아무 것도 기록할 만한 내용이 없는, 그냥 흘려보내는 세월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저 그렇고 그렇게 지낸 세월이었지, 이렇게 아무런 할 말도 없는 세월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와 우리 모두의 인생은 그저 그런 인생으로, 아무 것도 기록해 둘만한 가치가 없는, 하나님께서 기억해 둘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으로 소멸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처음 애굽에 갈 때 그 숫자는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70명이었습니다. 그 후 애굽에서 사는 동안 숫자가 많이 늘었습니다. 숫자로 보면 그들은 엄청난 부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진정한 부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잘 보세요. 그들이 겨우 70명이었을 때 그들은 애굽의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온 애굽을 흉년에서 건졌습니다. 그 가족 70명은 애굽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세요. 왠지 서글프지 않습니까? 그 숫자가 늘어서 생육이 중다하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의 노예 살이입니다. 그들의 조상 요셉이 처음에 애굽에서 노예 살이를 했는데, 지금 그 비극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숫자가 적었을 때는 오히려 역사의 창조자였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수 백 만 명이 되도록 늘었건만, 그들은 노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역사가 오히려 후퇴하였습니다. 본문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기를 잘 낳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무섭게 숫자가 늘어납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다 무엇입니까? 노예가 늘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불쌍한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교회가 신생아로 가득한 산부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숫자는 늘어나고 있지만, 세상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아기들로 가득한 산부인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숫자가 늘어가는 것만으로는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공동묘지의 무덤도 숫자는 늘어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 새로운 꿈과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록할만한 세월이 됩니다. 요셉의 전반부 생애는 고단함, 눈물, 시련의 생애였으나, 기록할 만한 영웅적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평안함과 안락함이 있었지만,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만약 가정하건대 애굽의 흉년이 모두 끝난 후, 요셉의 말년 즈음에 온 가족들을 다 모아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면 어떠하였을까요? 애굽에 처음 올 때가 70명이었으니, 애굽에서 몇 십 년 지난 후에는 몇 백 명으로 늘었겠지요? 그들을 다 모아서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이 애굽 땅은 우리가 살 약속의 땅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그리고 내 부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저 가나안 땅이 우리 땅이라고 하셨다. 비록 지금 우리는 애굽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면서, 편안히 이 고센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제 우리 여기를 떠나자. 떠난다는 것은 힘들고 고단한 것이다. 가나안 땅은 고센 땅처럼 기름진 곳도 아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대해주듯이 잘 대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 그대로 있으면 우리는 이 안락함 속에서 부패할 것이다. 우리는 비만증에 걸려 숫자는 늘어나도 나중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 일어나라, 고단하지만, 새로운 목표를 향해 떠나자> 이렇게 말하면서 애굽 땅을 벗어났다면 어떠하였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노예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정에 어린 선물을 받으면서 애굽을 벗어낫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꿈도 없이, 도전도 없이 고센 땅에 취해 살았던 사백 여년 동안, 그들은 숫자는 많았으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는 너무도 나약한 노예의 백성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목표가 달성된 다음에, 그 즐거움에 너무 오래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부단히 기도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를 생각해 보세요. 물이 없어 헤매던 그들이 <엘림>이란 곳에서 물 샘을 만나고, 종려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엘림을 떠났습니다. 엘림에 계속 머무르면 광야의 유랑민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고단하고 힘들어도, 목마르고 지쳐도 계속 걷는 사람들만이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날마다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 영도중앙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향해 도약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새로운 목표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 교우들의 삶도 계속 성장하길 원합니다. 오늘의 성공에 만족하지 마시고, 더 큰 은혜를 사모하여 은혜 위에 은혜를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1층 공사가 끝났으면, 2층을 지어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세월이 노예가 되어가는 슬픔의 세월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미래로 전진하는 능력의 세월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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