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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행복한 사람 /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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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박원일목사 [[email protected]
제 목 : 참 행복한 사람 (시편23:1-6)


오늘 혹시 오랜만에 교회 오신 분들은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이 왜 저렇게 젊어졌나 하고 오해 하실까 염려해서 미리 밝히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담임목사님이 휴가차 외국 출타중이어서 부목사들이 번갈아 설교를 하게 되었고, 그 중 제가 첫 순서를 맡게 된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대타작전이 성공하여 오늘 여러분에게 홈런은 아니더라도 안타라도 칠 수 있길 바랍니다. 아마도 홈런은 다음 타자들이 뻥뻥 때려줄 것입니다. 이제 옆에 분들에게 인사할까요. '말씀의 은혜를 받읍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고자 하고, 권력을 잡고자 하며,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것에서 행복을 찾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고, 또 어떤 사람들은 추억 속에서 행복을 찾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미래의 비젼을 꿈꾸며 행복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비해서 진짜로 행복한 사람은 오히려 드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함께 배워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참 행복한 사람을 보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 비교해 보고, 또 배워 봄으로써 우리도 오늘 본문의 사람처럼 참 행복한 사람이 되길 주의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첫 느낌은 참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기만 해도 행복과 평화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시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저도 이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평안해 지고 참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본문을 너무너무 많이 읽으니까 제 얼굴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씌어지는 것 같더라구요. 보입니까? ----. (보여야 되는데, 혹시 보이는 사람은 저를 한 번 쳐다봐 주시겠습니까? ---네, 거의 다 보이는 것 같군요.) 여러분도 시23편을 많이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정말 이 시인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가 왜 이렇게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행복합니까? 돈이 많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권력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이토록 행복한 이유는 돈이나 권력 때문이 아니라 1절 말씀 때문입니다. 함께 1절을 읽겠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도 행복의 한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건 모두 1절의 결과 때문입니다. 1절이 없으면 2-6절의 행복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1절 중에서도 다윗을 진짜 행복하게 하는 것은 1절 후반부의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도다' 때문이 아니라 전반부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때문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토록 행복해 하는 것은 여호와가 그의 목자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참 행복한 사람이냐? 그건 바로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사람이 2-6절까지의 기쁨을 누릴 것이며, 그 사람은 진실로 오늘 본문과 같은 노래를 그의 삶 속에서 늘 부를 수 있는 참 행복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를 처음 오시거나,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오늘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이 행복을 진실로 진실로 맛볼 수 있게 됩니다. 돈이 주는 행복이나, 권력이나 다른 것들이 주는 행복은 순간적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입니다. 돈이 많아 행복한 사람은 그것을 잃으면 행복도 잃어버립니다. 돈이 많아 행복한 사람은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왜소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행복은 6절의 표현처럼 평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기만 한다면 그 행복은 빼앗길 수도 없고, 그 누구 앞에서도 왜소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천국에서도 영원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여러분의 목자로 삼으십시오.
만약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데 조건이나 자격이 붙는다면 참 힘들 것입니다. 만약 그 목자가 살찌고 튼튼하고 영리한 양들만 자신의 양으로 받아준다면 우린 아무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양으로 삼으십니다. 이 자리에 나와있는 사람 중에 아무리 부족하고 죄많고 어눌한 사람일지라도 다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있으며 이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십시오. 시23편의 축복이 바로 여러분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는 혹시 이렇게 물어올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 믿고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지 오래 되었는데 이런 행복은 맛보지 못하고 있는데요. 여전히 부족한 것도 많고 힘든 것도 많이 있습니다.'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도 여호와를 목자로 불렀는데 정말 내가 부족한 것이 없는지. 하지만 저도 부족한 것도 많고 어려움도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족한 돈은 저도 부족하고, 이런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참 지혜가 필요한데 지혜도 부족하고 정말 부족한 것 투성이입니다. 부족한 게 많다보니 행복감을 맛보는 것도 적은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고, 다윗은 가짜로 쇼를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겠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거짓되다 하여도 하나님만큼은 진리이며 또한 그분의 말씀 또한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다는 것은 저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증인들이 목숨 걸고서라도 외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모순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고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고요? 그렇다면 반문해야 할 것은 내가 정말로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고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비유 중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하는 것은 내가 정말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냐는 것입니다.
목자는 동쪽으로 가라고 말하는데 나는 남쪽으로 가지는 않습니까? (요즘 양들은 약아서 목자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동쪽 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남쪽으로 가자니 찝찝하고 그래서 동남쪽으로 간다고 합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 목자가 주는 참 행복을 맛 볼 수는 없습니다.
2절 말씀에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그가' '목자가' 그렇게 해 줍니다.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도, 의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 음침한 골짜기에서 안위하는 것도,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것도 다 목자가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목자 아닌 다른 존재가 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목자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는 양이 어떻게 이런 것을 맛볼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말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면서 실제에는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이런 행복은 도무지 맛볼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목자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 풍속을 쫓고 있는지. 목자의 뜻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내 고집이, 내 자존심이 더 강해서 못된 뿔난 염소처럼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는지.- 다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 하고싶은 대로하고, 세상 풍속이나 가치관대로 쫓아다니면 시편 23편은 그림의 떡입니다.
또한 일주일 중에 주일만 목자의 인도를 받고 다른 날은 옆집 목자 따라다녀서도 곤란합니다. 목자의 품안에 좀 있어야 푸른 초장도 맛보고, 쉴만한 물가도 갈텐데 노다지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려서 돌아다니니까 목자가 챙겨주고 싶어도 챙겨줄 수가 없답니다. 그렇다고 평일에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주일에는 인도를 잘 받느냐 하면 그건 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평일에 목자의 인도를 받는 연습이 안된 사람은 주일도 비슷하게 지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목자의 말보다는 엉뚱한데 더 신경을 씁니다. 그러니 목자가 베푸는 풀 맛은 도무지 느낄 수가 없습니다.
진짜로 나의 삶 속에서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부르며 따라야 합니다. 옛날 추억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옛날에는 잘 따랐는데 가지고는 오늘 목자가 주는 그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고 매일매일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곧 목자의 말씀을 듣고 그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목자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면 틀림없이 시23편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목자를 따르면 6절 말씀처럼 목자의 축복이 평생 나를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목자를 따르지 않으면 목자의 축복도 나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제 여호와를 목자로 부르며 따르는 사람의 축복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의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다. 이것은 2절부터 5절까지 축복의 종합이자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시34:10절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물론 이 부분에서도 우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내가 온 우주를 다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양으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내게 모든 것을 다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언제든지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도 부족한 것은 많았습니다. 다윗이 애굽과 같은 넓은 나라와 수많은 군대와 병거들을 원했다면 그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애굽 왕보다 많이 가지지 못했지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필요 없지만 다윗에게 군대가 필요할 때면 하나님께서 군대로 채우실 것이며, 또 다른 것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그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어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만약 양이 목자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너무 멋있어서 가지고 싶다고 난리를 피우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양이 풀 대신에 금목걸이가 없다고 '부족한 거 투성이네요' 하고 얘기하면 그는 평생 부족한 거 밖에 없는 그래서 감사보다는 불평밖에 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양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론 양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목자의 관점에서 볼 때 양에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지혜는 양으로서의 자족함입니다.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자족함이 있어야 하고, 목자는 목자로서의 자족함을 알아야 하고, 양은 양으로서의 자족함을, 성도는 성도로서의 자족함을 배워야만 합니다. 양이 임금의 것을 탐내면 불평 밖에는 돌아올 것이 없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재물과 쾌락을 탐내면 그 또한 불평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성도는 성도로서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성도로서의 자족함을 배워야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족함을 배우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구를 다 갔다 주어도 여러분은 여전히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할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부족함이 없음을 깨달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빌4:11-12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나님은 양으로서의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도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필요를 채워주시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절에서 목자는 양의 육적인 필요와 평강을 채워주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또한 3절에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영과 육에 있어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를 풍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갈급함을 가지신 분들, 육신의 문제를 가지신 분들은 영육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혼자서 고민만 하지 말고, 또 엉뚱한데 가서 두드리지 말고 좋으신 목자에게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구하는 이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그리고 모든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게다가 그분은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분이십니다. 인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의 우리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누군가 함께 해 주는 것이고, 또 누군가가 안위해 주는 것 아닙니까? 4절은 이 모든 것을 목자가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목자는 내 삶 속에서 음침한 골짜기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론 더 좋은 초장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음침한 골짜기로도 나를 인도하십니다. 음침한 골짜기를 만났을 때 목자 없는 양같이 낙망치 마시고, 이제는 나의 목자가 계시니 골짜기 이후의 더 좋은 푸른 초장을 기대하십시오. 나를 인도하시는 나의 목자는 참 좋은 목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험한 골짜기를 지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자의 말에 '누군가 내 곁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나를 향해 박수 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태산이라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해주고, 위로해 주고, 박수 쳐 준다면 태산도 넘는다는데 우리 곁에는 선한 목자가 영원히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원수 앞에서도 패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록 원수 앞에서 약하고 작을지라도 나와 함께 있는 목자는 크고 강하시기에 5절의 말씀처럼 원수 앞에서도 승리의 잔칫상과 존귀의 기름을 베푸시며 축복의 잔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로 인하여 너무 많이 괴로워하거나 증오하지 마십시오. 목자이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의 잔이 넘칠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원수를 만나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6절 말씀을 보면서 오늘 말씀을 매듭지으려 합니다. 먼저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제 이 좋은 목자를 모시고 살아가는 양들은 한가지 확신과 한가지 결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한가지 확신은 나의 평생에 목자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사람은 배신도 하고 실망도 안겨 주지만 하나님은 영원토록 신실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은 오늘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 열조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이셨던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반드시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에서도, 물질의 문제에서도, 영의 문제에서도, 심지어는 인생의 음침한 골짜기나 원수 앞에서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를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 다시 한번 결단합시다. 다윗처럼 나도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결단은 영원히 믿음 안에 살겠다는 결단이며, 영원히 목자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결단이 우리의 삶 속에 매일매일 그리고 순간 순간 고백되고 순종되어질 때에 목자의 축복도 우리를 영원히 따를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 되어 시23편의 축복과 찬송을 누릴 것입니다. 그 행복한 사람, 참 행복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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