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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같은 열두 해의 다른 느낌 / 막 5: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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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송병주목사 [[email protected]
제 목 : 같은 열두 해의 다른 느낌 (마가복음5:25-43)


들어가는 말

이 땅에서 우리는 고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랜 시간을 해결하지 못한 채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오랜 고통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급박하게 닥친 일로 인해 갈팡질팡하게 되는 급한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이런 2가지 종류의 고통으로 인해 깊은 고뇌와 갈등과 눈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2가지 종류의 고통 중에 어떤 것이 좀더 견디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삶의 진을 빼는 고통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고통 중에 어떤 고통이 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한 명의 여인과 한 소녀와 만남을 시작하셨습니다. 한 여인은 12년을 혈루증으로 고통을 겪은 여인이고 한 소녀는 열두살 아이로 급박한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만나는 이 12라는 숫자와 관련된 두 사람은 우리 인생이 경험하는 가장 상징적인 고통 2가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이 2가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의 고통과 눈물과 한숨을 풀어주시고 새로운 생명과 삶을 허락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사건의 시작

오늘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꿇어 엎드리는 일로 시작합니다. 회당장이라하면 우리식으로 옮기면 당회장 혹은 수석 장로급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철저한 유대주의자로 바리새 주의의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지긋한 나이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소위 새파랗게 젊은 예수 앞에 꿇어 엎드리어 절을 합니다.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급히 신속하게 가서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단회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23절)" 주님 앞에 지속적으로 매어 달리고 있었던 간절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체면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간구가 필요함을 봅니다. 하나님은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깔끔하고 청구서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너무 자기 기도를 의로 삼아서 문제였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기도의 분량을 드리지 않는다는 문제를 봅니다. 지금 어쩌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기도의 분량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12년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나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야이로를 따라 나섰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시며 나에게 능력이 나갔는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24절에서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하는 것을 볼 때 옷에 손을 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황당한 질문을 던지자 제자들까지 황당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한 여인이 나왔습니다. 바로 혈루증을 앓다가 회복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25, 26절에서 전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여기에서 우리는 그녀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보조어들이 5번에 걸쳐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많은, 다, 아무, 도리어 더"라는 수식어를 통해 그녀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모든 재산을 탕진했고 그리고 아무 효험도 없이 더 깊어만가는 그녀의 질병은 인생의 비극이었습니다.
12년간 하혈을 하며 살아온 여인의 인생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짐작컨대 그녀의 지금 나이는 20대 중반이라고 파악됩니다. 한 주석은 이 여인의 이름이 당대에 유명했던 20대 중반의 베로니카라는 여인이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여자아이들의 사춘기를 생각해 볼 때, 그녀의 하혈은 12세 13세부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때 나이가 되면 약혼을 하고 적당한 혼기가 되면 결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날부터 시작된 하혈로 인해 모든 인생의 시도를 포기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냥 병걸린 여자쯤으로 이 여인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육체의 가시정도로 보아서 안됩니다. 여인으로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곧 여인으로서 사형선고와 같은 병이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야구 투수에게 손가락 하나 부러진 것을 작은 골절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있어서 혈루증은 여인으로서 사형선고와 같았습니다. 수많은 친구들이 혼인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열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눈물조차 말라 버렸을 이 여인의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흐르는 피로 인해 외부출입도 자제해야 했을 그래서 방 구석에 홀로 앉아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고 허무 가운데 살아갈 이 여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12년간 더 중하여만 가는 병을 안고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녀는 수십번은 더했는지 모릅니다. 많은 의사들에게 자기 병을 보여야 했으니 어린 소녀가 겪어야 했던 수치와 부끄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이 여인은 무모한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구석에 쳐박혀서 눈물조차 말랐던 이 여인이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마음으로 다짐하고 소망을 안고 나아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치는 틈 속에서 내가 주님을 붙들리라는 심정으로 몸부림치는 한 여인을 생각해봅니다. "내가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이 분만이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 이 오랜 고통을 풀어주실 분이다." 흐르는 피만큼이나 피눈물을 쏟으며 살아온 그녀의 인생입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버티고 있는 그 현장을 파고 들어가는 그녀의 힘겨운 몸짓을 생각해 볼 때, 사람들에게 떠밀려 뒤로 넘어지기도 하며 그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파고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하소서. 주의 길로 인도하사 자유케하소서. 새 일을 행하사 부흥케하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주소서"

예수님이 왜 길을 멈추어서 이 여인을 찾았을까요? 그녀의 영혼의 자유를 배려하고 계셨습니다. 죽음과 같았던 자신의 지난날의 인생에 대해 주님은 영혼의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을 격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12년 묵은 혈루증이 있습니다. 남들에게 보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묻어두고 참고 견뎌야 하는 인생의 눈물이 있습니다. 지난 12년간 멈추지 않는 피눈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랜 질병과 고통으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 그 속에서 더 이상의 소망을 상실해버린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납덩어리 같이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할 것 같은 그 모든 것을 주님을 붙들며 위로를 받기를 원합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속이 타는 회당장 야이로 - 다른 시간대를 가진 주님

지금까지 혈루증 여인의 입장에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한번 살펴봅시다. 회당장 야이로는 지금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겨우 찾아서 모시고 가는 도중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찮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길을 가다가 영문도 모를 한 여자를 붙잡고 은혜를 받았느니 이야기하시면서 지체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나의 기대구조와는 전혀 다른 주님의 태도를 봅니다. 속이 타고 불이 올라오는 마음으로 회당장 야이로는 참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이제 내 딸도 살았구나"하는 확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을 봅니다. 하지만 지체하고 시간을 늘이는 주님을 보면서 마음이 답답했을 것을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위기 좋다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상황입니다. 야이로의 표정연기를 상상해 봅니다. 어쩌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 여자는 지난 12년간 앓았다고 해도 당장 죽을병이 아니지 않은가? 내 딸은 죽어가고 있는데, 그리고 좀 나중에 만나면 안 되는가?"

예수님은 여전히 아직 말씀하고 계시고 야이로의 머릿속은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때 비보가 도착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절망적인 순간이 왔습니다. 모든 것이 끝이구나. 그런 생각을 할 만할 때 주님은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며 야이로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시간은 다릅니다. 내가 역사하셨으면 하는 시간대와 주님이 역사하시는 시간대에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주님이 역사하셨으면 생각이 되지만, 우리를 향한 생각과 계획이 많으신 하나님은 더 크고 좋은 계획을 생각하십니다.


다른 관점을 가진 주님 -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이번에는 사람들의 기대구조와 다른 발언을 다시 하십니다. 죽었다고 하는데 주님은 잔다고 하는 또 썰렁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을 비웃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헛웃음과 기가 막힌다는 느낌이 충분히 들만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고 생명을 새롭게 허락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시각 차이를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끝났다고 여기는 것과 주님이 생각하기에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시40: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님이 마침표를 찍기 전에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찍지 않으신 마침표를 왜 우리가 찍는 것입니까? 종교개혁이 깊어가고 고통스러운 싸움이 계속되자 루터가 지치고 실망하여 낙담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아내가 갑자기 집안에 상복을 꺼내 입었다고 합니다. 놀란 루터가 "누가 죽었느냐?"고 묻자 "당신의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 같아서 상복을 입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주님이 죽으신 것처럼 모든 것에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나와 다른 시간 개념과 다른 시각을 가진 것을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시간대에 다른 시각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내가 보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문제를 주님이 보고 계신다고 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해결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개인간증

하나님은 저에게 있어서도 혈루증을 해결해주신 분이셨지만, 나와 다른 시간과 관점의 일을 풀어오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주일로 제가 울산교회를 사임하게 됩니다.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후원교회인 향상교회에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 일과 관련되어서 오늘 말씀이 저에게도 간증이 됩니다.


결론

지속적인 고통과 눈물, 그리고 급박하게 닥치는 고통과 아픔이 우리 인생에 있습니다. 그 아픈 인생으로 인해 우리는 절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 가운데 서야 합니다. 내가 붙들거나 야이로와 같이 중보자로 서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발결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뜻을 구하며 기다리는 것에 능력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등불 칼빈은 말합니다. "사단은 성도를 평지에서 밀어뜨리지 않는다. 사단은 성도를 절벽에서 밀어뜨린다. 땅바닥에 부딪히는 순간에도 성도는 주님의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벼랑 끝을 우리가 비록 산책하게 된다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을 때 주님은 능력을 베푸십니다. 아멘.

- 송병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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