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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 사 1:16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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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  이사야 1:16 ~ 20
설 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계시록 3:15 ~16, 20 ~ 22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3:22 ~ 2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가르치시면서 각 성읍과 마을을 지나가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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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요한계시록 본문에는 ‘라오디게아’라는 교회에 사도 요한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가 지금은 터키에 있습니다. 지난 번 우리 교회에서 성지순례 다녀오신 분들은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를 순방하셨을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라오디게아입니다. 라오디게아 도시에 교회가 있었고 이 교회에 요한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으니 내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이천 년 전 요한이 편지를 쓸 당시에, 물이 모자라서 다른 지방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한 1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골로새’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에서 찬물을 공급받았습니다. 동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히에라볼라’라는 곳에서는 온천수가 나왔는데, 라오디게아는 그 뜨거운 온천수도 공급받았습니다. 이렇게 찬물 따뜻한 물을 공급받아서 라오디게아 도시는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즘처럼 온수 냉수를 별도로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양쪽 물을 적당히 섞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뜨거운 물도 아니고 찬물도 아닌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찬물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유럽지역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만, 물 속에 석회 성분이 들어 있어서 그냥 마실 수가 없습니다. 수돗물을 한참 사용하다 보면, 수도꼭지에 하얀 때가 앉습니다. 석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뿐 아니라 철분도 많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는 이렇게 석회가 많고 철분이 많은 찬물과 뜨거운 온천수를 적당히 섞어 미지근한 물을 먹었는데, 물이 미지근해서도 그렇지만, 물맛이 이상해서 구역질이 나서 물을 뱉곤 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당시 터키 지역에서는 상당히 부유한 지역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우선 이 동네는 눈병이 많았는지, 안약 산지로서 안약 수출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옷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고, 옷 만드는 공장들이 많아서 옷과 옷감을 널리 팔아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 도시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요한이 하는 말입니다. 그대들은 왜 그렇게 가난합니까? 아니 물질적 풍요를 이렇게 누리고 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풍요 속에서의 빈곤! 빈곤과 풍요가 적당히 섞여서 구역질이 납니다. 물질이 많아서 풍요한 것 같지만, 그대들의 정신은 완전히 썩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합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하나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서는 안 됩니다. 물적 풍요만큼 영적 풍요를 함께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두 번째 한 이야기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소경입니다. 눈병을 고치는 안약을 만든다고 하는 여러분이 소경입니다. 눈은 떴으나 우리의 현실도 배고픔도 아픔도 슬픔도 아무것도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 뜬 소경입니다. 안약을 왜 다른 곳에 팝니까? 여러분들이 사용해야 합니다. 그대들은 엄청나게 많은 옷과 옷감을 파는데, 내가 본 당신들은 전부 벌거벗었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습니다. 흉합니다.

옷이 많으나 벌거벗은 모습, 안약은 많으나 소경이 된 모습, 굉장한 부자지만 정신적인 공허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 이들을 향해서 오늘 요한이 선포합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은 여러분의 정신적 빈곤을 해결해 주는 청량제가 될 겁니다. 눈 뜬 소경을 치료하는 치료제가 될 겁니다. 벌거벗은 자를 감싸는 옷이 되어 줄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영적으로도 충만하게 되어, 영육이 어우러진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게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요한의 서신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요한이 주님의 말씀을 다시 전합니다. “너희의 신앙이 이렇게 미지근하니, 내가 너희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 그 문을 어찌 열겠느냐? 너희의 정신적 빈곤 때문에 내가 아무리 두들겨도 너희는 문을 열지 않는구나.” 똑같은 말씀을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누가복음서에서 보면 우리더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래야 생명에 이르게 되는데, 하늘나라에 이르게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넓은 문으로만 가려고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좁은 문이란 영적인 풍요와 물적 풍요가 함께 있어서 온전한 찬송이 울려 퍼지는 곳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경동교회에 속한 여러분을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경동교회는 거의 대부분이 좁은 문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앉으신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사회적 지위로나, 능력으로나, 어느 모로 보더라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엄청난 복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쉽게 이 자리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뭐냐? 수많은 경쟁을 뚫고 왔다는 말입니다. 편안한 넓은 문이 아니라, 고생하고 노력해야 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능시험 봐야지요. 겨우 좁은 문 통과해서 들어가면 학기말시험 봐야지요. 졸업했다고 한 시름 놓으면, 금방 취직시험 봐야지요. 직장에 가서는 또 승진시험 봐야지요. 죽을 때까지 시험입니다. 갈수록 좁은 문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렇고 여러분 자식들도 그렇고, 전부 좁은 문을 향해서 갑니다. 그게 어려운 길인 줄 알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갑니다.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계속 문은 좁아집니다. 그러나 그 문으로 가야 소위 말해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자리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풍요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좋기 때문에, 가야할 길이니까 우리는 그 길을 갑니다. 좁은 문에 담긴 아픔, 고통, 모르는 거 아닙니다. 그걸 다 극복하고 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은 간단합니다. 좁은 문으로 갈 사람은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이 보장되겠지만, 그 문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남들 자는 것만큼 다 자도 안 됩니다. 잠자는 것 줄여야 합니다. 환락도 줄이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는 시간을 줄이고, 기도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도 집중해야 합니다. 이 좁은 문이 들어가기 어려운 문 같으나, 경동 같은 곳에서는 다들 자연스럽게 가는 문입니다. 사실 아닙니까? 좁은 문을 통과해서 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차고 더운 것이 뭔지 압니다. 미지근한 상태로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해야 합니다.

저는 평소에 한국 날씨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있고 따스한 봄이 있고 더운 여름도 있고 서늘한 가을도 있고.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겨울철과 여름철은 늘어나고, 가을과 봄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랑하고 싶어 했던 봄과 가을은 자꾸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성서 말씀대로 차든지 뜨겁든지 해서, 겨울과 여름만 있고 중간은 없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사태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봄철이 아름다운 것은 봄이 따스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춥고 차가운 겨울철이 지나 봄이 되면, 반드시 움츠렸던 생명들이 새잎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새로운 생명의 봄을 만듭니다. 그렇게 봄에 맺은 꽃망울은 더운 여름을 지나면서 열매가 되고, 가을철이 되면 아름답고 탐스러운 과일과 곡식이 되어 나날이 익어갑니다. 꽃이 화사하게 피고 아름다운 열매를 알알이 맺게 하는 봄과 가을이 가능한 것은 여름과 겨울이 있기 때문입니다. 꽃과 열매가 피고 맺히는 중간 역할을 차가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 해냅니다. 봄과 가을, 꽃과 열매는 열매가 차가움과 뜨거움 위에서 가능합니다. 그걸 보지 못하면 눈 뜬 장님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추운 것만 알았지, 추운 겨울 다음에 오는 따스한 봄의 화사한 꽃망울을 알지 못했습니다. 덥고 지루한 여름만 알았지, 그 다음에 올 가을 추수의 기쁨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눈뜬 소경, 옷 입은 벌거숭이, 가난한 부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마 이 진리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 진리를 아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갑니다. 그 문으로 들어오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일단 들어오면 생명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있은 이야기 두 가지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한 가지는, 어느 나치 군인, 졸병으로 근무하다가 제대한 군인이 쓴 일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병사는 전쟁 중에 총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야전병원에는 입구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경상자, 또 하나는 중상자가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경상을 입었으므로 경상자용 문을 통과해서 복도를 지나갔습니다. 복도를 지나자 거기에도 문이 두 개가 있는데, 장교용, 사병용 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병이었기에 사병용 문을 통과해서 들어갔습니다. 가니 또 문이 두 개 있었습니다. 나치 당원이 들어가는 문, 비당원이 들어가는 문. 그 사람은 당원이 아니어서, 비당원용 문을 열고 딱 들어섰는데, 의사도, 간호사도 없었습니다. 아니 병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추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는 바깥 한데였습니다. 허허벌판, 눈 내리는 벌판이었습니다.

결국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고, 그것을 일기에 남겨 놓았습니다. 그는 나치가 운영하는 야전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있는 병원이 아니라, 차디찬 냉혈동물들과 눈 내리는 벌판, 그리고 당이라 이름하는 비인간적 조직, 그것을 보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들어갔던 병실의 문은 좁았지만, 생명의 문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일기는 계속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의사도 있고 간호사도 있고 영적 의사도 있고 영적 간호사도 있고 풍부한 노래도 있고 기도도 있는 그런 생명의 병원이기를 원한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문이나 다 좋은 문은 아닙니다. 좁아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생명으로 가는 문은 아닐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얘기를 하겠습니다. 같은 시기에,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만 갇힌 게 아니라 독일인들도 갇혀 있었는데, 그들은 비판적인 지식인들, 사상이 좌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잡혀 들어간 사람 중에 유명한 철학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르자예프’라는 이름의 마르크시스트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소위 사상범으로 잡혀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치 병사가 와서 가스실로 보낼 사람들을 골라 기차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정해진 인원수를 채워야 하는데 한 사람이 모자랐다고 합니다. 나치 병사가 가슴에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젊은 엄마를 보았습니다. 병사는 그 엄마를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젖먹이를 떼어놓고 이 엄마를 차에 실어 보내면 이 나치 병사의 임무는 끝납니다. 젖먹이가 떨어졌습니다. 아기가 마구 웁니다. 어머니는 절규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르자예프는 그때 절망적인 인간들의 아비규환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숨이 막히는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한 수녀가 달려왔습니다. 그 포로수용소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한 젊은 여성, 수녀, 이름은 마리아. 마리아 수녀가 그 절규 소리를 듣고 뛰어와서 이 나치 병사한테 말했습니다. “당신은 숫자만 채워서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어머니에게 갓난아이를 돌려주시오. 대신 내가 가겠습니다.” 하면서 나치 병사의 손을 끌다시피 하여 함께 기차 칸 안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수녀의 모습. 이것이 당대에 유명한 철학자, 최고의 지성인, 마르크시스트가 본 장면입니다. 이분이 수용소에서 풀려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학자로서, 전문인으로서, 교회에 가서 설교 듣고서 예수를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를 알려주는 아무리 좋은 책들을 읽어봐도 나한테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 나는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쓴 일기장에 그렇게 결심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죽음으로 가는 기차 칸에 스스로 들어가는 수녀의 뒷모습에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차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 수녀가 남긴 아름다운 마지막 웃음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그를 밀어붙여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한 폭의 그림, 한 폭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문이 비록 좁고 현실적으로는 죽음의 길이지만, 그래도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와 젖을 먹어야 하는 갓난아이를 떼어놓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그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 평생에 쌓은 지식을 다 동원하고 자기 이론을 다 들이대어도 그 일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 일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신앙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 그 길은 분명히 우리의 한과 죄와 잘못과 분노와 좌절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죽은,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당신을 따라 그 길을 가는 사람에게 약속하십니다. 어려운 길이지만, 당신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좁은 길을 가서 골고다언덕에서 죽은 좁은 길의 예수! 그 십자가의 예수는 죽어서 돌무덤 속에 묻혔습니다. 이것이 차가운 겨울입니다. 차가운 겨울을 토요일까지 지낸 예수님에게서는 꽃피는 봄이 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여서 죽음의 관을 열고, 죽음을 이기고,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봄, 부활이라 이름하는 봄날 아침을 여셨습니다. 십자가의 좁은 길, 그 길을 가면 부활의 화사한 꽃을 보게 됩니다.

꽃피는 봄이 되자, 부활의 아침이 되자, 우리에게 주의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여름의 폭염처럼 뜨거운 성령이 퍼부어졌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성령의 은사를 받고 났더니, 이 가을에 우리는 사랑이라, 온유라, 절제라, 소망이라, 믿음이라 이름하는 엄청난 열매를 알알이 맺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뜨거운 여름 낮도, 골고다 언덕길의 차가운 겨울밤도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을 잉태하게 하는 데 필요한 과정입니다.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가을의 알곡을 만들 여름의 뜨거움을 견딜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러면 그 길을 가십시다.

십자가의 길에서 부활을 약속하신 주님의 명령,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꼭 따르시기 바랍니다.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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