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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를 위하여 / 갈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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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갈라디아 5:13-15
제 목 : 자유를 위하여
설 교 :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처음 배우기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많은 주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이 길로는 가지 마라. 저기도 위험하니 가지 마라. 차도로는 아예 가지를 마라” 등등 많은 주의를 주는 부모님에게 짜증이 난 아이는 묻습니다.

“아버지, 내가 몇 살쯤 되어야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나요?”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단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가고 싶은 곳을 다 가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문화에 얽매여 있고 습관에 묶여 있고, 자신의 욕망과 체면에 묶여 자유롭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생활입니다.

우선 사람은 필연성에 묶여 있습니다. 아침에 식사를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픕니다.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어야 합니다. ‘나는 자유니까 안 먹겠다’ 하면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먹어야 한다는 데 매여 있습니다.

또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니 피곤해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필연성에 붙들려 있습니다. 여기 예외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사람은 불가피성에 묶여 있습니다. 사회적 환경, 습관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많은 줄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언젠가 제가 아는 한 분이 아는 사람 결혼식이 있어서 가봐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시간이 다 되도록 일어나지는 않고 돋보기안경을 낀 채 낡은 수첩만 자꾸 뒤척입니다. “뭘 그렇게 찾습니까?” 물어 보았더니 “작년 우리 딸 결혼식 때 그 댁에서 얼마나 부조했는지 확인하려합니다. 균형을 맞추어야지요.”

이렇게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체면 위신 체통의 보이지 않는 줄에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 한번 툭툭 털고 사는 일이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은 평소에 말하기를 ‘요즈음 결혼식은 너무 호화판이야. 너무 쓸데없는 사치요 낭비가 심해’ 주장하듯이 강조하던 분이 그 집 딸 결혼식을 보니 그야말로 굉장했습니다. “평소 하시던 말씀과는 좀 다릅니다.” 결혼식 마치고 물어보았더니 하시는 말씀이 “막상 나에게 닥치고 보니 남의 얘기 할 때와는 다르더군요.” 큰 소리치던 그 분은 결국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참 자유롭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받았으면 그 만큼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붙들려 있습니다. 직장생활이 피곤해도 사표를 내던질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꺾고 그대로 굽신거립니다. 의무감이 압박합니다. 과거가 우리를 압박하고 미래의 삶이 우리를 압박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유를 찾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의 하나는 인간은 자유를 찾아 살고, 자유를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목요일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찾은지 5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이 자유가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다 자유를 원합니다. 구속이나 속박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자유를 억압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자유, 자유 말하지만, 이 자유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자유입니다. 남의 민족의 지배에서 해방과 자유를 찾은 815 광복절은 이 정치적 자유가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가하면 경제적 자유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면 사람이 부자유합니다. 이 경제적 자유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많은 시간은 바로 이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상의 자유, 감정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등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자유의 종류는 많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 자유들이 정치적 경제적 자유보다 더 중요한 자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부잣집에 살지만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옥 중에 매인 성도는 양심의 자유 얻었네”하는 찬송을 부르면서, 감옥에 있지만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자유인입니까? 우리는 참 자유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 이 시간 한번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간단히 돌이켜 보겠습니다. 구약의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나왔다, 탈출했다 해서 출애굽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해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킴으로 해방을 생각했고, 홍해를 건넘으로 노예 생활이 끝이 났다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이면 해방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제는 자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기에 정치적 자유는 누렸지만, 광야에 나와보니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칩니다. 경제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무엇을 먹어야 하나 염려하게 됩니다. 즉 경제적 노예가 됩니다.

나아가서 사회적인, 문화적인, 습관적인, 종교적인 노예로서 옛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건넘으로 이제는 자유가 완성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생각이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출애굽은 완성됩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문제는 있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과거의 습관, 종교,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누릴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이란 긴 훈련의 코스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정치적, 경제적 자유 뿐 아니라, 문화적, 종교적인 출애굽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옛날 생각을 하면서 애굽 생활을 그리워 했습니다. 고기가마 옆에서 고기를 훔쳐먹는 노예 생활이었지만, 그래서 그 생활이 등따습고 배부르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철저하게 노예로 길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몸은 출애굽했지만, 정신적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야, 내 발에서 신을 벗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신발을 벗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생활에 익숙한 신발을 벗는데는 40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자유의 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로 자유의 의미를 말해 주셨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잘 믿는 좋은 사람이라도 가끔 화를 버럭 낼 때가 있습니다. 남이 이해하기 어려운 나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이 사람이 왜 이런가 고개를 갸우뚱 합니다. 그러나 놀랄 것 없습니다.

과거의 내가 나온 것입니다. 나의 옛모습, 아직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직 이겨내지 못한 나의 옛 사람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종이 뒤집듯이 과거의 내가 새로운 나로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날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데는 많은 훈련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출애급이며 천국 시민이 되려고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이런 자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첫째, 자유를 얻는 사람은 그 자유를 옳게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유를 남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악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면 자유를 선용할 책임이 또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자유는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칼과 비슷합니다. 칼은 매우 필요합니다. 바로 쓰면 얼마나 유익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칼을 잘못 쓰면 내 손을 상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은 아직도 자유를 바로 쓸만한 능력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신병자들에게 온전한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정신병자는 자유를 사용할 자격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자유로 하여금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자유를 마음대로 하는 기회로 삼지 말고, 내 소욕대로 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 주신 법 안에서 사용될 때 온전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자유에는 성장과 발전의 책임이 따릅니다.
왜 우리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을까요? 왜 우리 인간이 반드시 자유를 가져야 할까요?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자유가 있어야 인간으로서 장성할 수가 있고 발전할 수가 있는 까닭니다.

독수리를 조롱 속에 가두어 기르면 독수리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호랑이를 어렸을 적부터 우리 속에 가두어 기르면 호랑이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을 구속한 가운데 두면 인간 내재의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의 학정 아래에서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인이 되어야 선민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자유를 얻은 이는 이 자유를 통해 자신 뿐 아니라 우리 교회와 민족 공동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데 한 몫을 담당할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고 이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자유에는 봉사의 책임이 따릅니다
성경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곧 자유를 가지고 봉사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오직 내 자신, 내 자신의 편리와 이익과 향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다른 사람과 세상에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유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쓸 때에 결국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은 봉사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피차에 서로 자유를 가지고 봉사해서 종노릇하는 가운데 인류 사회는 아름답게 꽃피워 나갈 것입니다.

넷째로 자유는 수호되어야 합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언제나 자유 수호의 책임이 있습니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신령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에서 해방시켰으니,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정욕의 종이 되지 말고, 돈의 종이 되지 말고, 권력의 종, 명예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이 말씀은 다른 방면의 자유에도 꼭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자유, 경제적인 자유, 이념의 자유, 도덕과 생존에의 자유를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셨으니, 우리는 이 자유를 수호하고 지켜 나가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시한번 자유에로의 길을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찾아보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13절의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십니다.
 
서로 증오할 때는 이미 자유인이 아닙니다. 사랑할 때에만 자유인이 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을 미워할 자유, 죄를 지을 자유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의와 진리를 따라갈 자유 외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고, 그 이후 자기에게는 조그만 자유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직 자기를 사랑의 포로로 부르신 분을 위해 일생을 살았습니다. 주 안에서 포로된 자로서 자유가 없다는 그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인간을 ‘내가 누구냐’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속하여 있느냐, 내가 누구를, 무엇을 위해 사느냐’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과연 우리 성도님들은 누구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내 삶의 열정을 쏟아 붓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문제에 내 생의 의미가 있고 내 자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가장 위대한 자유인이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가장 충성된 노예이다. 세상에서 사랑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노예,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유의 생애요, 그리스도의 영은 사랑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에로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들이 모두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저희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이 시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된 것을 확신하며 나에게 주신 이 자유를 주님께 온전히 부탁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하시고, 주님을 위해 삶으로 이 고귀한 자유를 지켜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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