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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변화 / 왕상 19: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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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아름다운 변화
본 문 : 열왕기상 19:7-14
설 교 :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새해 첫 달을 보내면서 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한 달 동안 내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았음에도 변화가 없다면 그건 여전히 새로워지지 못하고 새해 첫 달을 산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겁니다.
생이라고 하는 건 변화의 연속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변화하고 반드시 변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화가 어떤 변화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변화일까 추한 변화일까... 긍정적 변화일까 부정적 변화일까...' 인생은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화를 체험하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보니 또 한 마디를 긋는 한 달의 끝자리에서 그런 물음을 새삼 마음에 품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변화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본디 죄의 중력에 당겨져 살아가는 존재이다 보니 부정적이고 추한 변화는 쉽지만 그 중력을 거슬러야 하는 바람직한 변화, 아름다운 변화는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감한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으로의 변화는 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바 악으로서의 변화만을 행한다'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이 새해 첫 달에 아름다운 변화를 가능하게 하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훼방을 놓아 아름다운 변화를 갖지 못한 것일까요? 그건 바로 밖의 문제라기 보다 안의 문제 곧 자아의 문제일 것이었을 겁니다. 달리 말하면 아집, 나의 주관이, 생각이 나의 아름다운 변화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4:22절 이하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옛사람에서 새사람에로의 변화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될 때만이 가능한 역사라고 그는 말합니다. 심령이 새로워지는 자만이 아름다운 변화를 맛보며 살게되지 그렇지 아니하고 옛사람을 벗지 못하면 여전히 구습을 좇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바뀌지 아니하면 새로움이란 없습니다. 여기 옛사람이란 아집입니다. 아집은 자기 자신에 갇히는 겁니다. 자신을 벗지 못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겁니다. 그 아집이 아름다운 변화를 막는 겁니다.
사실 신앙과 아집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사울이 바울되기 전 그는 아집을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된 후 그는 자기가 둘도 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 아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거'라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바로 자기 아집을 벗어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는 실로 아름다운 생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간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왕 시절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은 예언자로서 갈멜산에서 850:1의 대결에서 승리한 영웅입니다. 혈혈단신 홀몸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과의 대결에서 이긴 그의 무용담은 참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전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져 옵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야의 모습에 익숙한 우리들이 오늘 본문 속의 엘리야를 대하노라면 마치 딴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됩니다. 갈멜산정에서 호기있게 외치던 그 엘리야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통해 갈멜산정의 사건을 들은 이세벨은 사자를 보내 엘리야에게 그 보복으로 죽음을 선언합니다. 상황이 이리 돌아가자 엘리야는 목숨을 위하여 도망을 칩니다. 3절은 이런 정황을 "엘리야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쳤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황급히 국경을 넘어 유다땅 브엘세바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사환을 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여 한 로뎀나무 아래 자리를 잡습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아룁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그리고는 로뎀 나무 아래 벌렁 누워버립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요? 엘리야의 이러한 행동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지금 엘리야의 마음은 온통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게 뭔가... 이게 하나님을 위해 몸바쳐 생명 바쳐 일한 내게 돌아온 대가란 말인가? 하나님이 정녕 나를 버리시는 건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그의 삶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사명은 고사하고 삶의 의욕조차 잃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히 하나님 앞에 '자기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자기를 그만 데려가 달라'고 떼를 씁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을 보노라면 웬지 입가에 웃음이 돌게 됩니다. 위대한 예언자의 이처럼 가련한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입니까?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엘리야를 가리켜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성질과 감정이 같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언자의 모습에서 많은 위안을 받습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굴곡이 심한 삶을 삽니까? 그리고 얼마나 자신에게 자주 실망합니까? 그리고 또 하나님을 향해 섭섭해 할 때가 얼마입니까?...
그러나 이게 인간임을 엘리야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언제나 영웅적일 수 없고, 언제나 승리감에 도취될 수 없고, 언제나 좋은 콘디션일 수 없는 겁니다. 엘리야는 지금 비관적입니다. 낙심해 있습니다. 저기압입니다. 소심해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 신앙의 깊은 늪에 빠져 있습니다.

엘리야가 왜 이러는 걸까요? '하나님, 저 할만큼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절 데려가 주십시오. 저요? 제 선조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잡한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분노를 바깥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학합니다. '난 선조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그러나 이게 그의 진실이겠습니까? 엘리야의 본마음은 무엇일까요?
사실은, 사실은 엘리야가 화가 난 상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섭섭한 겁니다. 어떻게 자기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습니까? '이제 나를 데려가 달라'는 건 '더 이상 당신을 위해 일 못하겠다' 이 소리 아닙니까? 엘리야는 하나님께 삐친 겁니다. 여기엔 특효가 없습니다. 기도도 소용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이해시킬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엘리야의 상태였습니다.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 낙심한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은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이 자포자기해버린 당신의 종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십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흔들어 깨우시고는 그를 어루만지십니다. '엘리야야, 엘리야... 어서 일어나서 먹으라...'
천사를 통해 엘리야의 만나시는 하나님의 방문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걱정 마, 이제 모든 것이 다 좋아질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답지 않게 이게 무슨 짓이니? 정신차려 이 친구야, 너 어른 아니니?' 그렇게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천사는 그냥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그 곁에 가져다 놓고는 다른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를 책망하지도 않고 그를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가 힘을 아주 잃지 않도록 먹을 것을 그에게 건네며 그것을 먹고 저가 굳건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서는 다시 드러 눕습니다. 아직 그의 마음이 풀리지 않은 겁니다. 그러자 천사는 어떻게 합니까? 저가 오랫동안 잠자도록 그대로 놔둔 후 또 다시 와서 저를 어루만집니다. 이 '어루만진다'는 표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이 단어를 '천사가 저의 영혼을 맛사지해 준다'고 읽고 싶습니다. 그 영혼이 풀리도록 그 영혼을 맛사지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맛사지를 받아 보셨습니까? 얼굴 맛사지 말고, 몸 맛사지 말고 영혼의 맛사지 받아 보셨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내 영혼의 뭉친 곳을 주물러 주셔서 영혼의 시원함을 주시는 체험을 하셨습니까? 성령님께서 내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그런 경험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엘리야를 그렇게 치유하고 계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와 그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해 하지 않으십니다. 굳이 저를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나무라지도 않으십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 내면이 스스로 정리되기를 기다리십니다. 단지 그가 힘을 아예 잃지 않도록 먹을 것을 공급하면서, 그의 영혼을 맛사지하면서... 그렇게 몇 번이고 소심한 생각들을 이겨낼 힘을 모으게 하시고 어두운 생각들을 떨치고 다시 사명을 회복할 때를 기다리시는 겁니다.

이제 엘리야는 천사가 공급한 그 음식의 힘을 의지해서 호렙산을 향해 갑니다. 8절에 보면 '40일을 밤낮으로 걸었다'고 했습니다. 도보여행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여행, 특히 걷는 것은 심령의 병을 치유하는데 상당히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마음에 갈등과 상함과 번민이 있을 때 한번 걸어보십시오. 여행을 떠나 보십시오. 그러면 그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뭔가 답답함을 느낀다면 그때는 한번 훌쩍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여행을 다녀오십시오. 바로 거기에 가장 훌륭한 진단과 처방이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걷습니다. 40일을 밤낮으로 걷습니다. 이 걸음걸이와 여행이 중요합니다. 저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를 주저앉게 했던 소심한 생각들, 아집의 부스러기들은 점점 그의 영혼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 도보 여행을 통해 어느 정도의 회복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완치가 된 건 아닙니다. 엘리야의 심령에 생긴 그 병은 권면으로도 안되고, 설교로도 안되고, 책망으로도 안되고, 달래서도 안되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안되었습니다. 방법은 오로지 하나, 깨닫고 자기 아집을 깨뜨리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40일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왜 하필 호렙산일까요? 호렙은 엘리야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원천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바로 그 시작의 자리를 엘리야는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동굴에 들어가 거기 머무릅니다.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생각들이 깨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드냐?...' 우리는 여기서 이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엘리야의 대답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대답 속에 엘리야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절과 14절을 보면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이 특별했었습니다. 하나님 잘 아시지요?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노라니 가슴에서 열불이 났었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제단을 헐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예언자들을 모두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런 저마저 죽이려 듭니다...'
이 엘리야의 넋두리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그의 병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엘리야의 이 말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겁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제가 누굽니까? 하나님을 위해 목숨걸고 일한 당신의 충성된 종 아닙니까? 수많은 종들이 있었지만 이제 다 죽고 저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저까지 죽게 하실 겁니까? 하나 남은 참 종인 저를 죽게 하시면 당신은 저 아합과 이세벨에게 지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저를 이렇게 대우하시는 겁니까?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느냐 말입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그렇게 사명을 저버리고 드러눕게 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과 아쉬움이 가득 했습니다.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이 엘리야의 말을 분석해 보면 그는 그 동안의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께 상당히 분노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각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 할 만큼 했습니다. 그러니 어서 데려가 주십시오. 저 더 이상 당신을 위해 수고 못합니다...' 이렇게 투정을 부렸던 겁니다.

자,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에게 어두컴컴한 그 동굴에서 나와 당신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일어나 이 동굴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내 앞에 서서 내가 네게 보이고 들려주는 것을 보고 들으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엘리야를 치유하시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집의 동굴로부터 밖으로 빠져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뜻을 바로 알게 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엘리야에게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실존을 세 가지 징표를 통해 드러내 보이십니다. 첫째는 '요란하고 강한 바람'이었습니다. 둘째는 '지축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지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바로 갈멜산에 엘리야가 체험했던 '장엄한 불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요란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 당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아주 조용하고 여린 소리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엘리야야, 내가 여기 있었노라. 내가 이렇게 너와 함께 하노라... 나는 네가 찾는 방식으로, 너의 원하는 방식으로, 너의 신앙 스타일로가 아닌 이런 모습으로 너와 함께 하느니라. 그러니 이제 네 생각과 네 길을 돌이켜 다시 사명의 길을 걸어가라. 너는 아직 해야할 일이 많으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18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엘리야에게 더하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너 혼자만 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자를 7000이나 남겨두었노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리얼하게 표현하면 이런 말입니다. '네가 마지막 남은 하나밖에 없는 나의 종이라고? 아니란다. 너 말고도 신실한 나의 종이 7000이나 이 땅에 있단다. 네 눈엔 너 외엔 다 타락하고 언약을 저버린 자처럼 보이니? 아니란다. 아직도 신실한 나의 종들이 7000이나 남아 있단다...' 여기 7000이란 숫자는 단순히 7000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완전수인 7에다 10의 3승을 곱한 숫자로서 수없이 많다는 겁니다. 너만 내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 생각만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를 위해 진정 수고하는 종들이 너말고도 부지기수로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어떻게 생각한 겁니까? 자기만 하나님의 종이고, 자기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기만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너무 특권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엘리야가 새로워질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바람직한 변화를 갖질 못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이 바로 컴컴한 동굴 속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만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헤아리고 실천하는 종이라고는 자기 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를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지 않고 이방계집 앞에 쫓김을 당하는 신세가 되게 했으니 화가 났던 겁니다. 특별 대우를 받아야할 자기를 하나님이 어찌 이렇게 대우하시는지, 그래서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달 동안 내게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은 자기자신을 벗질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감옥에 갇혀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변화는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번쯤 이렇게 심각할 정도로 부정적 체험을 한 자들이 더 충성되고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갈등과 상함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향한 돈독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마를 보십시오. '난 못믿겠어...' 그런 그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최고의 신앙고백을 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난 저를 모르오. 맹세컨대 저 자를 모른단 말이요...'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또 한번의 재회를 통해 주님의 수제자가 됩니다. 하박국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당신이 살아계신 겁니까? 허수아비 아닙니까? 이 땅을 다스리기는 다스리시는 겁니까?' 그런 하박국이 '비록 내가 거지가 된다 해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살겠다'고 선언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었던 동방의 의인 욥은 어떻습니까? '이스마엘이나 잘 키워달라'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갈등과 번민은 대나무의 마디 같은 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의 신앙이 또 한 단계 성숙하고 도약하는 것입니다. 그런 갈등과 고민 속에서 방황하다가 또 한번 자기를 벗고 진정한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마치 누에가 허물을 벗어 번데기가 되고 다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때로의 상함과 갈등이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켜 더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인 것입니다. 자기를 버릴 때, 자기를 비울 때,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새롭게 할 때 그런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나갑니다. 정말 중요한 한 달이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리에게 이런 아름다운 변화가 없었다면 이제 2월에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게 있습니까? 목사에게 서운한 게 있습니까? 교우들에게 서운한 게 있습니까? 신앙 공동체에 서운한 게 있습니까? 그렇다고 그렇게 적적한 광야에 홀로 들어가 벌렁 드러누워버리는 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도, 기뻐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이제 일어나십시다. 추스리십시다. 우리 앞에 사명이 있는데 언제까지 로뎀나무 아래서 잠자고 캄캄한 동굴 속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이제 일어나십시다. 일어나서 아름답게 변화하십시다. 나비가 되어 훨훨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날아가십시다.
엘리야는 이제 이 새로운 신앙 체험을 통해서 다시금 사명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성실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엘리사에게 사명을 물려주고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회리바람 속에 승천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의 일생입니까? 만약 광야에서 그의 생이 마쳐졌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생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의 생이 엘리야의 생 같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여정의 끝이 하늘에 닿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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