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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명한 은혜(표적) /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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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유명한 은혜(표적)
본 문 : 행 4: 13-22
설 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2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유명한 은혜(표적)"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은혜도 유명한 것이 따로 있는가?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명한'것은 그대로 제목으로 하고 '표적'은 '은혜'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유명하다'라고 하는 낱말은 '그노스톤'이라고 합니다. '그노스톤'이라는 말은 '잘 알려진' 혹은 '자세히 알려진' 또는 '널리 알려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잘 알려진 은혜, 널리 알려진 은혜, 자세히 알려진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 성경에서는 '유명한'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는데 받은 자 밖에 모르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알려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를 많은 사람들이 목도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널리 알려지고 잘 알려지고 자세히 알려진 은혜도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은혜는 그런 의미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성경이 말하는 유명한 은혜는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부인 못할 은혜 (13-16)
 
  베다니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5리 즉 2k정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자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라는 말을 별로 쓰지 않으셨는데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셨는가 하면 나사로를 향해서는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내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나사로의 가정과 접촉을 자주 하셨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 자신이 보실 일을 보신 다음에 베다니에 가셨을 때 나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르다가 "내 오라비가 죽은지 이미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 한마디로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잠자던 사람이 깨어 일어나 나오듯이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우리의 무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들의 무덤은 땅을 파고 시신을 묻고 봉분을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을 파고 들어가서 그 곳에 시신을 안치하고 굴 입구를 돌로 막아 두기에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 까닭에 그의 동생들을 위문하러 왔습니다. 분명히 나사로가 죽었고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나는 장면도 친히 겪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 한마디로 살려주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았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후 나사로를 보는 사람마다 전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살린 사람을 어떻게 죽이겠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므로 증거를 인멸 해 버리고 많은 백성들의 눈과 입을 막아 버리기 위해서 그런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백성들의 눈이 가리워지겠습니까? 입이 막아지겠습니까? 나사로와 그의 동생들 즉 그의 가정은 누구도 부인 못할 은혜를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은혜요, 예루살렘에 전부 알려진 은혜였고, 널리 알려진 은혜였고, 자세히 알려진 은혜였습니다. 나만 아는 은혜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받은 은혜를 알고 나를 보는 자마다 예수를 믿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유명한 은혜요, 그 중에 부인 못할 은혜 즉 '아니요'라고 할 사람이 없는 확실한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에서 16절 상반절을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고 하였으므로 부인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사도행전 3장 1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즉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 곧 지체 장애인으로 남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한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번쩍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즉 이 사람이 거지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앉은뱅이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아 저렇게 펄펄 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장은 대제사장이 되고 의원은 72명이 아닙니까? 너무 기독교가 부흥이 되고 베드로의 전도가 성공적이기 까닭에 베드로를 잡아죽이기 위해서 붙들어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전부 아는 사실로 자신들도 부인을 하지 못하겠다 하여 할 수 없이 베드로와 요한을 놓아주었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만이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반대하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까지라도 이 은혜는 누구도 부인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은혜입니까?
  여러분들도 남 모르는 은혜 즉 말씀을 듣다 보니 그 말씀이 너무 재미있어서 말씀의 은혜 받는 것은 나만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모저모로 여러분들이 능력과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고 나뿐 아니라 남이 아는 은혜도 있습니다. 남이 알고 나를 보는 사람마다 '나도 저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믿겠다'라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부인 못할 은혜가 여러분들의 은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엄학섭 목사님은 함경도 사람으로 '은총의 회고'라고 하는 작은 책을 펴낸 일이 있습니다. 엄목사님께서 함경도 어느 시골의 조그만한 교회를 여러해 동안 시무하고 있다가 이제는 나도 교회를 옮겨 봤으면 좋겠다 하고 있는데 조금 큰 교회에서 오라고 청빙을 하였습니다. 그 교회를 사면하고 옮겨가기 위해서 이사가기 전날 밤에 송별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교회가 작아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저마다 음식을 차려와서 그것을 나누어 먹으면서 송별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엄목사님의 생각에는 반드시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권찰님 한 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신경이 쓰이지 않겠습니까? 그 권찰님은 시할머니가 과부요, 시어머니가 과부요, 자신도 과부였습니다. 세 과부가 자녀 일곱 명과 함께 살았습니다. 모두 합하여 열 식구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땅 한 평을 주고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큰 냇가에 조그만한 돌산을 남겨 두고 갔습니다. 그 돌산은 그냥 가지라고 해도 가지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권찰님은 남의 집 바느질, 김매는 품팔이, 빨래하는 품팔이 아니면 살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도 밥은 고사하고 하루 세끼 죽이라도 굶지 않으면 다행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그 권찰님이 무엇인가를 싸 들고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사가시는 오늘 아침에 반드시 이것으로 쌀밥을 해서 잡수시고 가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권찰님 가정은 쌀밥을 구경도 못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일이 이상해서 이사가는 것을 하루 연기하고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볼 수가 없는지라 그 쌀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날밤 권찰님이 머리를 자른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머리를 기르지 않지만 그 당시는 머리를 전부 기르고 그것을 잘라 팔면 얼마의 돈을 받을 때입니다. 그렇게 머리를 자르고 쌀을 두되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권찰님이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예배하는 주일 낮, 저녁, 수요일은 말할 볼 것도 없고 새벽 기도회까지 빠짐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를 할 때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 큰 냇가에 있는 돌산이 옥토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안타깝게 발성기도를 하였습니다. 교인들은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진짜로 믿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교인들과 함께 손가락질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사님도 "하나님 홀로된 저 가난한 권찰님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저 돌산이 옥토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이사를 갔습니다.

  몇 해가 지난 다음에 그 권찰님이 몇 십리 되는 길을 달려왔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권찰님 웬 일이십니까?" "목사님이 제일 기뻐하실 것 같아서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작년에 홍수가 나고 우리 동네 앞을 흐르는 큰 내의 뚝이 터져서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큰 들판은 아니지만 그 냇가의 들판이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묘하셨습니다" "무엇인데요?" "군청에서는 뚝을 막을 돈이 없는지라 함경도에서 돈을 들여 뚝을 막는데 뚝을 흙으로 쌓고는 떼를 입히려고 하니 떼를 어디에서 많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럴 것 없이 강가에 있는 돌산을 사서 그 돌을 깨다가 돌을 쌓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찾아서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그 돌산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뚝을 쌓고 돌을 입혔습니다. 그 돌산을 팔아서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우리 열식구가 전부 먹고도 남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을 전부 공부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총의 회고라는 책을 보면 그것이 그 지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새벽 기도에 안 나오던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동네 사람들이 전부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사건이요, 그렇게 잘 알려진 은혜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오늘부터 돌산 부둥켜안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고 기도하면 믿는 대로 주시지만 방법은 똑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받는 은혜가 널리 소문이 나서 여러분들을 보고 나도 기도해야 되겠다, 나도 예수 믿어야 하겠다는 부인 못할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변화됨의 은혜 (17-20)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에서 20절을 보면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 열두 명을 부르신 다음에 어느 정도 가르치시고 전국에 보내면서 전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모여 있을 때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전도하다 보니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소문을 낱낱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전도를 하고 돌아온 후에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능력 많은 선지자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라고 하기도 하고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더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정확하게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났습니다. 즉 중생했습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2). 성령을 받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여"하고 부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것은 벌써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거듭 났다는 뜻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베드로가 세월이 지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악당들에게 붙잡혀 갈 때 칼을 빼더니 말고를 향해서 칼부림을 하였고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거듭나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칼부림을 했습니다. 결국 할 짓을 다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말고의 귀만 깎은 것뿐 아니라 말고의 친척이 되는 대제사장의 계집종에게 붙들렸습니다. 계집종이 "너는 예수패라"고 할 때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너의 말씨를 들어보니 갈릴리 사투리요. 예루살렘에 왜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있느냐? 더구나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것을 보니 분명히 너는 예수 패다"라고 달려들었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 위기를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저주하고 겨우 그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내 몰라라 부인하는가 하면 저주까지 했습니다. 더 이상 할 소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또는 거듭났으면서도 할 짓 못할 짓 다 했습니다. 칼부림을 했다면 더 이상 할 짓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할 짓 못할 짓 다 하고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했습니다. 이렇게 나약하던 베드로였습니다. 일꾼 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해 가시면서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에게 권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때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놀면서 혹은 장기를 두면서 기다리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때 제자들은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들은 제자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불같은 성령, 바람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가서 전도를 했더니 기사 이적이 나타나고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삼천명, 오천명, 만명씩 모여들었습니다.
  이 때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을 비롯해서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서 붙잡아다가 목에 칼을 댈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전도를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전도하지 말라"고 강요를 했습니다. 얼마전 계집종한테 끌려 다닐 때 같았으면 별소리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너희들은 전도하지 말라 하고 하나님은 전도하라 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은가? 나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고 담대히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소리하려거든 내 목을 먼저 떼어놓으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 다음부터 그 공회 의원들도 어쩌지를 못하고 놓아주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까? 어디에 가서 훈련을 받고 된 것입니까? 돈을 주고 어디에 가서 배워서 된 것입니까? 은혜를 받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런 놀라운 변화의 역사, 이런 변화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을 내 놓고 충성을 다하는 베드로입니다. 아무리 병고침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고 변화되는 것 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가정도 변화되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같은 변화됨의 은혜 즉 성령 충만에 의한 변화됨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은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영광 돌림의 은혜 (21-22)

  본문으로 돌아가서 21절에서 22절을 보면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요, 성전 미문에서 걸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불쌍한 사람은 나이 40세가 조금 넘었습니다. 40여년 동안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는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으로서 성전을 출입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던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병고침을 받고 저렇게 펄펄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저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훈련을 받고 저렇게 되었느냐? 돈을 가져다 바치고 되었느냐? 예수의 이름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겠다' '저 사람이 받은 은혜라면 나도 받아야 되겠다'고 하여 그 사람을 보는 사람마다 하나님께 전부 영광을 돌렸습니다. 내가 은혜 받고 내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귀하지만 나를 보고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은 더 큰 은혜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영광 받을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칭찬 받을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그 칭찬이 돌아오고 그 영광이 돌아올 때 "이것은 내가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욕먹을 짓만 하고 돌아다니기에 돌아오는 것은 욕밖에 없는데 주일이면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받을 영광이 있어야 영광을 받지 않겠습니까? 받을 것이라고는 욕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광을 돌리는 것은 내게 오는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회인지 잘 기억은 못하지만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그라프가 몇 번이나 챔피언이 되지 않았습니까? 한번 챔피언이 된다는 것만도 보통 영광이 아닙니다. 그 게임에서 지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역전을 하여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 경기를 지켜본 많은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칭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상하기 바로 전에 관중석으로 뛰어가서 나이 지긋한 분과 끌어안고 기뻐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청중들은 그가 누구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 쪽을 향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분이 그라프의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 나의 이 영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을 돈을 벌 듯이 벌어야 합니다. 칭찬도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됨의 은혜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은혜는

첫째 부인 못할 은혜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도 부인 못할 그리고 널리 소문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문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도 소문나는 즉 누구도 부인 못하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변화됨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나약하던 베드로, 할 짓 못 할 짓, 할 소리 못할 소리를 다 하던 베드로가 마지막에는 목숨을 내 놓고 충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베드로의 모습, 그 은혜가 여러분의 은혜이기를 바랍니다.

셋째 영광 돌림의 은혜입니다.
내가 영광을 벌어서 나에게 오는 영광을 전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본문의 앉은뱅이가 영광을 벌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래서 영광 돌림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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