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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살과 피 / 요 6: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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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하용조 목사 (온누리교회)
제 목 : 예수님의 살과 피
본 문 : 요한복음 6장 41~59절 


죄인을 구원해 영원한 생명 누리게 하는 ‘참 양식과 음료’
깨진 관계를 하나로 잇는 예수님께 연결, ‘생명의 능력’ 경험해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서
핵심은 ‘생명’입니다.
참 생명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면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복을 누릴 것입니다.


11월 27~29일까지 일본에서 생각지도 못한 은혜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서울 온누리교회의 모세대학, 일본어 예배 관계자들 등 90여명, 일본의 다섯 교회에서 1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또 예상치도 않았던 1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일본 집회에 대한 정의는 한마디로 ‘생각지도 못한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모든 분들이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했습니다. 내년에도 이런 집회로 다시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헌금하며 눈물 흘릴 때 보잘 것 없던 일본 교회들에 그동안 엄청난 축복이 있었습니다.

우에다에서 오신 여자 성도 한 분과 동경온누리교회(장재윤 목사) 남자 성도 한 분의 간증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세례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모든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가 넘쳤던 기쁨이 충만한 집회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교회를 환영하기보다 거절하고, 이해하기보다 오해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를 말할 때 사람들은 거부감과 적개심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타락했다’라고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도 인간은 선한 구석이 있지 않느냐’며 반발합니다. 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있다’고 설명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주어졌다’며 맞섭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요, 메시아다’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고 맙니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식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면 진화론자나 이성주의자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벌떼처럼 들고일어납니다. 그들은 윤회설이 더 이성적이고 타당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 천국이 있다고 하면 듣기 싫어하고 지옥이 있다고 하면 더욱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자신이 지옥으로 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며 애써 태연한 척 합니다.

이렇듯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2,000여 년 전에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온 떡이라고 증거하실 때 함께 있던 종교인들은 부정적인 반응과 적개심을 나타냈습니다. 그 말씀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41, 42절입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1절 말씀에 ‘서로 수군거렸다’고 기록하고 있고, 42절 말씀에는 ‘예수의 부모를 우리가 잘 아는데 어떻게 자기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신론자보다 더 묘하고 복잡하며 강퍅한 사람이 종교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편견과 오류를 범하고도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수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께서 종교인들에게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3, 4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4절 말씀에는 구원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에게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수 없다는 설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닫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미는 손, 초청하는 손’이 있기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손’과 ‘믿음의 손’ 사이의 예수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초청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님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나를 이끄시지 않으셨다면 응답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허공에 손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다’며 소리 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계시지 않고 초청하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응답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은혜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조건 없이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응답이 존재할 수 않습니다.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특정인 ‘아무개’에게나 편지를 쓸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편지를 쓸 수 있겠습니까? 편지는 대상이 분명히 있어야 부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는 것도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다는 겁니까? 그분이 부르시고 초청하시며 이끄셨기 때문에 내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 입니다.

둘째, ‘믿음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에 내가 응답하고 마주 뻗는 손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는 손과 내가 구원을 요청하는 손이 닿는 연결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운데에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두 손은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입니다.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곧 죽은 자가 영원하신 자에게 연결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44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과 나를 연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은혜의 손과 나의 믿음의 손 사이에 예수님께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이요, 조건 없는 사랑이요, 영원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초청하시고 이끄셔서 예수님께로 오게 하셨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로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끄시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오신 분도 있겠지만 거기에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오셨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그분께로 오게 됩니다. 
코 꿰어 억지로 오는 분도 있고, ‘아멘, 할렐루야’하며 즐겁게 오는 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든 성도들이 춤추며 기쁘게 그분께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름 ‘예수’

45절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았다는 뜻인가요? 46절 말씀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을 뵙지 못했지만 환경, 여건, 심정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하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살다가 실망한 나머지 자살 직전에 하나님께로 나오기도 합니다. 외로움, 실패, 절망, 질병을 통해 이끌려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적은 없지만 여러 상황에서 자꾸 하나님께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와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7, 48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셨기에 본인도 모르게 교회로 나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 앞에 갔을 때 은혜와 생명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삶을 경험하고서야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서 핵심은 생명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공언하셨습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

생명의 특징은 한마디로 죽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특징이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슬프거나 절망하고 싸우는 것들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로 옷 입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프다, 죽고 싶다, 괴롭다, 죽이고 싶다, 불안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등은 죽음의 그림자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모든 상담은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생명이 있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면 성장하게 됩니다. 생명의 성장에는 ‘번식’과 ‘열매’가 있습니다. 생명의 성장은 절대 멈추지 않는 법입니다. 생명은 사랑이고 빛이며 영원입니다. 곧 생명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빛 가운데 서게 되고 편안해지며 용서하고 관용합니다.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자녀들에 대한 희생 정신이 생깁니다. 샘솟는 기쁨이 자기 안에 움트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명사입니다. 덧붙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생명의 떡과 비교되는 것이 구약에서 먹었던 ‘만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은 죽었지만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49절에서 51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고서도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겐 ‘죽음’의 개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고 죽어도 사는 것이 됩니다. 그게 생명의 특징입니다. 죽는 순간에도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을 닿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드는 것과 상관없이 성도들의 얼굴에 생명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과 음료

사람이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시체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어도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입에선 생명의 말이 나오고 감사와 찬양이 넘쳐납니다. 이것이 곧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재미있게 ‘생명의 떡’으로 표현했습니다. ‘떡’의 기능은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떡’은 떼어서 먹는 것입니다. ‘떡’이라는 말은 ‘먹는다’는 말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듯이 신앙은 느끼고 감상하는 게 아닙니다. 보고 즐기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구경만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가대가 노래를 얼마나 잘 하는지 봅니다.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 하는지 살핍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왔는지,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게 구경만 하면 10년을 왔다갔다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을 먹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객관적 대상이 아니십니다. 지식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는 영원하신 주님이 되십니다. 52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식인종의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육은 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해석하려면 식인종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식인종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됩니다. 계속해 53~ 55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감상하고 따지며 연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나를 먹고 마셔라. 그러면 주리고 목마른 네 인생은 풍성해지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내가 녹아져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6, 57절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먹으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먹어야 삽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개념이 성만찬식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려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준 것입니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는 말씀은 단지 관념이 아니라 역사의 경험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늙어간다는 것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병든 것도 실패한 것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생명이 들어오면 모두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를 위해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전달되게 하시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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