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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 / 사 9:2~6, 딛 2:11~14,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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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
본 문 : 이사야 9:2 ~ 6

어둠속에서 헤메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하나님, 주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은 행복하게 하셨읍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 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뭉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디도서 2:11 ~ 14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2:8 ~ 14
그 지역의 목자들이 들에서 밤을 새우면서, 자기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적이다.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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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고 계시는 평화의 왕, 그리스도가 아기 예수가 되어서, 여러분 가슴속에, 마음속에, 인생 깊은 곳에 오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이맘때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자선 냄비를 볼 수 있습니다. 어느새 자선 냄비가 곧 크리스마스를 알려주는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구세군 사관들이 흔드는 종이 울립니다. “아기 예수가 오십니다. 그 사랑에, 그 영광에 동참하십시오.” 우리는 빨간 냄비 속에 동전이나 지폐를 넣고, 헌금을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지혜도 배우고, 나누는 결단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제가 들은 얘기 하나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매일 지나는 길거리에서,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출근하고 퇴근하는 걸인 한 사람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생긴 그날에도 여지없이 시간이 되자 그 걸인은 거리에 나와서 구걸을 합니다.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그날 따라 잔돈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결심하고 그 사람에게 가서 손을 딱 잡고, “미안하지만 오늘 내가 당신에게 줄 돈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내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드릴 테니, 나하고 악수 한번 합시다.” 하고 악수를 따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을 놓아야 돌아가겠는데, 걸인은 한동안 손을 놓지 않더니,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내가 몇 년을 이 거리에서 구걸하여 살아왔는데, 한 번도 누구도 따뜻한 사랑으로 손 한번 잡아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처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헤어졌대요.

그런데 그 다음날, 그 걸인이 안 보였어요. 일찍 퇴근했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안 나왔습니다.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여 먹고사는 것이 습관이 된 이 사람이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받은 다음부터는 다시는 구걸을 안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나도 인간을 체험했다. 사랑의 깊이를 느꼈다. 나도 인간이고 싶다. 나도 일하고 싶다. 일거리를 찾아 나간다.”고 선언하고, 다시는 길거리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이야기입니다. 걸인이 따뜻한 체온을 접한 일 하나로, 인생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하면, 이 사람에게 평화는 뭐겠습니까? 다른 게 아닙니다. 따뜻한 악수, 한 번의 사랑의 손길 때문에 인생이 온전하게 된 것, 나는 이것을 가리켜 평화라고 이름합니다. 평화는 다른 데, 먼 데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자기의 진실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준 것이 바로 평화를 이룬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전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중에 길가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앉은뱅이가 구걸을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한테는 금과 은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시오.” 그래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어떻게 해서 베드로에게만 일어나야 합니까? 사랑의 손길이, 진실의 손길이 있는 곳에는, 종류는 다르지만, 형태는 다르지만, 시간이 다르고 장소가 다르지만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사람이 과거의 탈을 벗고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참 모습을 회복하는 것, 오늘 이사야서 말씀처럼 행복하고 복된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기적이 생겨나야 합니까? 남들이 말하는, 혹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엄청난 일들, 그것은 남의 일이지 우리의 몸으로 느끼는,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기적은 아닐 겁니다. 따뜻한 사랑의 손길 하나, 인간의 온기 하나로 일어나는 놀라운 일, 그것이 오늘 우리들한테 오는 작지만 큰 기적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뭔지 아십니까? 이사야서 말씀대로 이 세상이 너무 차가워서, 이 세상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헤매는 백성에게 메시아가 빛으로 오시는 것,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온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메시아가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어둠 속의 빛, 죽음의 그림자에 가운데 사는 땅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입니다. 그 빛은 반드시 비치게 되어 있고, 빛이 비치면 어둠은 밝음으로 변하게 되어 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은 생명의 하늘로 바뀌게 됩니다.

성탄이란 하늘의 오심입니다. 빛의 오심입니다. 인간의 사랑도 사람을 바꿔 놓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를 몽땅 뒤바꿔놓으실 것입니다. 그 뒤바뀜이 아니고서는 성탄의 의미가 없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십니까? 이사야서가 다시 설명합니다. 메시아가 탄생하시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게 만듭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눠 가질 때 즐거워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지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게 이사야가 꿈꾸던 메시아 비전입니다.
그 비전이 어떻게 실현됩니까? 이사야서가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이 많은 비전을 “한 아기가 우리 안에서 태어났다.”는 말로 끝맺어 버립니다. 설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그 탄생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모사―위로하는 사람 카운슬러, 못하시는 일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 지금 순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영원불변할 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렇게 표현을 바꿔 가면서 감격을 노래했습니다.
마지막에 이 표현을 다 모아서 평화의 왕이라 부릅니다. 평화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 평화의 왕이 오십니다. 이 땅에 오시기 전의 그분 이름은 영광이라 했습니다. 성가대가 부른 영광송, 그 영광송이 울려 퍼지는 곳에서는 영광이 평화가 되어 임하십니다. 영광스러운 분이 평화의 왕이 되어 탄생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탄생하시는 평화의 왕, 그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하늘이 와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단지 손과 손이 악수하는 만남이 아닙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정다운 그런 인사가 아닙니다. 아예 “내가 너와 하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육신입니다. 성육신! 그건 뭐냐 하면, 하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왔다는 단지 기적과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하고 하나가 되시는 사건입니다. 만나시는 게 아니고 그냥 하나가 되십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십니다. “너희들의 삶은 이제부터 하늘의 삶이다.” 질곡과 불안과 좌절이 있는 곳, 그곳에 하늘의 영광이 임하면 행복과 희망과 웃음이 솟아납니다. 왜? 하늘과 땅이 합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합치셨음을 기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공생애 전까지의 약 30년 동안 뭘 하셨는지, 성서에 기록이 없습니다. 성서는 서른 살쯤에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서른 세 살쯤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중심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태어난 이후 30년 동안 그분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합니다. 우리처럼 살아간 실존적인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 예수, 그 예수는 뭘 하고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상상의 영역일 뿐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잊혀진,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역사입니다. 적어도 성서는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성서의 관심은 말구유에서 태어난 일, 그리고 30년이 지난 다음에 시작된 공생애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역사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역사에도 상당한 시간적 공백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부활하기까지 3일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골고다 언덕에 있는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무덤에서 뭘 했습니까?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것, 십자가에 우리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성탄을 기뻐한다는 것은 3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누가 오늘 우리 가운데 탄생하십니까? 부활한 그리스도가 어린아이가 되어 오늘 탄생하십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탄생하십니다. 왜 태어나십니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우리 현실에는 어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구간,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구간은 인간이 가고싶지 않은 곳, 말이나 짐승들만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사회의 변두리입니다. 인간 소외의 가장 극단적인 현장입니다. 인간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성 밖의 지역입니다.

그 곳 외에 남은 데가 없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 성문 밖으로 가십니다. 인간 세상의 바깥으로 가십니다. 우리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성 밖으로 가십니다. 왜? 그곳에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질곡이, 세상에 불의가 있는 한 십자가는 다시 세워집니다. 그분이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합니다. 좌절과 절망이 우리 사회에 존속하는 한 부활의 생명이신 그분이 다시금 어린아이로 잉태되어야 합니다. 왜? 온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슬픔이 존속하는 한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말구유로 부활하신 주가 오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어둠을 내놓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곳으로 오십니다. 우리의 어둠 속에 그분이 탄생하십니다. 탄생은 한 생명의 탄생이고, 부활은 다른 생명의 탄생입니다. 무한한 생명이 오늘 유한한 생명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우리의 말구유 속에!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오심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탄절에 시작해서 사순절을 거쳐, 부활절로 이어지는 성탄절이 아니고, 거꾸로 부활하셔서 성령의 이름으로 역사하시는 그분이 오늘 인간의 구석진 곳을 찾아서 다시 탄생하시는 성탄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십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평화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1년 크리스마스에 탄생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생명과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한테 오시는 평화의 왕, 그분은 어떻게 오십니까? 사람들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방법은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아예 죽자. 자살 테러 방법과 아주 비슷합니다. 최악입니다. 그보다 조금 나은 것은 너는 죽고 나는 살자는 것입니다. 좀 얌체 같지만 한쪽은 삽니다. 더욱 나은 방법은 나 죽고 너 살라는 것입니다. 불길 속에 뛰어드는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너도, 나도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성육신이란, 예수께서 너도 죽고 나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악 속에 오늘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잉태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으로 끝날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 역시 죄 사함 받고, 용서받고 살게 됩니다. 성육신이란, 크리스마스란, 하나님이 인간과 합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사시고, 우리 또한 사는 공동체적인 사건입니다. 하늘과 땅이 함께 사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오늘 기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반드시 오십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 시달리는 모든 백성들에게, 테러로 지금 좌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든 불안과 좌절 속에, 오늘 예수께서 죽지 않는 생명으로 오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만나자. 악수가 아닙니다. 나하고 한 몸이 되자. 성육신 하겠다. 나한테 참여해라.

제가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한테서 작은 문건 하나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사는 얘기, 죽는 얘기가 아주 재미있게 쓰여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만 소개하겠습니다. 60세 넘으신 분은 아주 진지하게 들으실 만합니다. “60살 환갑이 되어서 저승에서 죽음의 사자가 오거든”이라는 제목입니다.

60세 환갑에 저승사자가 오거든 “지금 부재중”이라고 일러라.
70세 고희가 되어 찾아오거든 아직은 좀 이르다고 일러라.
77세 희수가 되어 오거든 이제야 비로소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일러라.
80세 신수가 되어 오거든 이래봬도 아직은 쓸모가 있다고 일러주어라.
88세 미수가 되어 오거든 쌀 좀 더 축내고 가겠다고 일러라.
90세 졸수가 되어 오거든 너무 그리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일러라.
99세 백수가 되어 오면 때가 되면 내가 자진해서 간다고 일러라.

얼마나 살고 싶으면 저승사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까? 자, 60세가 안 되어도 괜찮습니다. 나이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2001년 혹시 저승사자가 오거든, 우리 사회를 좀먹는 반평화적인, 반인륜적인,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여도 눈 깜짝하지 않는 부도덕한 사회에 저승에서 사자가 오거든 이렇게 이르셔야 합니다. “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고 일러라.”

오늘이 아닙니다. 내년도, 내후년도, 언제까지나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인간과 그 가정과 그 세계 모든 것의 온전한 변화를 추구하는 평화의 사건으로 임합니다.
이 사건이 오늘 여러분에게 큰 평화의 사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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