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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자 앞에 서도록 / 눅 21: 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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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인자 앞에 서도록
본 문 : 눅 21: 29-36
설 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누가복음 21장 29절에서 36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인자 앞에 서도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이라는 본문을 그대로 제목으로 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른편과 왼편에 평생을 강도 짓만 하던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왼편에 있는 강도는 그렇게 주님을 헐뜯고 비방을 합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강도는 "우리는 우리 행한 일에 당연한 보응 즉 당연한 처벌을 받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비방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왼편에 있는 강도를 책망했습니다. 평생 강도 짓만 하던 사람이 예수를 어떻게 비방합니까? 이것을 보면 세상에 비방할 만한 사람이 비방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강도는 예수님께 대해서는 전혀 "불의한 일이 없다"고 변호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즉시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예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날 해가 넘어가기 전에 오른편 강도는 주 앞에서 보란 듯이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주 앞에 서는 사람과 영원히 주 앞에서 추방당하는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오면서도 주 앞에 설 사람도 있지만 서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주 앞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가운데는 설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29-33)
 
  느부갓네살 왕이 한번은 꿈을 꾸었습니다. 사람 모양의 우상을 보았습니다. 즉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노라니까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한 날아오는 돌이 우상을 박살냈고 가루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바람이 불매 흔적이 없어지고 돌은 점점 커져서 온 세계에 가득했습니다. 이 꿈을 꾸고 바로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다니엘이 나타나서 기도하는 중에 환상으로 그 꿈을 본 후 느부갓네살 왕 앞에 와서 그 꿈을 찾아 주고 해몽을 해 주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아주 큰 신상을 보았는데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우상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인류역사가 흘러가는 시대를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즉 꿈입니다. 머리로부터 시작되듯이 머리가 금이라면 이 금의 시대는 바벨론 느부갓네살 당신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가슴과 팔이 은으로 된 은의 시대가 오는데 이것은 메대 파사 시대를 의미합니다. 또 배와 넓적 다리는 놋으로 되어 있는데 놋의 시대는 헬라 시대를 가리킵니다." 다니엘이 꿈을 해석할 때는 파사나 헬라가 세계 강국으로 등장하기 전입니다.  그 다음으로 "종아리는 무쇠덩어리로 되어 있는데 헬라 나라를 뒤엎고 대 제국을 건설할 로마를 가리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해석을 하고 발과 발가락에 대해서는 해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발과 발가락은 철과 진흙이 섞여 있기에 아주 기초가 약합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세를 의미합니다. 바로 그때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한 뜨인 돌이 등장하는데 재림하시는 예수를 가리킵니다. 우상을 박살낸다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인간의 역사를 끝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돌이 점점 커져서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인류역사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이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바벨론 시대를 이어서 파사 시대, 헬라 시대를 이어왔고 로마 시대는 벌써 1,00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닙니까? 지금은 발과 발가락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발의 시대도 거의 지나갔고 우리는 발가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세 중에서도 말세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는 날 인류역사를 끝내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사하고 안일하게 살고 믿으면 안됩니다. 말세 중에서도 말세를 살아가고 있기 까닭에 예수의 오심은 정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을 대비하고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에서 33절을 보면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세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화과 나무를 보았느냐?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지고 죽은 것 같지만 봄이 돌아오고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왔구나 하는 것을 알지 않느냐? 싹이 나면 반드시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 하나 증거해 준 말세의 징조들이 너희에게 나타나 보이거든 인자가 즉 예수님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보여 주신 말세의 징조들이 무엇입니까? 적그리스도 사이비 이단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세가 되면 종교계에 혼란이 일어납니다. 바로 우리 교회 뒤편에도 이단이 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알만한 가정도 이단에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한번 이단에 발을 들여놓으면 아무도 끌어내지를 못합니다. 미혹의 영에 미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혼란, 신앙적인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각 처에서 민족과 민족이 싸우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2차 대전 후의 크고 작은 전쟁이 인류 역사 이래로 있었던 전쟁 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기후의 이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요즘 기후의 이상 변화가 많이 일어나서 난리가 아닙니까? 추울 때는 추워야 하고 더울 때는 더워야 하는데 지구 자체의 온난화 때문에 북극에 눈이 녹아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겨울 날씨도 더워지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나중에는 기후의 이상 변화가 어떻게 더 나타날는지 걱정스럽지 않습니까? 말세가 되면 반드시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가정 제도의 파탄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즉 말세가 되면 부모가 자식을 붙잡아 죽는데 넘겨주고,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한다고 합니다. 형제가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죽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라고 주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정 제도가 혼란에 빠져서 위아래가 없습니다. 부모 형제를 몰라보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내 남편을 낳아 주고 길러 주고 믿음직스러운 그 남편을 나에게 공짜로 주셨는데 그 시부모를 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것뿐입니까? 형제가 돈을 놓고 얼마나 싸웁니까? 이렇게 가정 제도의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늘에서도 이상한 징조가 나타납니다. UFO라고 하는 미확인 비행체 조차가 하늘의 이상한 징조입니다. 그밖에 별들이 떨어지고 해가 어두워집니다. 지진이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연현상에 여러 가지 재앙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이웃에 대해서는 불법이 성행하므로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 형제에 대한 사랑, 교인들 간의 사랑이 그렇게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거든 무화과 나무에 잎이 나면 여름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인자가 문 앞에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라는 뜻입니다. 문만 열고 들어오면 세상은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무사하고 안일하게 믿을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를 분별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말세 가운데에서도 말세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은 문 밖에 오셔서 문 여는 순서만 남았다는 것을 알고 그 주님 앞에 서도록 그 말세에 합당하게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34-35)

  주께서 말세에 재림하기 직전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누가복음 17: 26-30)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재림하기 전에도 사람들의 생활 심지어 믿는 사람들의 생활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집을 짓는 일곱 가지 생활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의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집을 짓지 않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멸망 받고 심판 받을 죄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슨 죄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숨어 있습니다. 일곱 가지 생활에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하'자 한자를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자기 생활에서 완전히 하나님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배제시킨 것입니다. 내 생활의 주인은 '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은 심판 받을 인간의 죄 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핏덩어리 같은 나를 임신의 고통, 해산의 고통, 양육의 고통을 통해서 나로 하여금 나 되게 하신 부모님을 나이 많아 유산을 많이 남겨주지 못한다고 부모의 꼴을 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제주도에 가자고 하면 제주도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들의 생활에서 부모를 완전히 추방해 버린 것입니다. 배제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못된 인간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망할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밖에 나가서 도둑질을 했습니까? 칠계를 범했습니까?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부모를 몰라보고 부모를 모시지 않고 섬기지 않고 나 몰라라 하여 추방해 버리고 배제하는 자식들이 심판 받을 대상 중에 첫 번째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생활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집 짓는 일에만 몰두하고 하나님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이런 생활을 보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믿는 사람 자체도 그렇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재림하여 가차없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인자 앞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도 그렇게 될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활에서 하나님을 배제시키고 하나님을 쫓아내 버리고 내가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 산다면 믿지 않는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런 신세 그런 입장이 될까 조심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아차 하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활에만 몰두하다 보면 내 영혼이 어두워지지 않습니까? 내가 내 생활에만 몰두하게 되면 믿음을 등한히 하고-* 소홀히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믿음이 내릴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34절에서 35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4절과 35절을 보면 첫 마디가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조심을 시키고 주의를 시켜서 할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알아서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자칫 잘 못하면 아차 하는 순간에 너희도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방탕한 생활, 술취한 생활,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어두워지고 영이 어두워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소홀해 지고 믿음이 나태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저 남이 만원을 벌면 나는 이만원을 벌어야겠다고 하는 것 자체야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생활의 전부라고 한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신앙의 '신'자도 찾아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고 승용차를 사서 놀러 다니는 쾌락에만 몰두합니다. 술취함과 방탕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믿음은 소홀히 하고 등한히 할 때 인자 앞에 설 수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제 몇 명만 더 전도해서 채우면 재적 교인이 사만명이 됩니다. 그 중에서도 일년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면 이름을 가차없이 빼 버립니다. 그래도 사만명이 돌아가면서 결석을 해서 그렇지 나오기는 나옵니다. 오늘 출석한 사람이 우리 사만명의 절반이 됩니까? 나머지는 어디에 갔습니까? 이렇게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고도 우리가 주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이렇게 되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어떤 글을 읽었습니다. 너무 마음에 와 닿고 마음에 찔리는 글이기에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
얼굴 붉어질 것 같으면
결코 그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그대 무슨 말 속삭이는지 모르지만
예수님 듣기 원치
않으시는 것이걸랑
한마디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대 무엇을 쓰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 보여드리기
부끄러운 것이걸랑*-
그대의 펜을 놓고 쓰지 마십시오

그대 어디를 가든
예수님께로부터
"그대 어찌 여기 왔느뇨?"
말 듣기 창피하거든
한 발자국도 그런
곳에 들여놓지 마십시오

그대가 추구하는
쾌락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너 지금 무엇하고 있느냐?"
물으실 때
깜짝 놀라 움츠러드는 것이걸랑
거기서 돌아서십시오

그대가
생각하고
말하고
읽고
쓰고
노래하고
걷고

그 무엇을 추구할지라도
그것이 집 안이건
집 밖이건
순결하고 정직하게 행하고
십자가 바라보며
사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것이 바로 조심하는 생활입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함정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금 읽어 드린 이 글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바로 스스로 조심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36-)

  본문으로 돌아가서 36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깨어 있기는 있는데 무엇을 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까?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잠자는 시간에 깨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하면서 깨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년 동안 기도를 하지 못했지만 열흘 동안만이라도 철야를 하면서 집중적으로 기도하자 하여 다락방 철야 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아래 윗층이 전부 꽉 차도록 모여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다가 시험에 들면 그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주님이 떠 먹이듯이 말씀해 주시는데도 기도하지 않다가 큰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까?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자체는 바로 기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은 잠자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을 여러분들 스스로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 예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지 왜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합니까? 자기를 정당화시키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예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그 말을 나 스스로에게 하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핑계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주님이 하실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깊이 할수록 예수님과 정들고 친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김해로 가서 노무현씨 집 옆에 집을 하나 마련해 놓고 그 분과 친하게 지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 중에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진작 친해 둘걸 하고 말입니다. 이제 친하려고 하니 친해집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한자리했을 텐데 라고 말입니다. 이제 와서 인사하면 여러분을 알아봅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소스톰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로마 법정에서 증인을 서야만 할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머나먼 시골에 있는 농부입니다. 그런데 출두해서 이 재판에 증인을 서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법정은 고사하고 로마 자체를 가 본 일이 없었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어서 제일 친한 친구에게 찾아가서 "같이 좀 가 줄 수 없겠나?"하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이리 저리 핑계를 대더니 "내가 시간이 없어서 가지 못하겠는데 자네 다녀오는 노자로 보태 쓰게"라고 하면서 제일 친한 친구가 돈 몇 푼을 보태 주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가서 그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두 번째 친구도 역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내가 로마까지는 가지 못하겠고 자네 집에까지만 데려다 주고 오지"라고 하면서 자기 집에 온 친구 손님을 그 친구의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할 수 없다 하여 준비를 하면서도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아주 서먹한 세 번째 친구가 찾아오더니 "로마에 간다면서요?"라고 하였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요, 나도 로마에 갈 일이 생겼는데 내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결국은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이 예화를 어떻게 해석해 주는지 아십니까? 제일 친한 친구, 노자 몇 푼 보태주는 친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돈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 무덤에 갈 때 땅 한 평과 수의 한 벌밖에 주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친한 친구는 가족인데 가족은 무덤까지 왔다가 다 돌아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서먹한 친구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따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던 그 서먹한 친구가 하늘 나라까지 인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진작 친해 두었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정들고 친해지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인자 앞에 서도록 기도하므로 깨어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첫째로 우리는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말세 중의 말세라는 것을 여러 가지 징조를 보아서 알아야 합니다. 무사 안일하게 믿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재림하시는 인자 예수 앞에 서도록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조심하지 않다가 마지막에는 너무도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아니한 것은 스스로 조심했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실족하게 됩니다. 조심하라는 주님의 경고를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깨어있음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되 무엇을 하면서 깨어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주 앞에 서먹서먹함 없이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말고 항상 기도생활에 열심이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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