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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왕의 왕께 존귀를 돌릴찌라 / 딤전 6: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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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디모데전서 6:13-16
제 목 : "만왕의 왕께 존귀를 돌릴찌라"
설 교 :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지난 주간의 최대 잇슈는 제16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양강 구도로 전개된 이번 대선에서 후보자들은 물론이고 유권자인 국민들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드라마틱한 국면을 맛보았습니다. 특히 선거 몇 시간 전 공조를 약속했던 정당 대표가 단일화된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사태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여겨졌다가 투표 종료 후 발표한 방송 3사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또 한번 뒤집혀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숨막히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이건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통령은 사람이 세우는 게 아닌가보다... 어떻게 그 시점에서 경솔하게 '지지 철회'를 할 수 있습니까? 몇 시간만 꾹 참고 견디어내면 엄청난 권력을 나눠 누릴 수도 있는 국면에서... 결과적으로 볼 때 정말 '지지 철회'를 한 당의 입장에서는 억울해 땅을 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그 고비만 넘겼더라면 지금쯤 그 영화의 절반은 자기 몫이 아니겠습니까? 국무총리에 몇 개 부서 장관자리는 따놓은 당상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지 철회 여파로 밤새 인터넷상에서는 사표 방지를 위한 긴박한 또 다른 공조가 네티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밤 사이의 그 게시판 조회수가 수십만을 기록했다고 하니 참 선거문화가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알다시피 치열한 박빙의 승부 끝에 2.3%라는 차이로 당락이 결정나고 말았습니다.

새날이 밝아오자 당선자는 웃었고 낙선자는 울었습니다. 한 사람은 국민들 앞에서 환한 웃음과 함께 대통령 당선 소감을 밝혔고, 또 한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회한의 은퇴 소감을 밝혔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이 갈린 것입니다.

당선이 확정되고 당선증을 건네받자 당선자를 비롯한 그 가족들에게 곧바로 대통령 경호에 버금가는 경호가 취해졌습니다. 수백명의 경찰 병력이 당선자 주변 곳곳에 배치되어 경비에 들어갔습니다. 국립묘지를 방문할 때는 경찰 차량과 오토바이 스무 여대가 호위를 했고 신변보호를 위한 방탄차도 제공되었습니다. 당선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대통령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또 당선자의 그러한 위상 변화를 주시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대선에 출마하셨더라면 과연 당선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소개하는데 과연 예수님은 그런 대우를 받으셨는가?...' 마침 성탄절 직전에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였기에 그 진행과정과 결과를 보면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본문 15절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니라..."
사도 바울은 이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되신 분'이시고,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홀로 한분이신 전능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죽거나 소멸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기에 아무 사람도 보지 못했고 또 볼 수도 없는 존귀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건 성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자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계17:14절에 보면 사도 요한도 바울 사도와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것이라..." 또 계19:16절에서는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성경이 증거하는 주님의 정체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이 땅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오늘 우리 시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대통령 중의 대통령이다" 뭐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가장 높임을 받아야할 그런 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한 '실격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그의 백성이 그를 받아들이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대통령 당선자의 그 화려하게 변화된 위상을 보면서 주님이 생각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민노당의 권영길 후보가 상당한 약진을 보였는데 아마 예수님이 출마했다면 그 정도도 얻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리고 주님 스스로가 그러한 자리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경제적 도움을 입은 무리들이 그분을 억지로 대통령을 시키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해 준 그를 대통령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자기들의 병든 몸을 고쳐준 그를 시정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히려고 했던 가버나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기꺼이 그것을 원했습니다. 한 자리가 보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후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님은 '실패한 구원자'가 되기 보다 '실패한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대통령이 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구원자가 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자리를 버리고 고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 주님이 오신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으실 거고, 만약 출마하신다 해도 보기 좋게 낙선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 삶의 척도삼고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할 이유는 그분은 다시 오셔서 우리의 생을 평가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15절에서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주님은 '죽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존귀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 세상에 당신을 보이고 사시다가 죽으셨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아주 평범한 한 인간으로, 아니 가장 약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겁니다. 그러니 이게 바로 복음 아니겠습니까? 뵐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분을 우리가 만나게 되고 뵙게되는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 아니겠습니까?...

대선 전에는 목회자들에게도 이런저런 연락들이 옵니다. '대구에 아무개 후보가 와서 모이는 목회자 모임들이 있는데 안오겠느냐..." 이쪽 저쪽에서 연락이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목회자가 가서 뭘 합니까? 소신껏 판단해서 한표를 행사하면 되는거지 그런 자리 쫓아가서 눈도장찍어 뭘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이제 또 그때 얼굴 좀 내밀었던 이들이 안면있다고 청와대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려 애를 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힘있는 자의 곁에 잠시라도 머물기를 소원하는 것이 간사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정작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 앞에 인간들은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그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렸습니까? 그분을 그토록 귀히 여기며 받들어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멸시와 수모를 돌렸고 왕좌가 아닌 십자가 형틀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처참하게 처형시켰습니다.

사실 주님은 그러한 운명을 벗어 던질 수도 있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주님을 유혹했습니다. 때로는 그의 고통을 미끼로, 때로는 그의 능력을 미끼로, 때로는 약함을 미끼로 온갖 유혹의 덫을 던졌습니다. 거기에 넘어가주면 십자가의 고통을 맛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사탄의 시험을 모두 물리치십니다. 물론 그게 쉬운 건 아니었지만 끝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인간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그분을 높여야할 이유입니다.

사도는 짤막하지만 아주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면모를 13절에서 소개합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는 이 짤막한 구절 속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은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앞에서 사십니까? 사람들은 다 목표를 정해놓고서 그것 앞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앞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저마다 다 자기 눈을 가리는 그 무엇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에 눈멀어 사는 겁니다. 바로 그것, 우리로 눈멀게 하는 그것이 뭐냐가 중요합니다.
그건 돈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권력이거나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이것들 앞에서 삽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카멜레온처럼 자기를 변신하기도 하고 철새처럼 따스할 것 같은 자리를 찾아 옮겨다니기도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을 앞에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바로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그런 것들 앞에서 사셨다면 사탄의 유혹에 여지없이 넘어가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살았기에 인생의 정도를 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인생의 길을 그려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사는 자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21세기를 맞아 우리 교단이 시행하는 10년 계획이 있습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전교회가 시행할 운동이 바로 '생명살리기 운동 10년'이라는 것입니다. 이 운동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 생명공동체'를 만드는 것이고, 표어는 "하나님께 돌아와 소망 중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인생들에게 영생을 주고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셨던 겁니다. 이게 진정 대통령이 해야할 일 아니겠습니까? 잘 살게 한다는 것이 꼭 경제적 차원에 국한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이건 기술이나 정책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달린 문제입니다. 우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라는 자기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정하고 사느냐에 따라 '살기 좋은 국가'가 될 수도 있고 '살기 안좋은 국가'가 될 수도 있고, '성공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실패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여겼기에 자신을 비우고 이 땅에 오셔서 죽임 가득한 세상에 살림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가장 귀히 여기는 분이셨기에 여인의 모태에서 아기로 태어났고, 십자가에서 친히 죽임을 당하셨고, 또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생명 살리기 운동'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의입니다. 정의가 서지 않으면 살림의 역사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분"...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당당하게 증언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누구입니까? 굽고 왜곡된 정치 현실을 상징하는 자 아닙니까? 정의가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적 이해득실 속에서 진리와 정의를 외면했던 자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야에 물을 떠오라'고 해놓고는 거기다 자기 손을 씻으면서 자기변명과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이래가지고는 정의가 설 수 없고 정의가 서지 않고서는 살림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오늘의 정객들을 보십시오. 인터넷 어딘가에 가보면 '정치 철새들의 초상'들을 모아놓은 곳이 있습니다. B당 중진이었다가 A당으로 옮겨온 자, C당에 몸담고 있다가 A당으로 옮겨온 자...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옮겼을까요? 진리와 정의 때문입니까? 아닐 겁니다. 또 그들이 정의가 뭔지, 진리가 뭔지, 신의가 뭔지를 모릅니까? 다 압니다. 알면서도 '어느 줄에 서야 내게 영화가 보장될까'를 재면서 이리왔다 저리갔다 한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한이 있어도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당당하게 선한 증거를 증거하십니다. 바른 게 뭐냐, 옳은 게 뭐냐, 선한 게 뭐냐... 이것이 바로 그분의 삶을 움직이는 닻이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노 당선자의 손을 들어 준 것은 민주당을 보고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 노무현만을 보고 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개혁과 통합을 바라는 마음에서 였을 것입니다. 분열된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을 하나되게 하기에는 이회창씨보다 노무현씨가 좀 더 적합하다고 여겨서 였을 것입니다. 정의가 살아있고 공평이 실현되는 세상, 진리와 성실이 통하고 거짓과 술수가 물러가는 세상, 지역적 민족적 통합을 이루어갈 개혁에 그가 조금이라도 더 적합하다고 여겼기에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일 겁니다. 그만큼 그의 지나온 삶의 선명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만물을 살게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그리고 악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는 당당하게 살다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제 사도는 디모데에게 명합니다. "그러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켜가라..."
사도는 디모데가 지켜야 할 것들을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지 말고, 일만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쫓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라. 네가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이것이 바로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과 안목의 정욕에 눈멀어 정의와 진리를 저버린 악한 본디오 빌라도가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싸워 맡은 사명을 나무랄 데 없이 온전히, 한 점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그렇게 최선을 다해 감당하라고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를 바울은 확정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실 것"이라며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그 때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분이 오실 때까지 그분께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리라"고 당부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김대중 현 대통령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보다 그리고 이 고장이 낳은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훨씬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주님을 그렇게 높이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주님을 높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앞에 주님을 세워놓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무엇보다 주님이 먼저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높이며 살 수 있습니다.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빗나가 삶의 초점을 다른 곳에 맞추고 살 때 우리는 그분께 합당한 대우를 못해드리게 되고 그분은 우리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외면하고 부와 권력과 명예를 움켜쥐었던 본디오 빌라도가 성공한 인생이었습니까? 본디오 빌라도가 성공인생이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그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그분 앞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언제나 주님께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은총 안에서 삶을 누리는 복된 인생들이 되십시오. 피할 것은 냉정히 피하고 따를 것은 과감히 따라,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뵙는 복된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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