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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꿈꾸는 교회 (Ⅳ)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는 교회] / 수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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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우리가 꿈꾸는 교회Ⅳ [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는 교회 ]
본 문 : 수 14 : 6-15
설 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865년, 링컨이 암살을 당하고 전국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때 부통령으로 있던 앤드류 존슨이 대통령직을 이어 받은 2년 뒤인 1867년에 러시아로부터 심각하고 고민스러운 제의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알래스카 지역을 미국이 구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알래스카」하면 앵커리지가 떠오르고 지하자원과 모든 자원의 보고라고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눈으로 덮인 나라, 그리고 아무 쓸데없는 땅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지출되는 경비가 쓸데없는 낭비로만 보이는 그런 땅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라 미국의회나 정치가들이 이 제안 자체를 받아들이도록 두질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땅은 구입할 가치도 없고, 필요도 없는 땅이라고 할 때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이 땅을 구입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이 땅을 구입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720만불이라는 적은 돈에 구입하고 맙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이 땅은 버려진 땅, 눈으로 덮여진 땅이 아니라 눈 속에 숨겨져 있는 보배로운 땅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엄청난 지하자원, 관광자원, 그리고 임업자원 군사적 요충지로서 미국을 풍요롭게 하는 땅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한 시대 한 사람의 결정이 후손들과 세계 역사에 미치는 그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크게 보아 나라를 두고 이야기했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혼자 어딘가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물려받아 그것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 동안이라는 교회 공동체와 한국이라는 민족 공동체는 조상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원하든 원치 않던 이웃들과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됩니다. 내 맘대로 살 수 있지만 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웃과 후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 갈렙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출애굽을 기록하면서 전개학자들이 부각시켰던 모세와 여호수아의 이미지에 가려 갈렙은 예리한 전개학자의 눈으로부터도 가끔은 소외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갈렙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웃과 후손들에게 우리도 아름다운 영향력,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나의 삶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사건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고 있는 심각한 위기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복 사업을 끝내고 땅을 분배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땅을 분배할 때, 서로가 좋은 땅 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긴장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해주신 대로 제비뽑기도 하고, 인구 숫자대로 나누기도 하는 중에 어느 누구도 갖길 원하지 않는 땅이 있었는데, 그 땅은  크고 장대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아낙자손이 거하는 헤브론 땅이었습니다. ‘저 땅만 걸리지 않았으면…….’ 전부 다 마음속으로 조마조마 할 때 무려 보통 사람들보다 20살이 나 많은 갈렙이라는 사람이 나섭니다. “다 싫어하는 저 헤브론을 우리에게 주시오” 그러면서 얘기합니다.

“지금부터 45년 전 가데스 반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 12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서 지도자 모세에게 보고했을 때에, 백성들은 전부 다 간담이 서늘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 여호수아도 함께 들었던 것과 같이 모세가 ‘네가 밟는 땅은 내가 주리라’ 약속했기 때문에 내가 밟는 땅, 저 헤브론은 나에게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하면서 땅 분배에 대한 문제가 풀려져 가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 단순한 사건을 통해 갈렙이 어떤 유산을 남긴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면서, 말씀 속에 주시는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갈렙은 영적인 유산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영적 영향력이라는 것은 그 시대 뿐 아니라 후대 오늘 우리에게까지도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 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의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약속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고 붙들고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말이 쉬워 45년이지-아니 일평생이지-, 이루어지지 않을 꿈과 같은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얘기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10절에 자신을 85세라는 나이까지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다고, 자신의 과거를 해석합니다.

영적인 유산이라고 말할 때, 이렇게 규정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어떤 일에 영적인 가치를 아는 사람, 영적인 유산을 남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갈렙은 12절에 구체적으로 그 날 그리고 이 산지라고 하면서, 헤브론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설교학자인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갈렙이 아마도 헤브론을 정탐할 때에 정탐꾼들을 권면해서 이 헤브론 땅에 꼭 가보자고 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 다음에, 그의 가슴속에서는  헤브론이 떠나지 않았고, 가슴에 품고 지내 왔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유일한 땅이었습니다. 헤브론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 요셉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즉, 갈렙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믿음이 시작된 곳, 우리의 꿈이 시작된 곳, 우리의 비전이 시작된 곳, 우리의 여행이 시작된 곳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중에서도 핵심이 바로 헤브론 땅이었습니다. 땅이 갖는 단순한 위치 아닌, 영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시작된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 그 땅은 크고 장대한 백성이 있었기에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갈렙은 헤브론을 가지고 싶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분명히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땅의 영적인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여호수아 20장 7절과 21장 13절에 보면 갈렙이 이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을 도피성으로 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재개발 하려고 하거나, 정부에서 농지를 구입해 무엇을 해 보겠다 할 때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불도저 밑에 누워 ‘밟고 지나가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조상들의 생활 터전으로 보이지 않는 언약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바쳐 얻은 땅을 내 놓으라 하면 쉽게 내놓을 수 있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내어놓습니다. 도피성, 하나님께서 이 성을 세우시고 억울하게 죽임 당할 사람들이 이 성을 통해 보호받고,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 영적인 회복을 이루도록 헤브론 땅을 ‘네가 가진 땅에서 내어 놓을 수 있느냐?’ 고 주님께서 질문하실 때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하나님의 사람인 레위자손이 달라고 했을 때도 주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용납하고 하나님과 만나게 하는 레위자손이 거하도록 내어 달라고 때, 유다지파의 갈렙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내어 주고 자기는 주변에서 머물렀습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까? 영적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차지해야 할 땅이 아니라 나보다 주님께서 더 필요로 하신다면, 주님께서 원하셔서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땅을 내어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갈렙은 생각했습니다. 영적인 가치를 아는 유다지파 갈렙의 후손에서 다윗이 나왔고, 바로 메시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갈렙은 정말 영적인 것의 가치,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기도와 말씀, 예배의  중요성, 우리가 드리는 헌금과 찬양의 영적인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영적인 유산을 물려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유산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어떤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까? 갈렙이 헤브론 땅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것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 된 나를 정죄치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나를 부르시고, 품으시고, 죄인이나 노예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내 자녀로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 삶의 다양한 인생의 광야-때로는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기갈과 기근의 순간도 있습니다-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거하시겠다고 그리고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약속 따라 나갈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 많이 있지만 내 하나님 집에서의 맡은 사역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영적인 유산과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다음에 영적이란 말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온전히’라는, ‘전심으로 주님을 섬겼다’는 뜻으로 8절과 9절, 14절, 3번이나 짧은 본문 속에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삶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순종하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나누어진 때도 없습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것을 한번도 억지로 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섬긴 마음의 자세,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태도가 중단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걸어간 갈렙이 영적인 사람이요, 영적인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이어라는 사람은 갈렙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공격과 후퇴, 수많은 죽음들, 백성들의 불평과 고역의 와중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고, 다른 지도자는 알지도 못하고, 다른 음성에는 귀 기울이지도 않고 견고한 목적을 붙들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거스르는 무모한 무리들에게도 휩쓸리지 않았고, 미리암의 가득한 질투의 앙갚음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모압 여인의 간계에도 유혹 당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영향력은 여호수아 마지막 장인 24장 24절에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라는 공동체의 고백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헤브론을 정복하고, 드빌이라는 땅을 점령할 때 젊은이를 향해서 “나와 함께 믿음으로 이 땅을 가는 사람에게 내 사위로 삼겠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선발된 젊은이가 옷니엘이라는 젊은이입니다. 믿음으로 땅을 정복했기도 하지만 옷니엘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 혼란의 시기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을 도탄으로부터 건졌던 첫 번째 사사로도 유명합니다. 즉, 갈렙의 그런 신앙의 모습이 사위에게도 전해져, 사위가 어두운 시대에 영적인 밝음을 비춰내는 자녀로서 아름답게 자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9세기를 선교의 부흥의 시기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19세기를 선교의 부흥이 되도록 밑거름 역할을 하며, 불 질렀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24살 때 선교에 뛰어 들어  29살인 1747년에 세상을 떠난 이름 없는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에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선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교하면서 결핵에 걸려 병을 앓으면서 선교했습니다. 그는 선교사(史)에 크게 업적 남긴 것도 없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회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남긴 것이 있다면 인디언과 선교하면서 남긴 짤막짤막한 일기 몇 장과 글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교를 하다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 생애의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가 미국의 초대 프린스턴의 총장이었던 조나단 에드워드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출판되면서, 브레이너의 생애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선교를 향한 간절한 하나님의 사모하는 마음은, 인도의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던 윌리엄 케리의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헨리 마틴의 마음을 자극했습니다. 짐 엘리어드의 결단을 일으켰습니다. 젊은이들 가슴속에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 용기와 힘을 준, 영적인 유산으로 그들을 공급했던 이 사람은 자기가 죽기 직전에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여기서 죽게 될 거야. 그리고 이곳에 묻히게 될 거야. 그럼 너희들은 내 무덤을 보겠지……. 그 때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준 이야기를 기억해 다오. 나는 영원한 세계로 가게 될 것이야. 아! 부정한 자로 태어나서 감히 영원한 세계를 이야기 할 수 있다니……. 나는 영원에 대하여 말하고 생각할 자격이 없는 몸이지. 너무나 그런 엄청난 일이니까 너희들은 내 무덤을 볼 때마다 내 생전에 한 말을 기억하겠지. 그때 너희들은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이 죽음 앞에 서서, 너희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고, 어떻게 경고했나를 생각하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무엇에 초점이 있습니까? 우리의 의식과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간직하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땅의 것에 취해서, 더 귀하게 여기면서 영적인 것을, 땅의 썩어질 것으로 바꾸어 가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몇 년 전 영국 주간지인 브리티시 위클리 신문에 어떤 사람이 투고한 글로 인해서 많은 물의가 빚어졌다고 합니다. 그 곳에 실린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30년 이상 교회를 거의 빠짐없이 다닌 사람으로 3000번 이상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난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개의 설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아서 목회자들이 설교 말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력을 더 투자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기사가 나가니까 여기저기에서 막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나는 말이야, 성전 문 밖에 나가면서 설교가 뭔지 잊어버렸어.”

지난 주 설교제목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기 어렵지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 설교 준비한다고 엄살떨면서 말이지, 우리 귀에는 하나도 남도록 하지 낳고, 인생에 유익 주지도 않고……. 뭐, 내가 그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내가 기억해서 설교를 제대로 설교 써먹을 수가 있냐고......” 공감하실 수 있으시지요? 그런데 몇 주 뒤에 한 사람이 말함으로 이 논쟁은 끝이 났습니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 된 사람으로, 그 동안 32850번의 식사를 했다. 대부분 아내가 요리해서 차려놓은 식탁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많은 음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내가 먹은 음식의 식단을 정확하게 한 가지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나에게 그 음식물이 없었다면, 나는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말씀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처한 삶의 순간순간마다 주신 하나님 말씀으로 그리고 영적인 유산으로, 오늘날까지 살아 왔던 것은 잊어버리고, 땅의 썩어질 것에 초점을 두며 살아간 우리의 빗나간 관심들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여러분 영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더 근원적이고, 더 근본적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는 뭐라고 회상할까요? “우리 엄마는 결혼 할 때, 임대 아파트에서 시작해서, 30대에 24평, 40대에 33평, 50대에 52평, 60대에 드디어 단독주택을 사다가 일평생 평수만 늘리다 죽었노라.”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처음엔 친구들 결혼식에 갑니다. 조금 더 살면 친구들 돌잔치에 다니지요? 그 다음에는 그 친구들 아버지, 부모님 환갑잔치에 다닙니다. 그리고 친구들 아버지 장례식에 다니기 시작하다가, 친구들 자녀들 결혼식에, 친구들 환갑잔치 다니다가, 친구들 죽었다는 소식 듣고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인생 끝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한순간 있다가 없어지는 아침 안개와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아! 저 인간을 만났기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했어.”, “저 사람을 만났기에 내 인생의 꿈이 깨졌어.” 하지는 않을까요? 아니면 여러분을 기억하면서 “저 분으로 인해서 난 천국의 소망을 얻었어.”, “저 분으로 인해서 내 인생이 가장 곤고하고 어려울 때, 정말 소중한 것을 깨달았지”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무덤 앞에 찾아온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오늘 동안지에 한 군대 간 형제가 자기 어머니의 무덤을 생각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시간 나면 이 글을 한번 읽어 드리고 싶었는데, 형제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것과 어머니가 남겨준 아름다운 마음의 유산을 간직하고 회상하며 쓴 글이 굉장히 감동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동안교회를 기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할까요?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사는 교회라고 할까요? 어둠의 역사 가운데도 약해지지 아니하고 비전 향해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수많은 꿈쟁이들이 모인 곳, 그리고 꿈을 나누는 즐거움이 가득 찬 교회,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꿈꾸고 또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갈렙이 남긴 유산은 건강한 감성적인 유산이었습니다. ‘하늘 유산’이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은 감성적인 유산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건강한 감성적인 유산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유산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마음이 항상 안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고난과 어려움과 감당하기 어려운 일, 실패가 우리 인생 속에 찾아올 때 흔들립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분노가 찾아오게 되고,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런 감성적인 유산을 가진 사람은 위기가 닥쳐와도 불안과 두려움을 잘 극복하면서 오히려 담대하게 헤쳐 나갈 용기와 힘을 갖게 되는데, 그 유산을 갈렙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남겨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가데스 반야에서 자신과 함께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과 백성들이 얼마나 놀래고 두려웠는지 간담이 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간이 녹을 정도로 두렵고 무섭고 소름이 오싹 끼쳤을 것을 상상해 보세요. 삶의 터전 버리고 출애굽 해서, 꿈이 보이는 땅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약속의 땅에는 능히 점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애굽보다 훨씬 더 강대한 백성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덜덜 떨었습니다. 두려워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축복을 축복으로 보지 못했고, 새 날을 새 날로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복된 약속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냉동고에 갇혔는데, 3일 뒤에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얼어 죽은 것이 아니라 심장 마비로 죽었던 것입니다. ‘내가 냉동고에 갇혔구나. 이제는 몸이 점점 얼어 오겠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질려서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나님의 약속된 그 빛을 따라가는 길을 차단시킵니다. 우리로 나라는 사람이 누군인지 정체감을 잃게 만듭니다. 내가 왜 약속의 땅에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두려움인 것입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실패와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는 어릴 때 하던 행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심리학적으로 이것을 퇴행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 갈렙은 이렇게 외칩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좌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두려움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던 그 가나안 땅, 그 중에서도 바로 두려움의 요인이 되었던 아낙자손이 거하는 헤브론 땅을 남겨 놓고 있으니, 이 땅에 가기를 전부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습니다.  한 번 실패했던 곳, 이미 한 번 상처를 받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유리판 같아 한 번 깨지고 나면 회복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떤 모임에 가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더니, 몇 사람이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얘기를 해서 오늘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다섯 살인가, 어느 날 밤 엄마와 아빠가 몹시 심하게 다투고 있을 때, 문득 엄마가 나를 가리키면서 ‘저 애가 없었더라면 당신하고 벌써 이혼했을 거야’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후로 제 마음속에는 ‘나만 없으면 우리 엄마, 아빠는 행복하겠구나. 나는 엄마의 행복을 막는 존재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몹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집은 딸이 넷인데,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엄마하고 다투면서 ‘저 아이는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하며 한숨을 쉬시고는, 담배를 태우면서 속상해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내 맘속에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가정에서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들 앞에 설 때, 자신감이 없고, 어떤 모임에서든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내 마음에 떠나지 않습니다.”

“어느 겨울날 햇볕이 내리 쪼이는 담벼락에, 헤어진 양말 사이로 나온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무표정하게 쪼그려 앉아 있는 내 자신을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난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혼자였고, 친구들도 나와 같이 놀아 주지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도 나와 함께 지내지 못했습니다. 난 항상 외로웠고 슬펐습니다. 지금도 난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들이 많지만, 그 외로움과 슬픔은 제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혼자 서럽고 외로워서 울 때가 많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들이 많을 줄 압니다. 어릴 적에 들었던 말 한마디, 겪었던 상처들 말입니다. 저는 찐빵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제가 지냈던 곳이 강원도 산골짜기인데, 저희 교회 집사님이 안흥찐빵 같은 것을 쪄서 밤에 찐빵 장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 무슨 간식이 있습니까? 그 집에 가면 한 개 주겠지 하고 기대하며 있는데, 무럭무럭 김나는 찐빵을 찌면서 한 개도 안 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찐빵을 주지 않던 그 때의 모습과 표정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상처가 되어 지금도 찐빵만 보면 먹다가 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입은 정서적인 상처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 모릅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그런 상처 때문에 오늘 자신의 인생을 밝게 살지 못하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두려워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꿈꾸는 땅을 바로 앞에 두고, 옛날 과거의 실패와 아픔 때문에 좌절하고 있을 때, 갈렙이 나타납니다. 갈렙의 인생 속에도 두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나도 전쟁에 있어 유다 지파의 장으로 수 없이 많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상에서 살았다. 광야의 어려움, 두려워 할 많은 일들이 인생 속에 찾아 왔지만, 지금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말씀대로-이 구절이 본문에 다섯 번 이상 나옵니다- 이루시리라 의지하여, 환경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걸 듣지 않고 말이야 약속의 말씀 가슴속에 새기면서 다른 약속 다 버리고, 내 앞에 있는 현실을 한 걸음 한 걸음 이겨온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단 말이야. 과거에도 함께 하신 하나님, 아낙자손이 있는 저 산지도, 내가 밟는 땅 주신다고 약속하신 여호와의 약속과 말씀을 따라 여든 다섯 살 된 비록 힘없고 늙은 모습이지만, 나는 오늘 이 두려움을 극복해 나갈 거야!”

젊은 세대 앞에 담대하게 외칠 때, ‘그렇지! 저거야 우리가 연약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때, 하나님 말씀대로 했을 때 우리는 승리하고 지금까지 이겨 왔던 거야’ 하는 용기가 다시 일어나면서 정복사업을 계속해서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원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 우리교회 권사님들, 우리 안수집사님들이 인생살이 시작하다가 좌초에 걸려 두려워하고 실패와 낙담 가운데서 고개를 떨구고 다니는 사람들,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지, 하나님이 죽으셨는지,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지 하고 의심하는 우리의 젊은이를 향해서 어깨를 툭 한번 치면서 “너 두려움이 많았겠구나, 나도 어려움이 많았지, 혈혈단신으로 피난 왔을 때 누구도 나를 돌봐 주지 않았어. 정말로 외로웠지……. 그러나 그때 나는 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두려움을 이겨왔어. 형제여! 지금 당신에게 있는 어려움 속에 묻히지 말고 두려움을 통해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오.  그것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나의 비결이오.” 격려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 줄 수 있다면 좌절과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에 의해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며 어둠의 골짜기를 묵묵히 지나 승리하는 성도들의 발걸음이 넘치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유산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끝없이 다가오는 어려움 앞에 말씀을 의지하여 극복하리라 용기를 보여주었던 연로한 한 늙은 지도자 갈렙은 그러나 누구보다도 젊은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인생살이 힘들고 어렵지만 믿음 붙들고 살아온 사람의 간증을 들을 때 우리 속에 다시 용기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 유산을 물려 줄 수 있는 교회, 그 교회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교회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기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고, 그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갈렙이 남긴 유산은 아름다운 섬김의 유산이었습니다. 9절 말씀에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나의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은즉 내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2절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나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쫓으리이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몇 가지 위기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하면 출애굽하고 난 후, 둘째는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었을 때 이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가 더 중요한데, 능력의 종 모세가 죽자 이스라엘 공동체는 위기 속에 빠졌습니다. 다음으로 세 번째 위기는 땅 분배 때의 위기였습니다. 땅 분배를 잘못하면 지파가 분열되고 나눠집니다.

위기 앞에서 갈렙은 사람이 세운 숫자대로 제비뽑기 하는 것을 넘어, 믿음의 원칙을 제시했던 겁니다. 제비뽑기의 숫자대로 했지만 자신은 믿음을 따라 난공불락의 요새, 저 헤브론 땅을 차지하겠노라 라고. 만약 그 비옥한 땅이 이미 정복이 되었다면, 갈렙에게  전부 돌멩이를 던졌을 것입니다. 자기들도 가기 싫어하는 그 땅을 갈렙이 달라고 하니까 바로 여기서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공동체가 가장 골치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짐을 유다와 유다지파가 안았던 것과 같이, 갈렙과 유다지파가 다시 공동체를 섬깁니다.

게다가 갈렙은 여호수아를 섬겼습니다. 갈렙은 야전군 사령관이었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갈렙과 여호수아라고 나오지, 여호수아와 갈렙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쓴 사람들과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여호수아는 그저 모세의 비서실장 역할로 인식될 때 갈렙의 이미지는 훨씬 더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차기 대통령에 누가 당선 되느냐고 할 때, 비서실장이라고 하는 옆에서 돕던 사람의 이미지는 약합니다. 그러나 야전군 사령관은 이미지가 아주 강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지도자로 갈렙이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여호수아가 되었을 때, 갈렙을 따르던 아마도 많은 추종자들이 뭐라고 이야기 했을까요? 갈렙은 그 사실을 엎을 수도 있는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세워 주는데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 따라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를 돕고 말없이 뒤에서 섬겼던 갈렙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땅 분배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위기의 순간에 가장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를 차지하겠다고 말하면서,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건강하게 세워주는 갈렙에게서 끝까지 섬기는 숨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뭐 나서는 거 싫어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만 갈렙은 나서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뒤에서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여호수아라는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하기 위해 여호수아의 뿌리가 되었고, 여호수아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될 때 철저히 나섰고, 서야 될 때 섰고, 멈춰야 될 때 멈췄습니다.

여러분 각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사명 말입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내 옆에 앉은 사람 나는 비록 잘 모르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보내신 목적 이룰 수 있도록, 뒤에 숨어 그를 섬기며, 아름답게 세워질 수 있도록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 가지고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이 자리는 기쁨의 자리가 됩니다. 섬김의 자리가 됩니다. 감사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을 짓밟고라도 내가 일어서겠다는 마음이라면, 이 곳은 살벌한 장소로 변하게 됩니다.

땅 분배하는 이해관계 앞에서 얼마나 민감합니까? 저는 길지 않은 목회를 했지만, 자기 이해가 얽혀있을 때도 신앙적인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더불어 돈지갑이 회심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심이 되지 않는다고.

1987년도 군사정권이 끝나고 노태우씨가 나왔을 때, 국민들이 김영삼씨와 김대중씨에게 단일 후보 내라고 얼마나 요구했었습니까? 민주화 때문에 죽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핏자국을 정말 기억한다면 단일 후보를 내어야한다고. 두 사람은 결국 이해관계 앞에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바뀌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이익이 좀 되면 양보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붙들고 늘어지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이러한 태도는 없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전부 뒤로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님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하나님의 영광 드러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여 상대방을 세워주고, 하나님의 계획이 올바로 설 수 있도록 섬기는 섬김의 유산이 많은 교회가 든든히 서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고,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알래스카 땅으로 인해서 누리는 축복, 우리 선조의 믿음의 핏자국 위에 오늘날 누리는 교회의 풍성함…….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기 원하십니까?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 붙들기 위해 때로는 처절할 만큼의 고독한 길도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그 사람, 그런 사람이 많이 모여 이 땅에서 어둠의 역사를 밝혀 나갈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교회가, 저와 여러분이 꿈꾸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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