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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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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마 25:31-46
제 목 :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2002년 12월22일)
설 교 : 백봉태 목사 (연희교회)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믿음의 요소를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이웃들과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행실을 통해서도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교리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신득의의 교리는 자칫 잘못하면 오용이 되거나 오해를 불러올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만 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의 삶과 행위 속에는 무언가 구원받은 자의 특성이 나타나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번째 비유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비유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31절에 보면 예수님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 재림하실 때의 실제적 상황을 묘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좌’라는 말은 왕이 앉는 자리를 말하며 인자가 보좌에 앉는다는 의미는 심판주로 재림하신 예수님이 이제 왕권을 행사하시기 위하여 왕의 자리에 앉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날에 영광 중에 재림하신 주님은 모든 민족들을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낮에는 수백 마리의 양과 염소를 함께 들에서 방목을 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양과 염소의 무리를 우리에 집어넣되 반드시 양과 염소를 분리해서 각각의 우리에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양들과 염소들의 외모는 우리 일반인들이 보아서는 잘 구별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숙련된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정확하게 구별해서 각각의 우리에 들어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에 있는 교회 안에는 참으로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져 있습니다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주님께서는 정확하게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거짓된 백성들을 가려내실 것이며, 참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실 것인 반면 거짓된 자들은 영벌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처럼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거짓된 백성들을 구별하실 때 그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작은 자들을 섬기되 주님을 섬기듯이 섬겼는가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5절과 36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 의인들은 깜짝 놀라서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우리들은 주님을 친히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주님을 그처럼 섬겼다는 말입니까?” 하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자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 40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예수님은 대답을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 것은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이 다시금 가난하고 병든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처럼 주리고 목마르며 옥에 갇히고 병들었던 작은 자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의인들이 그런 작은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행을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처럼 사랑과 선행을 실천한 것이 주님께 대한 순종의 마음과 사랑의 반영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해서 혹 교회를 다니지 않으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려운 이웃들을 많이 돌아보고 자선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하면 그들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의인들을 양이라고 비유로 묘사한 것은 그들은 이미  목자이신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처럼 하나님의 양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외적인 표징이 무어냐 하면 자기 주변의 작은 자들을 섬기고 돌보되 주님을 섬기듯 했다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인들은 자기 주변의 힘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처럼 약한 자들을 먹이고 돌아보고 사랑을 베푼 것은 그들 자신이 원래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도덕 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이웃들의 아픔과 연약함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자기들의 죄를 담당하고 죽어 주심으로 자기들이 구원받은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그런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무언가 보답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자기들도 이웃들에게 실천을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행한 사랑과 섬김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이웃들에게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듯이 나도 이웃을 불쌍히 여길 마음을 갖게 됩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고자 힘씁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존재 특성이며 삶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인들의 또 한가지 특징은 그처럼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섬기며 베푸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고하고 어떤 공로 의식이나 자랑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보고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느니라”고 할 때 그들은 “아니요.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습니까 ?”하고 겸손하게 자기들의 행한 것을 감춥니다. 바로 이런 특징이 참으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의인의 특징인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영영한 지옥 불에 들어가라”고 심판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들 이웃에 주린 자가 있고 목마른 자가 있고 나그네가 있고 병든 자가 있어도 그들을 주님을 섬기듯 섬기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나름대로 교회 생활은 잘 했는지도 모릅니다. 구약 식으로 한다면 절기 때마다 성전에 나가 정성껏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만하면 하나님께 종교적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비록 남의 것을 훔치거나 강탈하거나 간음을 하는 등의 악한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마땅히 돌아보아야할 연약한 이웃들에게 주님이 자기들에게 맡겨 주신 달란트들을 사용해서 섬기며 베풀지를 않고 자기들의 삶에만 몰두하며 안이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주님의 구원하신 은총과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이웃들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없었다는 것은 곧 그들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었음이 주님 앞에 섰을 때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주변에 부잣집 대문에 누워 있었던 나사로와 같은 연약한 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음소리와 고통의 울부짖음이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양처럼 생긴 염소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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