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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널리 펼쳐야 할 사랑 이야기 /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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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 널리 펼쳐야 할 사랑 이야기 (요 3:16,)
이름: 이한규목사 ([email protected])       


< 기독교는 주는 종교입니다 >

이런 만화가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프로포즈하는데 여자가 거절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종교가 달라서 안돼요. 저는 돈을 믿는데 당신은 빈털터리잖아요." 이 여자의 모습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부작용이 많습니까? 지금 현대 사회의 가장 무서운 질병은 에이즈가 아니라 물질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소유가 목적이 되는 삶을 살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에 대한 3가지 큰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 이 말씀은 우리가 돈이나 소유가 없어야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돈을 쌓아 두지 말라!"는 말은 "돈을 벌면 안된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이 영성을 얻는 수단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인물들 중에 엄청난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욥, 아브라함, 이삭, 요셉,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사람들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둘째, 이 말씀은 우리가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래의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은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는 믿음이 없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을 잘 관리해야 할 청지기들이기에 그 선물들을 현명하게 잘 사용하려는 계획성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이 말씀은 우리가 돈으로 즐기지도 말고 좋은 것을 취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리는 삶은 죄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말을 좋은 집에서 살지도 말고, 영화 보러 가지도 말고, 여가생활도 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복과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을 삶의 제일 중요한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을 좋은 데에 쓰지 않고 자기만 위해 쓰고, 또한 쌓아두기만 하면 그 물질은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최고인 줄 아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지만 지혜는 살 수 없고, 음식은 살 수 있지만 구미는 살 수 없고, 미모는 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살 수 없고,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고,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고, 화려한 것은 살 수 있지만 문화적인 것은 살 수 없고, 쾌락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고, 종교는 살 수 있지만 구원은 살 수 없고, 여권은 살 수 있지만 하늘 나라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돈을 우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돈이 어디 쓰이도록 하는지를 보면 "우리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가?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질은 어떤가? 우리의 사람됨은 어떤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드리는 삶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급변하는 세대 속에 살고 있지만 '예배하는 삶'과 '드리는 삶'은 우리의 삶을 안정시켜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삶은 우리가 물질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선언하는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

우리는 기독교를 해결 받고 요구하고 하는 차원의 종교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받으려고 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주려고 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뻐하느냐?" 하는 차원의 종교입니다. 이제는 간증도 "기적적으로 받았다!"는 간증보다는 "기쁘게 주었다!"는 간증이 더 많아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뻐하느냐?"에 따라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물질보다 영혼을 사랑하고,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삶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가장 소중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이라는 말은 사랑의 위대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처럼 사랑했다"는 말씀의 핵심은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너무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도토리 씨앗을 땅에 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씨앗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와 햇빛을 주셨고 그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썩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죽이셨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겠습니까? 차라리 썩은 나무를 짤라버리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는 10살 많은 한 매형이 인천에 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참 개를 좋아했습니다. 특별히 진돗개를 좋아했습니다. 힘이 있고, 충성스럽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하니까 아주 반했습니다. 그래서 진돗개를 기르는데 그 진돗개 이름이 '백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매형에게 흰색 푸들 한 마리를 주어서 그 집에 개 한 마리가 더 생겼습니다. 그 푸들 이름이 '린다'였습니다. 개를 좋아했던 매형은 실내에서 키우는 린다도 마당에서 키우는 백구만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매형 집에 자주 들렸기 때문에 린다가 어릴 때부터 커 가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습니다.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저도 린다가 예쁘고 귀엽게 생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예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린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점차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도 교만해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확실히 눈에 띄게 교만해진 행동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매형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를 끔찍하게 위해주는 매형에게 딱 달라붙어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 개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인데 저렇게 주인 믿고 까불다가는 언젠가는 다치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형의 딸아이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을 줄 알았는데 점차 심하게 되었습니다. 딸을 위해서 시간을 더 내야 했습니다. 가정 환경도 깨끗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개털도 날라 다니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자 끔찍하게 예뻐해 주었던 린다도 금방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린다가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예뻐해 주어도 사랑하는 자녀와 어찌 비교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개를 위해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하게 만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그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주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1986년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저는 엄청난 월급을 받고 감격했습니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쓸까?"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월급을 받으면 저축을 하고 결혼 준비를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할 줄 몰랐습니다. 결혼은 그냥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저축하지 않고 열심히 썼기에 1년 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직장을 그만 두었을 때에는 퇴직금 외에는 거의 한푼도 없었습니다. 남자가 가정을 이룬 것도 아니고, 술담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옷을 사 입는 것도 아니고, 사치스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겠습니까? 거의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다 썼습니다. 저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제일 앞서서 낼 줄 아는 선수(?)'였습니다.

결국 미국에 갈 때에는 모은 돈이 없어 퇴직금으로 비행기표를 마련해서 갈 수 있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교회에서 파트타임 전도사로 사역하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등록금과 숙식을 스스로 조달해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면서도 '내는 버릇(?)'은 여전했고, 섬기는 교회가 건축할 때에는 한 학기 등록금을 다 내버리고, 방학 때가 되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하면서 다시 등록금을 마련해 신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니까 결혼 준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992년 32세에 결혼할 때에도 돈 한 푼도 없이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결혼생활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돈 때문에 아내와 갈등을 일으킨 적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저축은 하지 못했지만 남편으로서 가정의 재정적인 책임은 한치도 소홀함이 없이 졌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식구들에게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고 있습니다.

항상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기회는 있었습니다. '내는 손'만 잘 조절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저도 안전을 좋아합니다. 윤택한 목회의 길을 떠나 어려운 목회의 길을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내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살면서 수많은 기쁜 일들이 있지만 '내는 것'만큼 기쁨을 주는 일은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물론 내는 삶을 살려면 내 안전을 걸어야 하지만, 내 안전을 걸었을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더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내는 버릇을 고치지 않을 것입니다. 식당에 가면 제일 안 내는 사람 1위가 목사이고, 2위가 교사이고, 3위가 법조인이라고 합니다. 항상 대접받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왜 목사가 대접만 받아야 합니까? 저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대접할 것입니다. 대접하는 기쁨을 다 빼앗긴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주는 기쁨, 내는 기쁨만큼 큰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 기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쁨을 위해서는 저의 안전을 충분히 걸 각오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회하는 교회를 위해, 교인들을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친척들과 친구들을 위해 항상 기쁘게 주려고 할 것입니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주는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인터넷 사역을 이제까지 꾸준히 하고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돈 이상의 귀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제가 주는 삶을 위해 애쓰고 있을지라도 저의 자녀들만은 결코 줄 수 없습니다. 저는 두 명의 소중한 딸이 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할 때 그들이 살 수 있다면 기쁘게 제가 대신 죽겠다고 할 것입니다. 제가 주는 것을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저는 저의 두 딸만은 어떤 선한 일을 위해서라도 죽음에 내어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틀 전에 이 '주는 삶'을 묵상하면서 두 딸을 줄 수 없는 저의 모습을 보고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이 얼마나 새롭게 부딪쳐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 아들이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긴급히 피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헌혈을 자원했습니다.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필요한 만큼 피를 뽑으세요. 저의 생명이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들만은 꼭 살려주세요." 아들이 사는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정말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8년 전 성탄절 전날 아침 11시에 인천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난 첫 딸 은혜를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이처럼 사랑하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2년 동안 개척교회를 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을 보면서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정도까지의 사랑의 감정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첫 딸 은혜를 보고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깊이를 처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침대에서 자는 두 딸의 모습을 보면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는 그 사랑이 샘솟는 것 같습니다. 자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들뜨고, 너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 두 딸을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죽음에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처럼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가장 위대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사랑의 싸인이고 키스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이 없이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없이는 결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소중한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남아메리카 선교사 폴 브레이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우리는 애완동물을 돌보는 것과, 개와 고양이의 음식을 위해 쓰는 돈이 선교에 쓰는 돈보다 많다. 진정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진정 하나님을 믿는 분들입니까? 그렇다면 세계 선교의 필요성을 이해하시고, 세계 선교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지금 세계에서 복음을 접하지 못한 종족이 1700종족이 있습니다. 1700종족이라고 하니까 적은 것 같은데 인구로 말하면 세계 전체 인구의 약 40%입니다. 20억 이상의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세계선교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서 약 20만 명의 새로운 선교사가 필요하고, 현재보다 5배의 선교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더 드리는 것을 배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 통계입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약 20억 달러의 돈을 세계 선교에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매년 장난감을 사는데 150억 달러를 사용하고, 음료수를 마시는데 490억 달러를 사용하고, 패스트푸드를 먹는데 790억 달러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 통계를 보면 드리는 삶이 너무 기근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사랑을 아는 자라면 세계 선교를 위해, 또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것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 어떤 미국 목사님 간증을 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분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그분의 아버지는 인디아나 근처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버스에서 자리를 항상 양보해주었던 고등학교에 다니는 누나에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가끔 팔로 그분을 안아주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 느낌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분은 그 누나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누구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나요?" 어머니는 사랑은 종종 반지를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웃을 위해 일을 해주고 1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1달러를 5센트 짜리 동전 20개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근처 상점에 있는 풍선껌 기계로 갔습니다.

그 풍선껌 기계에는 예쁜 반지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반지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동전 하나를 넣었습니다. 그러자 풍선껌이 하나 나왔습니다. 풍선껌을 씹었습니다. 또 다른 동전을 넣으면서 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반지를 나오게 해주세요." 그러나 역시 풍선껌만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나온 풍선껌을 씹느라고 입을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입 안이 풍선껌으로 가득 차서 기도도 할 수 없었고, 너무 슬퍼서 울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애틋한 마음을 아셨습니다. 결국 19번째 동전을 넣었을 때 반짝이는 새 반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그분은 버스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 힘들었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해서 문이 열렸을 때 그분은 바로 버스로 뛰어들어서 항상 앉던 자리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반지를 그 누나의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반지가 약간 작아서 끼우는데 힘들어했지만 누나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지를 똑똑히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끔 저에게도 생활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신기하게 누군가를 통해서 그 위기를 극복하게 하시고 믿음의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저와 제 아내는 소리 없이 사랑을 표현하시는 그분들의 친절한 행동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을 대하면 마음에는 새로움으로 가득 찹니다. 목회의 보람이 납니다. 물질을 이리 저리 돌리시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런 사랑을 받으면 저도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진짜로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느 누구든지 누군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은 그 사람들을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주는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사랑의 선물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위대한 교훈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열심히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격려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그런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생긴지 얼마 안된 크지 않은 교회이지만 마음만은 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누구보다 선교와 구제를 많이 해야 합니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우리가 도와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며칠 전 몽고의 임준호 선교사님과 김재호 선교사님이 성경훈련 센터 건물 얻는 문제를 위해 기도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 기도제목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황수 선교사님의 갑상선 암 치료비와 1년 생활비 부족분이 약 2천 불 정도 된다고 합니다. 황수 선교사님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어려운 혼혈아 교육사역을 하시는 강영철 선교사님도 한 사람의 1년 교육비만이라도 담당해줄 것에 대해 기도요청을 해왔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한 분이라도 그 기도제목에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3년째 오신 서한철 목사님이 1월 20일 삼성 서울병원에서 직장암 수술을 하는데 수술비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돕는 손길이 있기를 바랍니다.(인터넷 식구들 및 목사님들 중에서도 마음에 감동이 있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017-705-4347 이한규 목사님)

여러분! 이제 주는 삶을 새롭게 각오하고 한번 힘써 실천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주는 삶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가장 위대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항상 주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더욱 자신의 영혼을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 가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널리 펴시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사랑의 교회)

< 후원을 위한 안내 말씀 >

금주 이한규 목사님 말씀에 은혜 받으셨습니까?
저희 요삼일육선교회에서는 이한규 목사님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 전파에 힘쓰고 있고,
여러 선교단체 및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있으며, 또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본 사이트 오른쪽 위 부분 '선교후원'난에 들어가 선교후원 회원으로 많이 가입해 주세요.
지금 10여명의 봉사자가 이 사이트 운영을 돕는데 이 일에도 참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세한 안내가 필요한 분은 연락주세요(031-715-4347, 4348 또는 017-705-4347)

< 다음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자세한 기도제목은 가끔 게시하겠습니다 >
C&MA 한인선교사 1 - 김사무엘(영숙) 목사, 한국 온누리교회(하용조목사님)와 선교협력
C&MA 한인선교사 2 - 임준호(정자) 목사, 몽고 교회개척, 신학교 사역
C&MA 한인선교사 3 - 김성수(경선) 목사, 일본인 교회개척 시무
C&MA 한인선교사 4 - 김진영(은경) 목사, 터키 투르크민족 교회개척, 신학교 사역
C&MA 한인선교사 5 - 황수(한나) 목사, 대만 원주민 교회개척 사역
C&MA 한인선교사 6 - 김재호(연희) 목사, 몽고 교회개척, 신학교 사역
C&MA 한인선교사 7 - 임병철(명희) 목사, 몽고 신학교 교수 사역(내년에 선교지로 떠남)

< 협력선교사님들 >
강영철(한국 혼혈아선교회), 권순구(인천 외국인교회), 김영칠(중국),
김정숙(월드 크리스챤 네트웍), 김학철(한동대,태국), 손영삼(그리스), 유재춘(중국),
이동구(중국), 이바울(중국), 정길진(월드 크리스챤 네트웍), 탁수연(이집트)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선교 후원회원으로도 많이 가입해주세요 )

< 선교사의 꿈을 가진 분들을 위한 안내말씀 >

미국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기독교선교연합회, 약칭 C&MA)에 의해 설립된 미국 최초의 신학대학(Bible College)으로 시카고에 있는 휘튼(Wheaton) 대학과 함께 미국 복음주의의 양대산맥으로 여겨지는 나약대학(Nyack Bible College)과 그 대학교의 신학대학원인 얼라이언스신학대학원(Alliance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공부해보세요.

C&MAhttp://www.cmalliance.org)는 미국 내에 2천 개의 산하교회와 20만 명의 성도, 전 세계에 3만 5천 개의 선교지 교회와 300만 명의 선교지 성도가 소속된 '세계선교의 비전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하는 교단'으로, 현재 미국에서만 전 세계로 12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입니다. 세계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이곳의 문을 두드려보세요. 저희들에게 전화를 주시면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한규목사 핸드폰(017-705-4347)
요삼일육선교회 사무실(031-715-4347)
한국 연락사무소(Nyack College Korean Liaison Office)
(Director 정길진목사(031-448-4686) e-mail address: [email protected])
C&MA 한국파견 공식선교사 김사무엘목사님
(한국인 1호선교사, 온누리교회(하용조목사님) 선교훈련원장, BEE 한국대표, 011-741-0250)

< 웹사이트 주소 >
C&MAhttp://www.cmalliance.org)
나약대학http://www.nyackcollege.edu)
얼라이언스신학대학원http://www.alliancesem.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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