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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라 / 호 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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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라 
> 설교자  :  황요한 목사 (평화의교회) 

본문: 호 2:8-13 (1월26일 설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번 주간에 설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명절을 맞이한 중요한 주간에 사랑하는 평안의 가정들 위에도 하나님 주시는 가정의 평안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안타까워하시고 답답해 하시는 부분은 오늘 8절 말씀 마지막 부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저가 알지 못하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함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해야 할 백성들의 삶이 바알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해야 할 성도의 모습이 아스다롯 앞에서 즐거워하며 축제를 벌이는 그러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분명하게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리고 그분을 따라서 함께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기쁨이라고 하는 것을 베드로는 짧지만 역사상 가장 간결한 문장으로 분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서 이런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는데 지금 이스라엘은 엉뚱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저희가 자신들에게 은과 금을 준 자가 바알로 기억하고 있고,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을 준 이도 바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2장 전반에서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를 따르리니" 왜냐하면 "저희가 내 떡을 주고, 내 물을 주고, 내 기름을 주고, 내 삶을 준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착각을 해도 지금 많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해도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연애의 경험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중매를 했더라도 결혼까지는 연애라고 하는 서로 사귐과 그것이 단순한 조화함의 단계를 넘어서 사랑함의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연애 감정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보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좋은 것들이 눈에 확대경처럼 돋보기처럼 그렇게 확대되어져서 보여지는 시기가 연애하는 시기입니다. 작은 것도 커보이고, 심지어는 약점도 좋아 보일 때가 연애할 때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랑하면 눈이 먼다'라고 말합니다. 정확한 심리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기 전에 좋아하는 감정을 가졌을 때 비판의 기능을 가지고 우리가 그 상대방을 잘 검토해 보고 기도해 보고 그리고 미래를 평생을 함께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그냥 연애과정으로 들어가면 그런 사람은 대부분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되고 평생을 안타까움과 속상함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 한 둘 낳아야 비판의 기능도 보이고 약점도 보이고, '이게 아닌데...' 하는 것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를 여러 가지가 얽어맵니다. 자식 때문에 갈라서기 어렵지요. 이제 양쪽 집안 때문에 '나는 남편의 사랑은 못 받아도 시어머니는 사랑해 주시는데...' 시어머니 생각하고, 아니면 친정 집안의 가문의 영광을 생각하고 체면을 생각해서 결단을 못 하지요. 사실은 결혼은 배우자의 사랑의 관계이지 시어머니가 사랑해주고, 친정 집의 체면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은 부수적인 것인데 그런 여러 가지 윤리적인, 환경적인 것들이 얽어매어서 결국은 그렇게 인생을 마치고 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 연애하는 자의 이 잘못된 판단은 평생을 그르치게 되는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바알을 연애하고, 아스다롯을 연애하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지금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전혀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떡도 바알이 줍니다. 물도 바알이 줍니다. 기름도 바알이 줍니다" 모든 것을 다 바알이 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스다롯에게 가서 말합니다. "술도 아스다롯이 줍니다" 우리의 쾌락과 즐거움과 행복, 이것은 아스다롯이 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질을 위해서 바알에게 절하고, 인생의 쾌락을 위해서 아스다롯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연애하는 자들이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연애를 하고 있으면 부모의 심정이 어떤가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통하지 않지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부모의 심정으로 그런 경험을 가진 분들은 지금 이 말씀이 훨씬 더 갑절이나 마음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 바로 그 심정,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그 감정, 아무리 호세아를 통해서 말씀을 주어도 이미 그 말은 귓전에서 지나가 버리고 마음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이야기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왜? 연애하고 있기 때문에...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빠져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문제는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바알이 준다고 고백하고 따라가는 것에 대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얼마나 기가막힙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드리시는 가요? 여러 종류의 헌금이 있겠는데 보통 헌금에 대해서 이름이나 내용을 읽지 않다 보니까 그저 이름 석자나 써서 헌금함에 넣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 헌금에 대해서 좀 더 여러분의 애정과 정성이 들어가면 좋겠어요. 감사의 내용을 여기서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여러분이 거기에 여러분의 감사의 조건을 자세하게 정성껏 쓸 때에 이미 그 마음속에 그 자세 속에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분들 중에 제일 제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너무 당연한 상식적인 얘기잖아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10의 1은 내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10개를 우리에게 모두 주셨지만 그중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주님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그 고백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와요. 왜그럴까?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많은 은혜들을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에게서 얻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배하고, 그들 앞에 향을 피우고, 그들을 연애하면서 따라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선포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9절 이하에 보면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곡식을 도로 찾겠다. 내가 포도주를 도로 찾겠다. 너에게 준 양털과 삼을 내가 도로 가져가겠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정신을 좀 차리게 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적극적인 의지가 담겨져 있어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할 때에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소유나 여러분이 지금 성취하고 있는 어떤 관계나 지위 때문에 오늘 여러분의 모습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건강한 남편을 주셨고, 승승장구하는 남편을 주셔서, 하는 일마다 잘되는 사업을 주셔서, 모든 매사에 남들보다 뛰어난 자녀들을 주셔서 어느 가정 못지 않은 건강을 주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상당히 염려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아주 심하게 말하면 '너희들은 지금 팔자가 좋으니까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 것입니다.

욥기에 가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을 사탄이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사탄이 했을 때 "욥, 내가 인정하는 나의 사람이지. 욥은 정말 흠 잡을 데가 없어" 하지만 사탄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것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지금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소유가 많기 때문이고,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성취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에게서 소유를 가져가고, 그의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간다면 아마 지금과 달라질 걸요" 그것이 세상이 우리를 보는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하실 때 욥은 계속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지만 사탄은 계속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시험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셨고, 사탄은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을 욥에게서 가져갔습니다. 무엇입니까? 소유를 가져갔어요.

우리 믿는 사람들도 간혹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하는 분들이 있어요. "돈이 제일이야"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좀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저 믿는 사람의 입에서 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저 뭔가 잘 맞지 않아요. 우리도 돈이 필요하고, 돈이 있어야 교육도 하고, 생활도 하고, 우리의 문화적인 여러 가지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돈이 제일이야"라고 말하는 것과는 뉘앙스가 달라요.

사탄은 욥에게서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 그것 아니면 아닐거라고 생각했던 소유를 빼앗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욥에 있는 것들을 가져가고, 욥의 자녀들에게 있는 것들을 가져가고 송두리째 가져가기 시작했어요. 집도 불살라 버리고, 모든 소와 양떼들 다 빼앗기게 만들고, 결국 소유가 욥에게서 다 떠나갔을 때 욥이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욥의 주변의 관계를 허물기 시작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허물어서 자식들이 고통 속에 빠집니다. 심지어는 그의 아내까지도 욥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여러분, 책을 읽으면 그 저자는 그 책속에서 자기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소설을 읽으면 그 속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을 통해서라도 그 소설 저자의 이야기를 하게 만듭니다. 영화를 보아도 제작자나 각본을 쓴 사람은 그 영화에 출연하는 여러 캐스터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을 통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던, 책을 읽든, 어느 장르든지 그 원 저자의 의도를 찾아낼 수 있어요. "아, 이 영화는 이 얘기를 하고 싶구나. 이 소설은 이 말을 하고 싶은 거구나" 지금 사탄 마귀는 이 욥과의 이런 중요한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욥의 아내를 통해서 하고 있어요. 욥의 아내가 모든 소유가 다 떠나가고, 모든 관계들이 파괴된 이후에 마지막으로 아내는 욥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 사실 이 이야기는 사탄 마귀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욥의 아내의 입을 빌려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소유가 없는 상태에서의 신앙,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의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그 말씀을 적용을 해보시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궁금합니다. 여러분들이 성취한 것들이 지금 여러분 곁을 떠나간다면,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여러분의 소유가 되지 않고 다 여러분 주위에서 멀어져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러분에게 주신 건강을 거둬가신다면, 여러분에게 주신 자식을 거둬간다면, 여러분에게 주신 명예를 거둬가신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지금 여러분들은 소유하고 있고, 성취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거기 있습니다. 비록 외양간의 소가 없을지라도, 비록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쉽지 않은 고백이지요. 그런데 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어 가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 믿음, 이 신앙을 소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든든한 믿음을 가지고, 뿌리 깊은 영성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얄팍한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저는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에 등록하는 것도 강권하고 싶지 않아요. 충분히 이 교회를 알고, 이 교회의 목회자를 알고, 이 교회의 비전을 안 후에 등록해도 늦지 않습니다. 왜? 한번 등록하면 평생을 갈 거니까... 뭐가 급해요? 저는 등록하는 것이 배우자를 선정하는 것만큼 신중해야 된다고 말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평안의교회가 가진 저력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20년 전부터 한분씩 한분씩 등록을 한 그분들이 지금까지 여전히 계시다고 하는 것, 그분들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평안의교회 저력 중의 하나입니다. 성도들을 보았을 때 "권사님, 이 교회에 몇 년 나오셨나요?" "나, 17년 됐어" 그것 하나만으로도 왜 이 교회가 성도들이 모여야 하는지, 내가 왜 이 교회를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1차적인 대답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요란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신도시에 위치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한 가족, 한 지체가 되기만 하면 그것은 정말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신앙의 정을 가지고, 신앙의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그런 공동체가 평안의 공동체인 줄 믿습니다.

베델성서대학으로 목회자와 말씀으로 비전을 나눈 그룹들이 이제 150명을 넘어갑니다. 그 사람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요. 물론 베델을 했다고 해서 다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은 전체적인 분위기로는 정말 목회자와 함께 가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그런 믿음의 공동체로 변화되어져 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욥의 이 고백을 통해서 사탄이 우리를 도전하는 소유와 성취에 대한 의문을 여러분들이 분명한 여러분의 고백으로 말끔히 해소하기를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우리의 신앙에 바른 모습이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바른 신앙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소유도, 성취된 모든 것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주신 그 은혜들을 이웃을 위해서 쓸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감감 무소식입니다. 주님은 결국 9절에서 내가 준 것들을 도로 찾아가면서 잠자는 영혼들을 일깨우겠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곡식을 도로 거두며, 새포도주를 도로 거두며, 양털과 삼을 도로 거두리라"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바알이 준 줄 알았는데, 아스다롯이 준 줄 알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제야 눈을 뜬다는 것이지요.

숟가락 2개, 냄비 1개, 밥솥 1개만 사랑만으로도 살 것 같아서 시작한 부부들이 결혼식 올리고 화려한 신혼여행을 돌아오면 "이건, 현실이 이게 아니구나. 결혼은 이상만으로는 안되는구나"하는 것을 그 시간부터 알게 되지요. 사실 결혼은 부부와 결혼하지만 부모와도 결혼하는 것이고, 일가친척과도 결혼하는 것이고, 수없이 많은 사촌들과 조카들과 모든 관계와 결혼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연애 단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 말씀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양가 부모만 미워지게 되지요.

오늘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주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너의 모든 것들을 내가 도로 찾으리라. 너에게 주었던 명예, 너에게 주었던 건강, 너에게 주었던 모든 소유를 내가 거두어가겠다" 이것은 그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굉장히 역설적인 메시지가 많아요.

자, 10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연애하는 자, 파트너가 누굽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바알이요, 아스다롯입니다.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서 바알과 아스다롯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자, 저 앞에 가보면 5절,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그래서 바알을 쫓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져옴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비로소 눈을 뜨게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바알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구나" 그들을 가렸던 모든 것들을 벗겨 버리므로써 수치스러운 인생을 부끄러운 인생을 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국회의원이나 고위직에 있는 분들의 그 수당 중에는 '품위 유지 수당'이라는 것이 있어요.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동차에서 내려도 누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는 내리면 안되고, 뭐 그런 것입니다. 자기 품위를 위해서 그래도 꽤 괜찮은 레스토랑을 다녀야 하고, 여관은 다니면 안되면, 호텔도 최고급 호텔을 다녀야 하고, 자기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돈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외형적인 품위 유지는 사실 그 껍데기 벗겨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니예요.

목욕탕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않습니까? 아주 덩치가 큰 학생이 머리를 예전에는 빡빡 깎고 다녔는데 목욕탕에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자기 옆에 한 사람이,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들어가면서 텀벙하고 물탕을 튀겼더니 그 사람이 째려보면서 아주 얹짢은 표정을 해서 그래서 "왜 째려보느냐?" 그랬더니 "나, 중이야" 그래서 이 친구가 "어 중2야? 나 중3이야" 그랬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벗으면 똑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는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그냥 둘러싸서 치장을 해서 계급을 만들고 계층을 만들고 차별을 하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도 세상적인 지위를 가지고 폼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우리 평안의교회는 없어요. 제가 용납을 하지 않으려고 그러지만 들어오지도 않겠지요. 분위기가 그러니까...

어느 과장님에게 전도를 할 때, 제가 청년때입니다. 청년 친구가 나가는 회사가 과장님을 전도를 하니까 그분 하는 얘기가 "가기는 가야 하겠는데 거기는 못 가겠어" "왜요?" "우리 부하 직원들이 많이 다니는데 거기 과장인 내가 어떻게 가" 부하들하고 자기 종업원들하고 과장인 자기가 어떻게 예배 자리에 같이 앉아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가 세상 속에 많이 들어가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그런 우리 인생의 잘못되고 왜곡된 편견들을 벌거벗기시겠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11절에 보면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절기는 좋은 것이거든요.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절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가족이 만나고, 민족이 만나고, 그래서 그들은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송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그 절기는 '하나님께'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고 바알과 아스다롯이 중심이 되어 버렸어요. 마치 성탄절이 장사치들의 세상이 된 것 같이...

예루살렘 주님의 고난의 길, '비아돌로로사'를 올라가다 보면 그 지역은 팔레스타인 지역인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도 하지 않는 그 사람들이 온통 예수님에 관계되는 조각과 기념품들을 가지고 팔면서 먹고 사는 거예요. 이런 현상들이 오늘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주님은 차라리 그 명절을 폐하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명절은 기쁨을 회복하는 날이요, 명절은 감사를 회복하는 날이요, 명절은 우리에게 있어서 바른 신앙을 회복하는 날인데 그 바른 신앙, 바른 기쁨, 바른 감사가 잘못되어지고 왜곡되어진다면 내가 그 명절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 있습니다. 이 명절 기간 동안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새로운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명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족을 주시고, 우리에게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고 높일 수 있는 그런 관심들이 명절에 집중되어져야 되는데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끝난다면 사실 그 명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기도합니다. 이번 명절에도 사랑하는 평안의 가정들이 명절을 통해서 가정에 기쁨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명절을 통해서 가정에 감사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서 명절을 통해서 가족의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13절을 보시겠습니다. "저가 귀걸이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렸다" 연애하는 자는 특징이 무엇인가요? 화장하는 것이지요. 우리 여성들, 사랑하기 시작하면 화장하기 시작합니다. 안바르던 화장품도 사서 바르고, 안 달던 귀걸이, 목거리, 뭐 이것저것 치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은 금방 알지요.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아, 이 아이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구나. 여자 친구가 생겼구나" 우리 부모들은 금방 알아버립니다. 왜? 외형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바알을 연애하고 아스다롯을 연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귀걸이 패물로 장식을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알았을 때에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서 이웃이 보이는데 세상 속에, 세속 속에, 우상 속에 빠지면 자기가 보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고 다른 사람은 변두리가 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중심이 되고 자기는 그들을 위해 섬김의 수단과 도구가 되는 사람, 인생이 다르지요. 흔히 자기에 대해서는 존귀하게 여기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세우면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너희를 낮추라. 주안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랬어요. 자기에게 인색하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복받는, 복있는 인생일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풍부하고 부유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지요. 그 복은 물질적인 복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의 평안과 기쁨이라고 하는 영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는데 많이 가진들 무엇하겠어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것은 좀 더 넓은 감옥이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감옥에 앉아있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감옥에 죄수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높은 담을 해놓았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몇 만원, 몇 십만원" 엊그제 뉴스 보니까 자동차 위반을 해서 벌금이 20여만원 나왔는데 그거 값을 능력이 없어서 30일 동안 강제 노동을 위해서 구치소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맞아 죽었어요. 몇 십만원, 그런 작은 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자유하고, 이 세상의 보다 큰 도둑놈들을 위해서 담이 치워져 있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자조섞인 말도 하지요. "도둑질하려면 크게 해. 수백억, 수천억 정도는 해야 무사하지" 이런 이야기가 시중에 도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자기 인생, 자기 육신의 쾌락을 중심해서 살아가는 인생들로 바뀌어버린 이스라엘, 귀걸이와 패물로 장식하면서 연애하는 자를 따라다니다 보니 하나님은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내가 그런 자들을 어떻게 하겠다? "내가 바알을 따라다닌 시간만큼 벌을 주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작정하면 하나님께서 떠났다고 하는 그 인생이면 이미 소망이 없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 13절 속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애정이 있음을 저는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설적인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바알을 따라서 연애하고, 바알을 따라서 패물과 귀걸이와 그런 것들을 온갖 장식하면서 바알에게 잘 보이려고 너희들이 온갖 정신을 팔아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너희가 잃어버린 나를 다시 기억하고, 다시 전능하신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내가 그 이전에 사랑을 회복하고, 그 이전의 은혜를 회복하고, 그 이전의 함께 하던 기쁨을 회복하고 너희를 들어 세상에서 명성과 기쁨이 넘치게 하리라" 회복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강렬한 의지가 말씀 속에 담겨져 있어요.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이 우리의 육신의 명절을 맞이하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명절을 폐하시고, 우리의 삶의 기쁨을 폐하시고, 우리의 모든 육신의 쾌락 속에 자신을 치장했던 것들을 벗겨 버리시겠다고 하는 그 말씀 속에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주시되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것들로 채우시고, 인도하시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내면서 오늘 혹 바알을 따라, 아스다롯을 따라 우리의 육체의 소유와 성취를 위해서 곁길로 갔던 우리들이 있다면 이 주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언제나 미쁘신 하나님, 천지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며 지냈던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을 따라가며 아스다롯을 섬겼던 그들에게 우리 주님, 참으로 강력한 주님의 사랑과 애정을 말씀하시며 주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주님의 그 귀중한 뜻을 헤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그 주님의 사랑을, 언제나 변함없는 그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 한해를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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