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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혼과 이혼의 성경적 의미 / 마 19: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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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결혼과 이혼의 성경적 의미
본문:마태복음 19: 3-9

저는 결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혼정보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사역을 1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사이트 운영 1년만에 올 가을까지 5쌍 10명의 가정이 저희 사이트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는 저 뿐 아니라 이 곳에도 결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결혼생활을 현재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이 곳에 계신 분들 모두가 가정을 가지고 있고 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분들이니 결혼과 이혼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의의가 있으리라 봅니다.

인생은 어찌 보면 모험인데 인생의 모험 가운데 가장 치열한 모험은 결혼인 것 같습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40년을 지긋지긋하게 살아야 한다면 이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서양 격언에 바다로 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고, 전쟁터로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식장에 나갈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은 바다의 항해보다도 포탄이 나르는 전장보다도 더 치열한 더 위험한 모험의 장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치열하고 위험 천만한 결혼생활의 곡예를 매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르웨이 극작가인 입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결혼생활 이 거친 바다를 헤쳐갈 나침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유명한 말입니다. 결혼생활에 대하여 너나 할 것 없이 교훈적인 이야기를 경험에서 우러나와 할 수 있겠지만 정답은 없는 것이죠. 성경은 결혼생활에 대한 안내를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살기에 문제인 것이지 만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결혼의 명확한 의미를 알고 우리가 이 모험을 한다면 결혼의 모험은 불안한 모험이라기 보다는 좀더 기다려지는... 좀더 설레이는... 더없이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땅에서 결혼하는 모든 커플들 가운데는 세 커플 중에 한 커플은 결혼의 모험이 이혼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결혼 생활이 결코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처녀 총각들은 결혼을 기대하면서도 두려움으로 맞이하고 있고, 기성 세대는 밋밋한 결혼 생활에 흥미를 잃고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결혼이란, "결, 결국. 혼, 혼자되는 것".
결혼 후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날 이혼의 행렬 가운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담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비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름다운 결혼생활이며 믿음의 가정은 어떤 아름다운 실제의 결혼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 분봉왕이었던 헤롯왕의 이혼 사건은 전국을 들끓게 했습니다. 그가 왕이라는 특수한 신분에 있었기에 논쟁을 촉발시켰던 것이죠. 세례요한은 그의 이혼과 불륜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유태 세계는 힐렐과 샴마이라는 두개의 학파로 나뉘어져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힐렐 학파는 이혼에 대해서 좀더 관용하는 입장이였는가 하면 샴마이라는 학파는 절대로 이혼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혼의 이슈를 갖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혼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허용될 수밖에 없는 필요악과 같은 제도라고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완악함 때문에... 인간의 죄성 때문에 허용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제도가 이혼이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집중해보면 주님은 단순히 이혼이 가능한가 불가한가 이런 이슈에서부터 이혼의 문제를 접근하시기보다도 처음에 결혼의 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의 의미, 그것이 무엇인가를 주님은 본문을 통해 밝혀주고 계십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나타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동사 속에 결혼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결혼의 의미는? 첫째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결혼은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사회적 혹은 법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부모를 버리거나 혹은 부모를 소홀히 여기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의 좀더 깊은 의미는 결혼은 새로운 하나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인 독립의 사건이라고 주께서는 강조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를 의존하고 살아왔던 자녀들이 이제 당당한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건설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로부터의 심리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의 필요성이라고 주께서는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법적으로 선언하는 사건이 바로 결혼의 의미인 것입니다. 혼인신고서라는 것은 바로 이 법적인 독립이 이루어진 것을 사회적으로 선포하고 그리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자녀들이 만약 계속해서 부모의 도움을 기대한다든지 혹은 부모가 자녀가 안쓰러워 계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면 이것은 자녀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부모 의존적인 삶의 패턴을 형성할 것이고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부모로부터 떠나야하고 사실 부모들도 결혼한 자녀를 풀어주어야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결혼은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다음에 "아내에게 합하여"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강조된 단어는 연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한다는 말은 파피루스 종이에 한 장을 덧붙일 때 아교풀로 붙여서 딱 붙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 일단 붙어있는 두 장의 종이를 다시 분리시켜 보세요. 이것을 다시 분리시킬려고 하면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장이 다 찢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결혼해서 한 남자와 한 아내가 부부로 연합하게 되면 이 관계는 다시는 찢어질 수 없는 다시는 찢어져서도 안되는 하나됨, 그것이 바로 부부의 연합이요 결혼의 사건인 것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 결혼 생활이 정말 힘든 이유는 부모 때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혼식 준비 때부터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부모님이 부부사이에 끼어 듭니다. 자녀를 결혼 시켰지만 끊임없이 뒤에서 자녀들을 리모트 콘트롤 하고 있는 부모들 때문에 겪는 심각한 고부의 갈등은 이 땅의 가정 파괴에 만만치 않은 요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부모조차도 끼어들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부부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부부 당사자가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식인데 하며 부모가 끼어들어 봤자 문제만 커지고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부부의 연합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혼이란 것을 심리적이고 관계적인 일대일의 한 남자와 한 여인의 온전한 연합이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결혼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혼의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라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몸이 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성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부의 성행위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다는 것은 성의 본래의 목적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성을 허락하신 창조주의 목적은 생육함과 번성함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성적 교제를 통해서 자녀를 출산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를 낳고 자녀를 키우는 행위는 우리 가정의 가정사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기르는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키워내는 자녀들이 우리 다음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출산행위와 자녀의 양육행위는 개인적인 행위를 넘어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이란 장난이 아니에요 결혼은 게임이 아닙니다. 결혼은 엄숙한 역사적 책임을 동반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임하는 사람들은 이 자녀를 통해서 내가 내일의 역사를 만든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든다 이런 역사적 소명감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부의 성행위는 출산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을 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부로 하여금 성행위를 통하여 즐거움을 누리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잠언5장15절 이하에 보면은 결혼한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주는 지혜로운 충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들아,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이것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부의 결혼생활을 매우 아름다운 은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다른 샘 가지말고,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아내를 엔죠이 하라 그랬어요. 다른 영어성경 번역에 보시면 "satisfy" 만족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있기도 합니다. 만족을 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부부의 성적 교제를 통해서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성적 즐거움을 통한 고독의 극복이야말로 결혼이 존재하는 실존적 의미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부부들을 향한 편지 가운데서 기도할 잠시의 틈을 얻기위한 예배를 빼놓고는 부부는 분방해서는 안된다 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 생활을 통하여 남편으로서 혹은 아내로서 부부사이에 진정한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서 사랑 받고 또 사랑을 누리는 존재로서의 자기확인, 바로 이것을 위해서 결혼을 허락하셨다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결혼을 통해서 이런 의미들을 성취해 갈 수 있다면 이런 결혼이야말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부부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결혼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그 의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책임과 노력을 다할 수가 있다면 이런 가정이야말로 지상의 작은 천국일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 이혼은 결코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은 이혼 자를 미워하신다라는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혼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이혼한 사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다시 재기하기를 하나님은 소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혼 그 자체는 미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혼은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혼은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진정한 삶의 풍성한 기쁨을 박탈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시 다소나마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고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십자가 앞에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왜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이혼이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완악함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죄가 원인인 것입니다. 죄! 이 죄는 때로는 이기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학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때때로 불친절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부관계를 흔들고있는 모든 욕망의 밑바탕에는 바로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 우리의 죄 때문이에요.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욕망, 우리의 정욕,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라면 오늘 다시 그 십자가 앞에 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이기심 때문에 나의 욕심 때문에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다면 그 피로 다시 한번 죄 사함을 받으십시요. 그 피로 용서를 확인 하십시요.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의 배우자를 씻을 수 있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십자가 앞에서 회복되지 못할 가정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는  위기가 없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가정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을까요?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연약함, 더 따지고 보면 우리의 허물과 죄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의 연약함, 우리의 죄를 들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피 흘리고 있는 그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와 용납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피가 여러분의 죄와 여러분의 허물을 씻는다면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지 못할 가정은 없다고 믿습니다. 이 회복의 은혜가.. 치유하시는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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