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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독과 침묵의 축복 / 왕상 1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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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 고독과 침묵의 축복 (왕상 19:11-12)
이름: 이한규목사([email protected])
     

< 내면 세계가 튼튼해야 합니다 >

우리는 실체보다는 상징을 더 숭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더 이끌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것을 너무 좋아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재미를 주지만 내적인 것은 깊이를 줍니다. 세상은 깊이보다 재미를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재미보다 깊이를 중시합니다. 세상은 겉이 큰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속이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옛말에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교계도 못 생긴 목회자들이 지키고, 교회도 못 생긴 성도들이 지키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인들이 다 잘생겼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만은 잘 생긴 존재가 아니다!"라는 겸손한 인식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외적인 화려함이나 인기에 이끌려 발빠른 존재가 되기보다는 내면을 잘 가꾸고, 내면을 잘 살펴서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내적인 삶을 중시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외적인 삶을 준비하는 것은 내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이 튼튼해야 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우리의 내면 세계를 튼튼하게 만듭니다. 고독과 침묵은 잘 활용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독과 침묵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훈련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고독이나 침묵과는 전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요새 인기 있는 음악을 보십시오. 고독과 침묵의 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고독과 침묵의 유익을 너무 모르고 있고, 그것들을 싫어합니다.

며칠 전 미국의 로드니 부캐넌 목사님의 글을 인터넷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휴가 때 캐나다 광야로 여행을 갔는데 그때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사모님과 두 딸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광야 한 복판에 있는 태고의 호수에서 배를 타면서, 너무 감격이 되어 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이 소리가 들리니(Do you hear that)?" 그들이 물었습니다. "무슨 소리요(Hear what)?"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 그러자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들리긴 하는데... 너무 싫어요(Yes! And we hate it)!"

많은 사람들이 침묵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침묵이 들려주는 소리는 듣기 싫어하고 시끌벅적한 곳에 가야 만족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깊은 삶을 살려면 고독과 침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 왜 고독과 침묵이 필요합니까? >

왜 우리에게 고독과 침묵이 필요합니까? 지금 세상은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러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소리로 우리를 공격해서 혼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소리들을 물리치고 고독과 침묵 속에서 실체와 진실에 더욱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더 생각하도록 만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말씀하시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환경을 이길 힘과 자신을 이길 힘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 복음서를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홀로 있는 시간을 아주 많이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때는 지금처럼 그렇게 난잡한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영적 지도자들은 텔레비전에 나오기를 좋아하고, 무대 체질이고, 대중성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다가 결국 "나는 틀리다!"는 것을 증명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짜 진리의 99%는 평범한 것에 숨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에는 대중성은 많아도 건강성은 적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이끌어 가는 손길은 99% 자연적인 것을 통해 이끌어 가십니다. 어느 누구도 "해가 서쪽에 뜨겠네!"라는 말을 듣고 "특이하다! 기적이다!"고 하며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초자연적인 것, 기적적인 것, 대중적인 것, 화려한 것, 특별한 것을 열심히 좇아 다니면 열심히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때로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 떨어져 살아 계신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하며, 평범한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평범한 것에서 감사거리를 발견하는 삶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그렇게 '무대 앞'에 서기보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힘쓸 때 내 영혼이 풍성하게 되고, 나를 한 맺히게 했던 말도 교훈과 위로와 축복을 주는 말로 신기하게 번역되어 들리고, 내 육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와 암 덩어리의 공격력도 급속히 약화되어 병도 낫게 될 것입니다.

물론 간증 집회에 찾아다니고, 찬양 집회에 찾아다니고, 기도 집회에 찾아다니고, '영적, 영성'이라는 말이 들어간 집회에 찾아다니고, 각종 가정 세미나와 교회 성장 세미나에 찾아다니고, 새롭고 특이한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서서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마음과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은 별로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대중을 사랑했지만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려고 할 때 예수님은 뒤로 물러나 숨으셨고, 병자들을 치료하신 후에는 그들의 입에 마이크를 갖다 대고 간증을 유도하기보다는 그 기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대중성 대신에 고독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은 우리도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드리고, 금식하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항상 혼자 따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혼자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40일 금식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온갖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으셨습니다. 고독한 광야는 예수님을 약하게 한 장소가 아니었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하게 한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주 고독과 침묵을 추구하셨습니다. 12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따로 가서 기도하셨고(눅 6:12-13), 사촌인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따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마 14:13).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친 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몰려오니까 예수님은 물러가셨고(눅 5:16), 5천 명을 먹이신 후에도 따로 산에 올라가셨고(마 14: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혼자 기도하셨습니다(마 26:36-48). 예수님에게도 그처럼 고독한 시간이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개 인생의 중요한 변화가 있기 전에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고독하게 되셨고, 사랑하는 동역자 세례 요한을 잃은 것에 대해 슬퍼하기 위해서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또한 기적을 일으킨 위대한 사역 후에 오히려 고독하게 되셨고, 인생의 가장 극심한 어려움과 죽음에 처하시기 전에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독과 침묵이 필요한 상황도 똑같습니다. 지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습니까? 무엇인가 중요한 사건이 다가옵니까? 혹시 슬픔과 실망에 빠져 있습니까? 어떤 일의 성공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들의 영적인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서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가올 날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 고독과 침묵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

그러면 고독과 침묵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 유익을 새벽에 교회에 나올 때 느낍니다. 새벽에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느낌을 가지면서 내적인 평화가 생기고, 조용한 가운데 성경을 보면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또한 제가 매일 당하는 상황과 저의 기도를 필요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고, 교회의 비전과 저의 비전과 세계 선교의 비전을 위해 기도하면서 미래를 희망과 소중한 예감으로 보게 하는 신비한 시야를 얻게 됩니다. 때때로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조용히 기도하면 생각보다 훨씬 가볍게 그 상황이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도 가끔 지친 마음이 들 때가 있고, 드라이한 느낌이 들 때가 있고,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대략 4시간의 잠이 한번 풀어주고, 새벽에 교회에서 말씀과 기도 가운데 지내는 시간이 다시 한번 그 마음을 풀어줍니다. 그러면 아침해가 떠오르면서 울적했던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처럼 저에게는 새벽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밤 시간에 그런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무 때든지 교회에 와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저 시간이 저분을 작품으로 만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처럼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낙심과 좌절을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이야기가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약 2800년 전 어느 날,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대결을 청했습니다.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각자 자기 신에게 기도해서 그 제물을 태우는 신이 진짜 신임을 인정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하는데 기도가 먹히지 않자 그들은 춤까지 추고 자기 몸에 상처까지 내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제단에 들어서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하고 단순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과 돌과 흙과 제단 옆 도랑의 물까지 태웠습니다.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곧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엘리야는 두려움과 낙심에 사로잡혀 도망쳐서 호렙산 굴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에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속에도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고,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이 다 지나고 나서야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세미한 소리가 낙심한 엘리야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임재가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처럼 역사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다! 갈급한 것이 채워진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세미한 음성으로 주어지면 "저게 하나님의 역사인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그 세미한 음성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가장 큰 위기가 무엇입니까? 이 세미한 음성을 못 듣는 것이 위기입니다. 우리는 번쩍 하는 것, 화려한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역사해야 뭔가 채워지는 것 같아 그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란한 것에 관심이 적습니다. 하나님의 우주를 운행하시는 손길은 대개 조용하게 진행됩니다.

지금 우주가 하나님의 손길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주의 일부분인 태양계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이십니까? 나팔 불고, 꽹과리를 치고, 우당탕탕 하면서 광고하고 "내가 매일 이렇게 지구를 돌리고 있노라! 놀랍지!" 하고 움직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대개 조용하게 움직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음성도 세미한 음성으로 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혼자 있는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그 소리를 듣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매일 화려한 모습으로 기적적으로 나타나셔서 "아무개 집사야!" 하고 큰 음성으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들을 훨씬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조용히 성경으로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미한 음성이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음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소음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끊임없이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의해 압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신선하게 될 조용한 장소가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매일 당하는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선한 통제 아래에 놓여서 미래를 잘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 어떻게 고독과 침묵을 가질 수 있습니까?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새벽이나 낮이나 매일 일정 시간을 그런 시간으로 확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시간은 전혀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집에서도 조용히 성경을 보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고, 시간이 될 때마다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참 좋습니다. 저는 가끔 여행을 떠납니다. 새로운 환경이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주는지 모릅니다. 조용한 숲에 들어가면 나무들이 말하는 것 같고, 산과 바다에 가면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참 많습니다. 얼마나 유익하고 중요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저는 글을 쓰는데 일주일 여행을 갖다 오면 일주일을 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영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말씀을 많이 묵상하는 편입니다. 미래의 비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 큰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비전이고, 또 하나는 저 자신의 비전입니다. 교회의 비전은 뜻대로 안될 때가 많아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항상 절감하며 삽니다. 그러나 저 자신의 비전은 열심히 준비한 만큼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비전을 위해 힘써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45세, 50세의 제 모습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 비전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쓰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얼마 전 유엔 산하 세계 보건기구(WHO) 사무총장에 우리 나라 이종욱 박사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흥분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박세리와 최경주가 골프로 성공한 것보다, 이형택이 테니스 우승을 한 것보다,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잠깐 우승의 기쁨을 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1년 예산 1조 2천억에, 상주 직원이 5천 명인 세계 3대 기구 중의 하나인 단체를 5년 동안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장벽을 딛고 세계를 위해, 그것도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고 어려운 빈곤국가를 돕는 일의 선봉에서 쓰임 받으니 얼마나 멋있습니까? 열심히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도 그렇게 써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열심히 준비할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보다 재능이 많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준비는 많이 하는 편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저의 목양실은 작은 공간이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미래의 비전의 산실입니다. 허벅지에 땀이 날 정도로 저는 말씀과 씨름하고 있고, 소리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미래의 비전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쉴 때는 확실히 쉬는 편입니다. 쉴 때에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 많은 영감을 얻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운전하면서 가끔 찬양을 하는데 주로 찬양하는 레파토리가 3개 있습니다. 찬송가 453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찬송가 411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인데, 다 하나님의 친밀한 손길을 느끼게 하는 찬송들입니다.

그처럼 사역의 현장에서 물러나 쉴 때 오히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더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다시 우리를 조율하는 것이 바로 쉼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중요하고, 예배가 중요하고, 쉴 때는 쉬는 삶이 중요합니다. 여가 생활에 돈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가가 없어서 건강을 망치면 5배, 10배의 돈이 들게 됩니다.

왜 여가생활을 합니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여가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의 내 삶의 목적이 뚜렷해지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추진력을 얻는 재충전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여가생활을 잘 가진 셈이 됩니다. 결국 여가생활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수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할 때 가장 큰 유익이 무엇입니까? 수도원에 있는 전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큰 유익입니다. 또한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이 큰 유익입니다. 그곳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정신을 분산시키는 어떤 소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며칠 있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고, 내적인 평화와 힘이 생깁니다. 또한 믿는 교인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현재의 고난은 내일의 축복이 되고, 나의 고난은 자녀의 축복으로 변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과 침묵이 없으면 영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혼잡하고 소음 중에서도 만나 주시지만 대개 조용한 장소에서 만나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과 잠잠한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30장 15절은 말합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얼마나 정확한 지적입니까? 오늘날 많은 믿는 사람들이 잠잠하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차이는 현명한 사람이 10분이라도 더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잠잠히 신뢰함으로 뿌리 깊은 나무처럼 뿌리 깊은 영혼과 내면의 깊이를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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