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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된 대제사장 / 히 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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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충성된 대제사장 히브리서 2장 10-18


군인들이 근무하는 전방은 크게 두 개로 나누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보는 철책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GOP라고 합니다. 그런데 GP라는 곳이 있습니다. GP 라는 곳은 철책 밖으로 나가서 근무하는 군인들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철책 밖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낮에는 수색을 하고 밤에는 길목을 지키는 일을 합니다. 저는 소대장이 되어서 첫 GP 근무를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GP라는 곳은 북한군이 아주 가까이 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낫선 땅입니다. 길만 따라 다녀야 하는 위험한 곳입니다. 첫 수색 작전 임무를 받은 저는 작전을 나가기 위하여 소대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가야할 길을 정하고 각자의 임무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제가 어디에 설 것인가가 남았습니다. 본래 배운 대로라면 저는 수색대 중간에 서서 모든 병사들을 지휘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운 대로 위치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소대원들의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러는지 의아해 하고 있던 중에 한 병사가 저에게 이렇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배운 대로라면 소대장이 중간에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 병사들이 원하는 것은 초임 소대장이 수색대 제일 앞에 서서 수색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초임 소대장이 앞장서서 수색을 하지 않으면 소대원들은 소대장의 리더쉽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이고 초행길이지만 제가 옆에 서 도와 드릴테니 앞장을 서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 처음 밟아 보는 땅! 그것도 북한군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길을 소대장이란 직함 때문에 앞서서 나가야만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맨 앞에 서서 수색 작전을 무리 없이 잘 하고 나니 저는 소대원들과 함께 형제 같은 친밀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 보다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앞서서 나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교회 지도자라는 직책을 가지신 여러분은 항상 성도들 앞에 서 있어야 하는 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지도력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성도들은 신뢰하고 이제 계급이 아니라 주안에서 지체 된 형제의 모습을 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읽어야 하는 독자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지뢰밭을 걸으면서 수색해야 하는 군인들처럼 성도들 앞에 어려움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 앞에 있고 실제로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10절

너무나 말씀이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어려운 게 아닙니다. 본문을 번역한 사람들이 너무나 어렵게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풀어 드리면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완벽하게 행하신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완전한 구원 주가 되신 것입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10절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하여 이 책 저 책을 읽다가 아주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영어 성경은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입니다. NIV에서는 구원의 주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KJV에서는 이 부분을 Captain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기심이 생겨 다른 버전에서는 뭐라고 번역하고 있는 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RSV(Revised Standard Version )에서는 PIONEER라고 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의 주라는 단어를 캡틴으로 파이오니아 (개척자)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속으로 읽어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완벽하게 행하신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고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완전한 개척자가 되셨습니다 라고 하거나 혹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완벽하게 행하신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고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완전한 대장이 되셨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어보니까 오늘 본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안내하시기 위하여 우리 대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개척자가 되어서 앞서 나가신다 는 것입니다. 마치 지뢰가 널려 있는 전방에서 소대장이 맨 선두에 서서 수색 작전하듯이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개척자로서 캡틴으로서 나가신다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이런 캡틴을 모시고 있는 인생입니까? 이런 개척자를 모시고 사는 복 받은 인생입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은 내가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도와 주지 않는 서울에 올라와 내 젊은 하나 믿고 내 의지 하나 믿고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너무나 억척스럽게 살아온 인생이기에 남들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반드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날 아들 하나 잡는 날이지요. 내가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너를 키웠다. 그런데 왜 너는 날마다 이 모양이냐 라고 서운함을 말합니다. 내가 내 의지로 내 젊음으로 자식을 키웠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게 서운한 것 밖에 없지요. 그런데 내 스스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 주신 분이 계셔서 살게 된 사람은 서운한 것이 없습니다. 은혜로 살아온 사람은 늘 감사 밖에 없지요. 은혜로 살아온 사람은 자식을 바라 볼 때에도 걱정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에게도 주님의 은혜가 내렸다면 당연히 내 아들에게도 은혜가 내린다는 소망과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개척자이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캡틴으로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저는 우리 신림교회 성도들 모두가 우리 보다 앞서 가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확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개척자이신 예수님을 확신 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14-16절

사망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없이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5절에 일생에 매여서 종노릇하는 것에서 해방 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해방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이제 절대로 그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얼마나 축복 된 말씀입니까? 여러분! 이 본문 말씀을 읽을 때야 참 좋은 말이구나 라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 있겠습니까? 모두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이 14-16절을 읽으면서 참 좋은 말이구나 나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참 귀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확신에 찬 마음으로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좋은 이야기로서 막연히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좋은 말씀으로만 생각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나에게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맞아요. 그리고 우리도 원하는 바 에요. 술도 끊고 싶어요. 끊어 보려고 노력도 했어요. 도박이 나쁜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제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다시 때가 되면 가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전방에서 수색활동을 벌이던 그 때를 예를 들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수색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주의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본대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대와 떨어지면 길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지뢰가 있는 곳을 피해가도록 사인을 했는데 그 사인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앞장서서 나가는 사람을 눈여겨보고 앞에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군인이면 누구나 전방이 위험하다는 곳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종종 사고가 일어나요. 왜요? 앞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힘들어하고 거기에서 헤어 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척자이신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캡틴과 우리의 거리가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고 계십니다. 죄라는 지뢰를 지금도 제거하시면서 앞으로 나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분의 뒤를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이에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거에요. 그 사이에 사단은 지뢰를 다시 묻어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한번은 옆 소대에서 지뢰 밟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알고 보니 한 병사가 수색을 하다가 산 더덕을 발견하고 더덕 캐겠다고 옆길로 들어가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전도 책자로 사용되는 사영리를 보십시오. 4영리 가운데 4원리를 보시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인 사람은 자신의 의자 위에 자신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된 사람의 의자를 보면 그 의자 위에는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한가지 더 그림을 하나 그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원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원 안에 들어 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자기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아요. 여전히 자신이 주인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힘이 들면 원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에게 구원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오늘 14-16절의 말씀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내려오십시오. 내가 인생의 개척자가 되지 마시고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개척자이심을 믿으십시요. 그리고 그분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개척자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어느 새 사단이 지뢰를 묻고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그런데 이런 설교를 들으면 우리에게 질문이 생겨요. 그럼 예수님이 사단을 없애 버리면 되쟎아요. 물론 없애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을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물리 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사단은 무저갱으로 넣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왜 사단을 없애지 않나 고민하지 마시고 대장 되신 예수님 뒤를 바짝 쫒으라 고 말씀하신 그 말씀이 순종하시는 것이 더 빠른 길입니다.

두 번 째로 예수님이 우리의 대장 되시고 개척자 되신 분이 11절에서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부르신다고 기록합니다.-- 11절

그것이 무엇입니까? 형제입니다. 무언가 서로 격에 맞지 않는 표현인 거 같습니다. 10절에서는 대장 그리고 11절에서는 형제! 개척자와 형제!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과정을 겪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 갔습니다. 애굽에서 고생한 요셉은 마침내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마침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곡식을 얻을 수 없게 된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에 내려와 동생 요셉을 만납니다. 그 때 요셉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요셉의 고백을 통하여 10절과 11절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야곱의 아들들을 위하여 먼저 앞서 보냄 받은 요셉이요 이 요셉이 바로 자신들이 돈주고 팔아 버린 형제 요셉이라는 말입니다. 이 피를 나운 요셉은 자기를 팔아 버린 형제들을 향하여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원수갚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기근에서 구원했습니다.

그러면 개척자요 캡틴인 예수님이 우리와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개척자요 캡틴인 예수님과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를 나누어야 하고 피가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피가 문제입니다. 정결하신 예수님의 피가 절대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피는 너무나도 더럽기가 한량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라고 찬양 할 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상태입니까?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 오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개척자이신 예수님을 정말 신뢰 할 수 있으려면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 안에 예수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흐를 때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까?--12 -13절

첫째 찬양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다시 신뢰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면 우리는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세상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찬양하라고 하는 세상은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죽도록 충성한 결과 배신이요 분노요 상처뿐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의 피를 나누어주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입니다. 고난 받는 여러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다시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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