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 마 21:1-11

  • 잡초 잡초
  • 667
  • 0

첨부 1


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마태복음 21:1-11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


I. 쓰임받는 인생

  요즈음 자주 하지 못합니다만 우리교회에서 부부관계를 훈련하는 「부부동산」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느밤 사람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고 「당신은 참으로 필요한 존재인가? 당신은 아직도 쓸모가 있는가? 당신이 이 땅에 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를 써 보게 합니다. 참가자들에게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부부도 함께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마주 앉아 서로 쓴 글을 읽게 하는데 우리는 모두 통곡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목장 안에서, 나는 아직도 필요한 존재구나, 쓸모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고 감사해서 우는 겁니다.

  인생에서 최대의 저주가 있다면 "더 이상 필요 없다. 너는 쓸모 없는 존재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반면 최대 축복의 언어가 있다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쓸모있고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 필요한 존재인가? 나는 어디에 쓰임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소명 혹은 사명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스펄죤 목사님에게 "어떤 것이 소명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세 마디로 짤막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제일 귀하게 보이는 것이 소명이다. 의사가 제일 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의사의 소명이 있는 것이고, 후세를 가르치는 일이 제일 귀하다 느끼는 사람은 교사의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는 제일 쉬운 일을 하는 것이 소명이다.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일을 시키려고 하셨다면 반드시 그것을 담당할 만한 달란트를 미리 주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면 마냥 어려운데 내가 그 일을 하면 아주 쉽다고 느끼는게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장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소명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한없이 즐거워야 합니다. 피곤함이 없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사함으로 열심히 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불안하고 사회가 어려워지면 각종 범죄가 횡횡하고 사행심이 늘어나고 사람들은 영웅적인 지도자를 기다리게 됩니다.

  로또 복권인가 하는 복권 한 장을 하기 위해 복권 판매대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세상 살기가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면 세상이 이 모양이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심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사행심은 건강한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풍조에 휩쓸리지 마십시요. 당첨되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지 그 어느때 보다도 대통령 당선자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나 봅니다. 저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냉정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이 땅에 왔다간 그 어떤 지도자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영웅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지도자는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지도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의 역사였습니다.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지도자들 또한 내가 일할 수 있는 짤막한 기간내에 파라다이스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인기가 좀 올라간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그들은 곧 냉냉해 질 것입니다.

  한 사람 지도자에게 걸었던 지나친 기대나 꿈은 언제나 실망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찾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각자 자기 할 일을 아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이천년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소중히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성경의 비밀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II. 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다

  쓰임 받는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귀한 사람에 의해 쓰임 받을 땐 더욱 행복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일입니다. 몹시도 추은 겨울, 눈보라 치던 날이었습니다. 쉬는 시간 아이들은 눈을 맞으며 신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영모야” 나를 불러 교장 선생님 사택에 가서 뭘 좀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야, 그때 얼마나 신이 났던지요.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나한테 심부름을 시켰다. 선생님 사택으로 달려가며 얼마나 흥분이 되었던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흥분이 되살아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길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장 소중하게 쓰임 받은 존재는 사람이 아닌 한 마리 어린 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 마을까지 왔을 때에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이 건넌 마을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 의하면 베다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면 큰 나귀와 작은 나귀 한 마리가 묶여 있을텐데 풀어 끌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작은 나귀 -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첫째, 예수께서 거기 나귀가 매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당시 나귀 한 마리는 우리네 농촌 황소 한 마리처럼 농사 살림 밑천이었을텐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점들과 함께 우리의 눈을 주목시키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에 없는 한 구절 주석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 마리 나귀 새끼가 쓰임받게 된 이 사실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에 공히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가 490년전 이미 예언했다는 이 내용은 마가나 누가에는 없는 공관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왕국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왕이라는 거지요. 지금 나귀 한 마리가 만왕의 왕되신 예수를 모시는데 쓰임 받았다는 것이 마태의 통찰입니다. 그것도 그 나귀 새끼가 이날 이렇게 영광스럽게 쓰임받을 것이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이 되고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향하여 이토록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어떤 계획을 어떻게 세워 놓으셨을까요? 여러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생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만세전에 작정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시려 독생자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을 버리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하고 맞바꾼 예수짜리 인생들입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아니할까요?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시시하게 아무런 의미없이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No. 아닙니다. 나귀가 수레를 끄는데 쓰임 받을 수 있고, 짐을 지고 나르는데도 쓰임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본문은 예수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런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 예수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고 황홀한 사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딤후 2장 20절 이하에 보면 심지어 이 땅에 몇 번 쓰임 받다 깨어지는 그릇 하나까지도 쓰임이 있고 쓰임의 목적이 있다고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습니다. 여기 큰집은 하나님의 집이요 그릇은 우리 인생을 비유합니다. 귀한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쓰임 받기에 합당하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를 가졌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형통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순간 순간, 자리 자리 마다 우리는 감격하며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응답이 나다! 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다!



III. 진정한 Lordship

  자, 이제 본문을 통하여 제기되었던 의구심들을 해결해 보십시다.

  주님은 마을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기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을 아셨을까요? 또 왜 남의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주인이 화를 낼 때 "주님이 쓰신다"고만 하면 나귀를 내어줄 것이란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뿐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가 쓰신다" 말 한마디로 괭이 하나 삽 한 자루가 아니라 나귀를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 주경가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그런 것 쯤 쉽게 아셨을 것이라고. 또 헌신되고 준비된 무명의 제자가 있었음을 알고 계셨다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런 것까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셨을까요? 분명 그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셀교회의 관점, 관계성 즉 공동체 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전체 그림이 아주 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한번도 예루살렘에서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베다니에 오셔서 주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입니다. 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있고 발 밑에 앉아 말씀을 즐겨 듣던 마리아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그를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 가난한 사람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을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어 소망과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저희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리우셨다고 누가복음 24장 50절-53절은 기록합니다. 그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우리를 구원하신 왕으로 입성하시는데, 그까짓 나귀 한 마리 바치지 못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이런 관계성 속에서 "주여, 여기 있습니다. 마음대로 쓰십시요" 진정한 Lordship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무명의 헌신자 나귀 주인이 나귀를 내어 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을 내어 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준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Lordship - 그리스도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권의식이란 단순한 헌신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 내 삶의 목적이 그분에게 온전히 연결되어지는 영광의 단계를 말합니다. 내 것과 예수님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바로 그때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게 되는 신비의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4:15)

  또한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의 한 가족이 되었기에 어디에 누구의 나귀가 매여 있고 어디에 어떤 나귀가 있는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쓰시겠다" 말하면 억지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흔쾌히 내어놓을 것도 아셨던 것이지요.

  이것이 천국가족입니다. 예수님과 베다니 사람들은 이미 천국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참 사랑은(Lordship)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IV. 가슴마다 예수의 피가 묻어야

  진정한 Lordship -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식은 - 예수께서 나를 사셨다. 나는 예수님의 것이다. 즉 구원 감사, 구원 감격으로부터 나옵니다.

  모두 예수님의 것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 부르면 오늘 가는 겁니다. 은사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살도록 주신 것입니다. 물질도 기업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것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말씀하실 때 베다니 사람들은 주님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3절 보십시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즉시 보내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 할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를 따랐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 - 큐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다."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때문에 참된 헌신과 봉사와 섬김은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 사랑이 없는 봉사, 감사가 없는 섬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땐 언제나 자신들을 방문하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따라 마을을 찾아오시지 않고 나귀만 요구하십니다. 그들은 이 길이 - 이번 여행이 어떤 길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여행이요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나귀를 드리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헌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흘러야 합니다.

  예배시간 찬양시간마다 찬양대가 찬양을 드릴 때 그 가슴속엔 예수의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마다 선생님의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목장 식구들을 가슴에 안고 기도할 때마다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Lordship이 나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예. 언제든지 저를 쓰십시요. 저는 주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것입니다.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 가슴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동·식물을 지으실 때였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깊은 생각에 잠기신 후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진홍 가슴새라고 붙여 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진홍 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매달렸는데 멀리서 보던 진홍 가슴새가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는지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뒤로하고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데, 그 가시마다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새는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로 날아가서 조그만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 하나 뽑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진홍 가슴새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갈보리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통 덧입혀져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V. 풀어 끌고 오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슴마다 예수 사랑으로 끓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과 맺은 그 사랑, 그 관계가 벅차 주를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풀어 끌고 오너라 !」 매인 나귀를 풀어 끌고 와야 주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본문 매여 있다는 말은 완료 분사로 마치 나귀가 자기를 풀어 가도록 기다리며 매여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사업과 물질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묶인 것들이 풀어지기를 빕니다. 주를 위해 바로 쓰임 받길 축복합니다. 질병에 묶여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묶인 질병은 풀어질 찌어다. 주신 건강 주를 위해 올바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자녀들도 헛된 곳에 묶어 두지 말고 풀어 주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주께서 쓰셔야 할 것들이 엉뚱한 곳에 쓰일 땐 풀렸던 것들도 묶여질 수 있습니다. 기회도, 명예도, 건강도, 물질도 주께서 묶으시면 능히 풀 자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 주님이 쓰지 않으면 내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지 않으면 결국 마귀가 나를 쓰게 됩니다. 내 시간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사탄이 침략합니다. 내 물질 주를 위해 쓰지 않으면 세상이 빼앗아가 갑니다. 내 육체 하나님 영광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노예 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주님 위해 영광스럽게 쓰임 받았습니다. 큰 것 드리려 하지말고 작은 것이라도 주님 위해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일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간밤에 목장을 방문하고 돌아온 어떤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 성도가 "내가 여러 교회에서 이사 다니며 신앙생활했고, 긴 인생 살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해 봤고 저런 일도 해 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다 해보았는데, 돌이켜 보면 미쳐서 교회 생활 할 때에, 지치도록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 할 때, 신앙생활 가장 열심히 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노라.”하는 고백입니다.

  이 집사님만의 고백이고 이 한 분만의 간증이겠습니까? 나의 고백이요 너의 고백이요 우리 모두의 고백 아닙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축복하십니다. 크게 받아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일하면 크게 부어 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자, 묶여 있는 자를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북미 지역의 한 산골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외딴 어느 산골에 요한이라는 남자와 그의 아내 베티와 그들의 어린 두 자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 나가 장을 보아야 하는데, 먼 길이라 일주일에 한 두 밤 정도는 꼭 마을에 나가서 자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무서운 일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시장을 보러 간 뒤, 아내는 빵을 굽기 위해 우선 장작부터 쪼개어야 했습니다. 그녀가 뒤뜰로 나가 도끼와 큰 통나무를 하나 집어드는 순간, 통나무더미 속에서 큰 독사뱀 한 마리가 갑자기 덥쳐 그녀의 넓적다리를 물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절망하거나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뱀의 독이 온 몸에 퍼질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우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은 살아 있어야 하므로 그들이 먹을 빵을 구워야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정신없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빵을 굽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뜨거운 여름이라 햇살은 따가웠습니다. 몸에 점점 힘이 빠지고 눈앞에 흘려졌습니다. 그녀는 큰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이제 곧 엄마는 아주 깊은 잠을 자게 되니 동생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 빵과 우유도 잘 먹이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하려고 마친 듯이 여러 곳을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녀의 온 몸은 땀에 젖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그녀의 혈관에서 독이 씻겨져 나와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축제가 있는 교회" 중에서)

  바로 여기에 사역의 신비가 있습니다. 일하면 삽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아멘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소서.

  주님은 여러분을 쓰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셀을 쓰기 원하십니다. 한국교회를 살리고 통일한국을 살려내고 민족을 살리고 역사를 살리고 세계 열방을 살려내기 위하여 이 교회를 쓰기 원하십니다. 주여 우리를 쓰시옵소서!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