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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향한 열망 / 히 11:1-10 (청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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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을 향한 열망
주제 : 하나님을 갈급함
본문 : 히브리서 11: 1-10
설교 : 정운종 목사 (대광교회)

나누는 책 :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필립 얀시)


Ⅰ 목마름 : 하나님을 향한 그 열망

필립얀시의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참된 크리스천으로 인정받는 여러 친구들을 방문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누군가 당신을 찾아와, 크리스천으로서의 당신의 삶이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도덕적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나의 이 질문에 가장 날카로운 대답을 해 준 사람은 기독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적인 신앙상담도 했다. 질문에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그는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나님이 선하다는 사실은 아무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갑니다. 그 분은 어떤 면에서 선합니까? 저는 얼마 전에 빌리 그래함의 딸이 심각한 가정 불화를 겪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함과 다른 가족들이 유럽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 함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빌리 그래함의 기도가 응답되자 않았다면, 저 같은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 과연 소용이 있을까요? 저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건강 문제, 딸과의 불화, 결혼 생활 등이 떠오르더군요. 저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어떻게 응답하실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잠깐, 놓치면 안되는 것 하나, 질문자와 답변자 상호가 깊은 공감을 대화 가운데 느꼈다는 것이다. 대화의 내용에서 찾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과 답변하는 사람의 한가지 공통된것에서 찾아야 한다. 둘은 깊은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열망 가운데 서로를 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Ⅱ.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 의심을 위한 공간 :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자신의 말에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군중들과 구경꾼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하나씩 빠져나갔다. 오로지 열 두 제자만 남았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이 물으셨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가오리까?”

터무니없어 보이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바보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믿음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자라나고, 당연히 왕성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는 약화된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확실함 속에 거하고 있는 사람이 믿음의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욥기, 전도서, 시편,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 등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품는 의심의 가치를 이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거룩한 성경 속에 인간의 의심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담, 사라, 야곱, 욥, 예레미야, 요나, 도마, 마르다, 베드로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충성스런 배반자였다. 그들은 의문을 품고 우물쭈물하며 반항하긴 했지만 여전히 충성스러웠다.

나는 복음서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모든 교리 중에서 필수조건인-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나는 점점 확실성보다는 신비로움 속에서 진정한 평안함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또한 나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위험이라는 요소를 동반하지 않으면 믿음도 있을 수 없다. 믿음은 목적지가 뚜렷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다음 단계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확신을 갖기 위해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다.

* 연단 받는 믿음 : 레슬리 뉴비긴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많은 확신을 품으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이다.”

관계는 완전히 파괴될 것만 같은 순간에도 깨지지 않고 남아있을 때 더욱 굳건하게 결속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한 이 원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깃든 비밀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에 올랐고, 욥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기를 긁어야 했다. 다윗은 동굴에 숨었고, 엘리야는 사막으로 힘없이 걸어들어 갔으며, 모세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할지 하나님께 물었다.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다가오는 위기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들은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분기점에 서 있었다. 화를 내면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 신뢰의 길을 택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신앙의 거인들로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제트기를 시험하는 것처럼 시험을 겪었다. 즉 완전히 파괴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용함의 한계를 측정 받기 위해 시험 당한 것이다.

생활의 궁핍함이 찾아오면 믿음의 중대한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나 심각한 가뭄이 몇 년이 계속될지라도, 백합화는 수고나 길쌈을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9장의 접근법을 보자. 그 이야기는 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의문점, 즉 질병의 원인에 대한 의문점에서 시작한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서 과적지향적인 태도로 예수님께 질문한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제자들의 관심을 미래지향적으로 바꿔놓았으며, “결국에 어떻게 되느냐?”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셨다.

성경은 “왜?”라는 질문처럼 원인을 묻는 과거 지향적인 물음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앞날에 대한 소망을 굳게 유지하고 있다. 고통이 변하여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해준다. 비극과 질병과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믿음의 실존적 위기를 불러온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명쾌함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뢰를 원하신다.

* 양면성을 지닌 믿음 :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위대한 신비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반대하시는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을 비난하는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니케아의 그레고리는 성 바질의 믿음이 ‘양손잡이’같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질이 오른쪽으로는 기쁨을 받아들이고 왼쪽으로는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두 가지 모두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는 요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나 배울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 나를 성장시켜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일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을 판단한다는 의미에서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 믿음 안에 살기 : 우리 교회의 빌 레슬리 목사는 종종 자신이 수동식 펌프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도움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은 물을 퍼올리기 위해 몇 차례 힘을 다해 펌프질을 한다. 레슬리 목사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조금씩 고갈되어 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결국 그는 영적인 고갈에 이르러,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답변은 이것이였다. “빌, 당신의 저수지가 말라버렸다면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군요. 더 깊이 파세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모하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가장 신중한 행동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비록 부패함에 둘러싸여 있지만 완전함과 우주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 일이 완성될 거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유일한 역사적 증거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 뿐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보류하게 함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를 압박해오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에게 일어나는 근심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그들이 나를 바람직하게 여기는지 항상 걱정한다.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방향 선회를 해야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최우선의 목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유혹들을 물리치고 과감히 돌아서야 한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기쁨을 나에게 돌려주신다.


Ⅲ. 하나님 : 보이지 않는 그 분을 찾아

* 하나님의 속성 : 하나님께서는 주저하신다. 그분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면 인간은 두려움에 떨며 땅에 엎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더 많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자제하신다.

하나님은 너그러우시다. 이러한 진리는 대조를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마가복음 9장은 귀신에 사로잡힌 아이에 대해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귀신은 사람을 불과 물에 던지고 사람 모양을 흉측하게 망가뜨리는 반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동일한 사람 안에 거하시며 “나를 상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유하시다. 나는 자유하신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분을 만나기에 적절한 환경 속에 나 자신을 두는 것 뿐이다.

주지해야 할 것은 능력이 강조되면 사랑은 감소된다. 물론 사랑이 강조되면 능력이 감소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강한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존경심을 심어주려는 부모는 높이 있게 마련이고, 아이들이 안아주고 애정을 표하려는 부모는 몸을 낮게 숙인다.


* 로제타 스톤 : 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왜 강이 범람해 어느 한 마을만 덮치는지, 왜 다른 아이는 걸리지 않는 백혈병이 특정 아이에게만 걸리는지-를 예수님께 배울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비극들을 어떻게 느끼시는가 하는 것은 확실히 배울 수 있다. 나는 나사로의 누이들, 아들을 잃은 과부, 성문 밖에 거하는 문둥병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얼굴을 드셨다. 그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로제타 스톤에 비유했다.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기 전까지 이집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집트의 상형 문자의 의미를 추측으로만 알고 있었다. 어느날 그들은 검은 돌을 발견했는데, 그 돌에는 헬라어와 일상적인 이집트 문자, 그리고 그 때까지 해독하지 못했던 상형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상형 문자를 완벽하게 섭렵했고, 그것으로 희미하게 알고 있었던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니버는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재구성’하게 하신다고 말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제대로 발견하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믿음의 로제타 스톤이신 예수님을 꿋꿋이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사람들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기대한다. 나약함보다는 강함을, 왜소함보다는 거대함을 기대한다. 예수님은 전혀 하나님처럼 보이시지 않는 분이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간청했다. 빌립과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리고 한편,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는 열망도 있다. 우리의 의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름과 불로 나타나시는 명백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모습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사이의 거대한 간격을 이 세상은 극복할 수 없다. 다른 종교는 예수님을 지혜로운 스승쯤으로 여긴다. 뉴에이지를 추종하는 자들은 좀 더 신비롭고 좀 더 개인적으로 만족을 주는 무언가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 최상의 표현인 예수님은 그분이 이 땅에 계셨던 시대에나 지금 우리의 시대에나 비슷한 거부의 반응에 부딪히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을 우리에게 자주 되물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곳으로 ‘오시라고’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여기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또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다.

* 열정 : 많은 신앙의 위인들에게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성공이나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노와 비난, 심지어 의도적인 불순종까지도 다루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한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무관심이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 한 분께 자신의 기쁨과 환희가 전달된다면 옷차림쯤으로 왕의 체면을 망치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열정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이 세상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하나님을 느꼈으며, 그런 마음은 통치기간 동안 온 나라에 퍼져갔다. 또한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듣고서 자신의 죄악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는 정말로 그런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 영적 기억 상실증 : “오직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망증을 경고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예언대로 하나님을 잊고 말았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서글픈 반응은 말씀에도 기록되어 있다.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잊었나니..”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그런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가? 날마다 올바른 길로 방향을 전화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방향 전환이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는 로렌스 수도사에게 배울 점이 있다. 그는 ‘하루 일과 속에서 이따금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그분을 맛보십시오. 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로렌스는, 영성의 깊이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바꾸는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함으로써 깊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말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실제로 거기 계신다는 감정적 확신만을 추구했었다. 어떤 때는 그분의 존재를 느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많았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두는 것으로 훈련의 초점을 바꿨다. 나의 감각이 그분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곁에 계신다. 나의 일상 생활을 하나님의 임재에 적합하게 바꾸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늘 행한 모든 일들을 마치 제물처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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