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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나야 천국갑니다 / 요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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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분:요한3:5-8 
제목:거듭나야 천국갑니다
설교:백장흠 목사 (독립문교회)


  중국 송 나라 때 주신중에라는 학자가 ‘인생 오계론’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다섯 가지의 계획을 올바로 세워야 합니다.
첫째가 생계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도를 말합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계획입니다. 직업의 문제입니다. 이게 분명해야 고생하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둘째, 신계라고 합니다. 요즈음 말로 건강을 위한 계획입니다. 내가 내 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심신을 강건하게 하는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나의 몸은 인격을 담은 그릇이요, 믿음을 간직하는 도구입니다. 건강을 인생의 기초공사라고 말합니다. 건강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셋째, 가계입니다. ‘가정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가정은 경제적인 공동체이며 사랑과 신뢰의 정신 공동체입니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화목이 중요합니다. 부부관계, 부모 자식 관계, 형제관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행복은 가정 설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넷째, 노계입니다. 노후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인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평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라고 합니다.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려고 하면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다섯 째, 사계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누구라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 분명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하여 분명하고 바른 계획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나는 천국에 가야 한다는 계획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듭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놀랍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변화되는 세상에서 살아나려면 자신도 달라져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바꾸세요. 먼저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언어가 달라지면 삶이 달라집니다. 부정적인 언어를 긍정적인 언어로 바꾸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상처받게 되는 말을,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을 넓고 깊게 해주는 말은 “미안해”라는 말입니다. 겸손한 인격의 탑을 쌓는 말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말은 “사랑합니다”이고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말은 “내가 잘못했어”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말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을 평안하게 해줍니다.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인상이 어떠하냐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언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화할 때에 음성을 들으면 매력적인 특성을 지닌 분이 있습니다. 어떤 언어입니까?

1) 음성은 성실성(Sincerity)을 나타냅니다. 바로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2) 지성입니다(Intelligence). 지성이란 상대방 입장을 잘 이해해 주는 겁니다.
3) 친근감(Friendliness) 입니다. 상대방을 따뜻하게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4) 감정이 살아있는 활기(Vitality)입니다. 기운이 없는 말은 힘이 약합니다.
5) 유연성(Flexibillity)입니다.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는 겁니다.
6) 표현력(Expressiveness)입니다. 목소리는 기쁨, 슬픔, 혹은 좋고, 나쁨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언어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 때문에 시험에 들고 상처를 입힌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바꿉시다. 말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언어보다 앞서 달라져야 할 게 있습니다. 생각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어진다고 합니다. 도전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건전하고 바른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생명이 바꿔져야 합니다. 이게 중생 혹은 거듭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육으로만 났으면 육입니다. 영으로 나야 영의 사람입니다. ‘하늘에 속했느냐 아니면 아직도 땅에 속해 있느냐’입니다. 하늘에 속해 있으면 하늘의 것을 추구합니다. 이런 이가 생명 있는 사람이요,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럼으로 생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먹어서는 안된다는 선악과를 따먹고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인간은 죽은 겁니다. 죽은 것은 육이 죽은 게 아니라 영이 죽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창6:3).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자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육의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롬8:7-8). 그럼으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사람 즉, 육의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고전2:9-14). 옳은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롬7:18).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육의 인간이 어떻게 신령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시체보고 아들딸 낳으라고 하면 낳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탄식이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게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이란, 바로 생명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거듭남이 있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바뀌어져야 영생입니다.

예수 믿고 술도 담배도 끊었다면 이게 거듭남인가요? 아닙니다. 새로운 출생을 말합니다. 생활이 약간 달라졌다고 거듭남이 아닙니다. 생명이 바뀌어져야 거듭남입니다. 예수 믿고 받은 은혜가 크고 많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고는 진정한 변화가 될 수 없습니다. 본인이 노력하면 약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거듭 나는 게 진정한 변화입니다. 생명은 근본이고 생활이 열매입니다. 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었습니다(엡2:1). 이 말은 영혼이 죽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말입니다. 분리된 게 죽은 겁니다. 그런데 새 생명으로 바뀌어지는 상태가 중생입니다. 거듭났다는 사람이 당장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답니다. 그 분이 미국에 산다고 당장 달라는 게 없습니다.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피부색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새 창조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입니다. 여자가 성숙하여 결혼하게 되면 그 여자는 변화가 옵니다. 몸 안에 남자의 씨앗이 들어갔기에 여자의 외형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입맛이 좋아지던지 없어지던지 합니다. 그 여인의 몸 안에서 생명이 성장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들어옴으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계란이 있습니다. 씨앗이 있는 하나의 계란이 있습니다. 즉, 유정란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무정란입니다. 즉, 암닭 혼자 나은 게 무정란입니다. 그 무정란은 아무리 두어도 계란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유정란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있기에 어미 닭이 20일만 품고 있으면 새 생명이 나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앗이 있으면 주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출생하게 됩니다. 이게 중생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씨앗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거듭남이란 니고데모가 말하는 대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례를 다시 받는 것도 아닙니다. 물세례를 제대로 받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일을 열 번, 백 번해도 거듭나지 못합니다. 외부적으로 행동이 약간 달라지는 게 거듭남은 아닙니다. 예수 믿고 노력하고 훈련하면 약간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날마다 신앙고백을 하고 정통보수를 찾는 게 거듭남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선행을 하고 착한 일 많이 하는 게 중생은 아닙니다. 경건한 법칙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 그것도 중생은 아닙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내는 게 중생이 아닙니다.

바리세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너희에게 임할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은사도 “거듭남은 아닙니다 병 고치고 능력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는데도 주님은 ’나는 너를 알지 못하노라‘ 라고 하신다“ 하였습니다. 거듭남은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되어지는 겁니다. 즉 재창조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관계회복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즉, 생명의 관계로 회복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겁니다(롬12:2).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물리적인 변화(Made of)는 성격과 성질은 변하지 아니하고 모양만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화학적인 변화는(made from)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 신자들이 겉으로는 달라진 것 같이 보입니다.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사상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삶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거듭남이란, 외모만 달라진 게 아니라 삶이 달라지고 사람이 변화된 것을 말합니다. 중생은 이론적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체험적이고 영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질문한다면 “언제부터 예수 믿으셨나요?”가 아니라 “언제 거듭났습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직분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가 되어 있습니까?” 이게 시급한 질문입니다. 거듭나야 산 생명입니다. 부모를 통하여 육의 생명을 얻은 거와 같이 예수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은 겁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하신대로 인간은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창2:17). 무엇이 죽었습니까? 육체는 죽은 게 아닙니다. 영이 죽었습니다. 죽음은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사는 이는 ‘살았다’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는 죽은 겁니다. 이게 영적인 죽음입니다. 거듭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살게 되었습니다.

거듭남이란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인이 되어있는 이는 세속주의자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었기에 이기주의자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내가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가 주인입니다.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1) 죄에 대한 태도가 다릅니다. 불신자들은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즉시 회개합니다. 그럼으로 용서를 받고 기쁨 속에서 참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2) 생각이 다릅니다. 불신자의 생각은 세상적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게 관심사입니다. 육신적으로 잘 살고 유익한 것을 생각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영생을 생각합니다. 그 나라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까를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달게 받습니다.

3) 실천력이 다릅니다. 세상에서 자기 편리한대로 삽니다. 그러기에 봉사다운 봉사가 없습니다. 영웅주의로 일합니다. 세상에 끌려 삽니다. 거듭난 그리스도 인들은 주님을 위해 삽니다. 고난도 기쁨으로 받고 감수합니다. 사람들이 툭하면 개혁한다고 말합니다. 개혁이 되는데 말로 됩니까? 억지로 될 수 없습니다. 거듭나는 게 개혁입니다.

4) 소망이 다릅니다. 거듭나지 못한 이들은 세상의 소망뿐입니다. ‘나의 모든 보배는 우리 집에 쌓였네’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 인들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둡니다. 목적지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버스를 타는데 빈자리가 있다고 아무 차나 타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맞아야 그 차를 탑니다. 세상을 사는데 편리한대로 사는 게 아니라 목적지가 같아야 그대로 사는 겁니다. 천국을 소망 삼고 사는 우리는 삶의 자세가 다릅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극장에 들어가려면 손에 입장권을 가져야 하듯이 천국에 가려면 거듭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데 “왜 믿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대답도 여러 가지일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 목표는 천국입니다. 천국 가려고 믿습니다. 세상에는 누구라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살고자 합니다. 그것도 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오래 살고 싶다면 죽지 아니하여야 하는데 사람은 누구라도 죽음을 맞게 됩니다.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워도 모든 사람에게 “사람이 행복하려면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행복은 일찍 죽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자살하지 아니하고 70세가 넘도록 살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죽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죽고싶지 않다면 천국에 가야 합니다. 천국 가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오해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는 누구냐?’ ‘그는 정치적인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요한3:2에니고데모도 예수는 ‘우리민족을 구원할 자’라고 알았으며 제자들도 ‘우리나라 해방될 때가 이때가 아닙니까’ 라고 행 1:6에서 물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도덕적 스승이라고 아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마가10:17-22
어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히 선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경제문제 해결자로 아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 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남은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6:1-15).
종교지도자로 아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마태16:14 “선지자 중에 하나로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병든 자들을 고쳐주는 의사로 본 이들도 있었습니다. 요한11:3에 병들었던 나사로 집에서 예수님을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구주이십니다. 죄와 사망에서 살리시는 구주이십니다.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요한10:10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한 대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는데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신앙에는 열심도 있어야 합니다. 열심은 믿음의 표현이지 구원 얻는 방법은 아닙니다. 은사가 있고 기적을 행하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모르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사람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마7:21-23).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듭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인간의 노력,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많이 안다고 거듭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당시에 산혜드린 의원이었습니다. 권력가입니다. 그가 묻기를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해줍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알겠는데 물이란 무엇입니까? 문자대로 물이 아닙니다. 토레이(R,A Torrey)는, 물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1:23에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 거듭나게 하는 겁니다.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평범하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만, 확실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유명한 목사님 중에 ‘위필드’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의 설교18번이 ‘거듭남’이라는 내용이었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청년하나가 자원하여 목사님 부흥회에 자원비서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전에 부흥사가 있으면 두 사람이 따라 붙었습니다. 찬송, 인도자, 그리고 하나는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가방 들고 다니다가 유명한 부흥사 된 분도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위필드 목사님을 따라다니는데 ‘설교내용이 거듭나야 한다’ 라는 겁니다. 무려 70번 이상을 합니다. 참다못해 목사님을 붙들고 “목사님은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려고 하십니까? 그 설교 질리게 들었습니다.” 이때 죠지 위필드 목사님이 하시는 말, “자네가 거듭나지 못해서 거듭나라고 그러는 걸세. 70번이 아니라 700번 들어도 거듭나야 하는 거야. 듣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실제 거듭나야 하기에 너 들으라고 한다”고 하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거듭나는 변화, 이게 영적인 변화, 생명의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의 체함을 함으로 복된 그리스도 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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