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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자답게 강건하라 / 고전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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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답게 강건하라 
고린도전서 16:13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가 20개 정도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교회가 있는데,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약점을 가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완벽한 교회나 이상적인 교회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끌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하고, 흠이 있고, 실수를 많이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약한 교회, 결함이 많아 고통을 많이 겪는 교회에 더 마음이 끌리곤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 면에서 탁월했고, 열심과 열정에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그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 늘 근심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그들이 가진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권면하면서 교훈한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본문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찰나입니다. 그런데 이때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를 위해 권면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힘주어 권면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이 말씀에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원문에 보면 "깨어라,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라, 그 다음에 남자다워라, 마지막으로 강하라."는 4개의 말이 독립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번역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번역은 이 4가지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번역해 놓았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깨어 있으면, 믿음에 굳게 서 있으면 남자답게 강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남자답게 강건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깨어 있으라.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번역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고통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굉장한 존재로 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일하고, 밤이 되면 자고, 또 다시 아침을 맞이하면 일어나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늙어가고, 죽는 반복된 삶을 살면서 한 생을 보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향해 예배 드리기 원하는 모든 성도들을 특별하게 보십니다. 곧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강한 자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에 펼 수 있는 능력자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자답게 강건하길 원하시지, 연약하고 힘이 없어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존재를 원치 않으십니다. 남자다운 강인함, 남자다운 용기, 남자다운 힘을 가진 성도가 되길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남자다운 것입니까? 어떤 것이 강한 것입니까? 고린도전서를 비교해보면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파쟁을 일삼았습니다. 서로 편이 갈려 비판하고, 욕하고, 미워하면서 싸웠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 같은 짓입니다. 영적으로 약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파벌을 지어 상대방을 헐뜯고 싸우는 교회, 전부다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 상대방의 허물과 약함을 덮어줄 수 있는 자, 누구나 각자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큰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강한 사람이요, 남자다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적으로 좋지 못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워낙 고린도라는 도시가 성적으로 부패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갑자기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옛날 습관으로 돌아가 성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남자답게 강건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거부할 줄 아는 힘을 가진 사람, 한 번은 죄를 범하더라고 회개하고 나서는 두 번 다시 그 죄와 손을 잡지 않는 내면의 거룩한 힘을 가진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고, 회개하고 나서는 또 죄를 짓고, 그래서 울고 또 기도하고, 그래도 다시금 죄를 짓는 것이 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짓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개인적인 문제들을 당사자들끼리 의논하고 합의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대도 불구하고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안 믿는 법관 앞에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내 재산이다 네 재산이다 하면서 서로 싸웠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입니까? 물론 법에 호소해야 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법정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차라리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욕되게 않도록 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법정에까지 문제를 끌고 가서 기어코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이단이 들어와서 성도들을 부추겼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그것은 바울의 이야기일 뿐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나느냐?" 그러자 약한 사람들은 믿음이 흔들리면서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답게 강건하다는 것은 내가 한번 진리라고 믿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이 진리임을 확인했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약한 부분을 극복하고 우뚝 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믿음이 흔들리는 나약한 자를 원치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내 젊음도 드리겠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도 주님의 것이오니 드립니다. 한번 밖에 없는 내 인생을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신앙생활 하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요즘에는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의 뉘앙스가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여성화가 너무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남자'는 강함과 용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맞벌이 생활을 하면서 가정의 경제권을 여자들이 일부 주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남성들은 과거의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로써는 세상에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남성 이미지, 즉 강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기를 지탱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마틸자 켄터는 "남성은 지금 혼란에 빠져서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헤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유형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 어떤 유형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남자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지금 미국의 경우 80%의 남편들이 아내와 함께 분만실에 들어가 고통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기저귀 광고에 아빠가 어린 애를 안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치약 광고에 아빠가 어린아이의 이를 닦아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분유 광고에 아빠가 어린 아이를 안고 등장합니다. 이처럼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미국에서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증축하려고 교회 설계를 맡겼는데, 나중에 완성된 설계도를 보고 그만 놀랐다고 합니다.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를 갈아 끼우는 받침대를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월 일본에 갔을 때, 어느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의 초등학교 남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15% 가까운 남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여자화장실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가정에서 엄마로부터 "애야, 서서 오줌을 누면 사방에 튀니까 앉아서 누어." 하고 교육 받아 와서 이제 앉아서 오줌 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 와서도 자기도 모르게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남자가 여성화 되어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자' 하면 부드럽고 섬세하고 자상한 이미지가, '여자' 하면 거칠고 강하고 박력 있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는 지금과 같은 그런 이미지로 남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강함의 상징으로, 여자는 부드러움의 상징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의 강함과 여자의 부드러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부부가 되게 하셨고, 남자의 강인함과 여자의 부드러움이 서로 뜻을 모아 세상을 헤쳐나가는 힘이 분출되도록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명령하십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느 세계에서 남자답게 강건하길 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아주 다른 두 세계가 있는데 우리는 이 두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면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 세계입니다. 하나는 공적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세계입니다. 하나는 육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입니다. 여기에서 외면 세계, 공적인 세계, 영적인 세게는 우리가 쉽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긴 모습이나 학벌, 지위, 환경을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 영적인 세계는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놓쳐 버리기 쉽습니다. 내면의 세계는 어떤 잘못이나 이상이 생겨도 금방 증세가 포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반된 두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명령하는 세계는 어느 세계입니까? 바로 내면의 세계입니다. 이 내면의 세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혼, 속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평범하게 표현하는 말로 바꾸면 마음입니다. 이렇게 내면 세계, 마음, 속 사람, 영혼이 남자답게 강건하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내면세계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세계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이새의 아들 7명이 서서 사무엘 앞에 선을 보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을 뽑으려고 하는데, 7아들 중 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인지 찾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외모가 아주 매력적이고 건장한 장자를 보자 '바로 이 사람이구나.' 하고 마음이 뺏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 내면세계, 곧 우리의 영혼, 속 사람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내면의 세계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눕니다. 이 내면의 세계에서 우리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속 사람, 내면 세계는 하나님의 눈이 떠나지 않으시는 거룩한 지성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너의 속 사람이, 내면의 세계가 남자처럼 강건하라." 왜냐하면 나의 진짜 자아는 내면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받쳐 줄 수 있는 받침대는 문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건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잘 짓고 튼튼한 건물은 내부의 보이지 않는 골조가 얼마만큼 튼튼하게 잘 설계되었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전찰을 많이 탑니다. 갈 때마다 제일 부러운 것이 이 전철 시스템입니다. 너무나 잘 되어 있어서 굳이 자가용을 끌고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리타 공항에서 내리면 특급 전철로 동경까지 옵니다. 그리고 동경에서 컨벤션이 모이는 하꼬네까지 다시 전철을 바꾸어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가면서 주변 경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집은 다 낮습니다. 지진 때문에 집을 높게 짓지 못하게 합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보면 변두리 도시나 마을 같은 곳에 높아야 2, 3층입니다. 그리고 그 집들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진이 나도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8~10층 되는 조그마한 아파트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진이 나면 저 아파트 어떻게 하죠? 왜 저렇게 높게 건축했죠?"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런 경우는 특수 공법으로 설계했습니다. 지진 강도가 7이어도 집이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내부 구조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런 아파트는 비쌉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의 10층, 15층 아파트와 다를 게 없지만 내부 골조가 강하기 때문에 지진 7도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겉으로 멀쩡하게 잘생기고 건강하고 남자다워 보여도 별볼일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자아가, 속 사람이, 영혼이,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강하냐 입니다. 그 사람을 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받침대가 얼마나 강한 지, 지진 7도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한 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현대인을 일컬어서 '쫓겨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경쟁 속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를 두고 정신 없이 쫓기고 밀리면서 삽니다. 그래서 무한경쟁의 전투병으로 최일선에 동원되어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화, 정보화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긋지긋 아픕니다. 국내화도 골치가 아픈데 세계화는 오죽하겠습니까? 책 한두 권 읽고 소화하는 것도 우리의 지성이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은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이 경쟁해야 되고, 같이 달려가야 되고, 같이 뛰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에게는 바쁜 것이 습관이요, 바쁜 것이 모든 삶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는 무서운 스트레스의 희생물이 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받는 이 외부적인 압박을 처리할 내면의 벽이 약해져 어떤 때는 붕괴될 때가 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무력증에 빠집니다.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뭔지 모르게,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떨리고 두렵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갑자기 잠이 달아나 버리고 어떤 생각에 집착하여 불안에 사로잡혀 한밤을 그대로 보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부로부터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는 증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속 사람이 약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내와 자녀들 앞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고 처신하는 남편, 아빠, 그러나 그 내면에는 흔들림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초조함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장에 가면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여러 번 전투를 해본 아주 노련한 지휘관입니다. 그런데 전투를 앞두고 있는 마당에서 블레셋 군대를 보자마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 마음이 크게 떨렸다고 나옵니다.(삼상28:5) 사울은 외관상 신장이 크고 건장한 사나이입니다. 게다가 왕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두려움 마음을 묶어 둘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수만 명의 군대가 있었지만 떨림으로부터 자기를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았지만 이미 사울을 떠난 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하시지 않자, 그는 너무나 불안하여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약해져 버린 사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전사하고 맙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흔들리면 우리의 전 인격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 사람이 강건하라고 말씀합니다. 똑같이 전쟁하는 마당이었지만 다윗은 달랐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18:29) 다윗은 사울처럼 그렇게 건장한 사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두려워 하거나 요동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는 속 사람이 남자답게 강건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내면 세계는 얼마나 단단하게 무장이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얼마만큼 힘을 갖고 있습니까? 어떤 압력을 받아도 붕괴되지 않을 만큼 여러분의 심령은 강하게 무장이 되어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세계를 남자답게 강건하게 하려면 2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에 굳게 서야 됩니다. 여기에서 깨어있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41) 그러므로 깨어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지 않고 졸고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영적으로 흐릿한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합니까? 요즘 좋은 예가 있습니다. 현 정부의 햇볕 정책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21세기에 가장 악한 공산 집단, 어떻게 보면 가장 무서운 독재정권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햇볕 정책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의 마음은 무장해제를 당해 버렸습니다. 안보의식이 흐릿해져 핵을 만든다고 해도 웃고만 있습니다. 불바다를 만든다고 해도 남의 일 보듯 합니다. 선제공격을 한다고 해도 웃을 뿐입니다. 핵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면 그것은 정치공세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결해야 되는지, 어디에서 정신을 차려야 되는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문에서 봤겠지만 프랑스 르 몽드(Le Monde)지가 우리를 비꼬고 있습니다. 북핵 때문에 전 세계가 지금 야단법석을 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흔치 않는 태연함이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 같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된 결과를 책임져야 됩니다.

영적으로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잠을 자면 마귀의 유혹이 지금 문 밖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이 세대가 지금 얼마나 무서운 상황으로 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눈 앞에 가까이 이르렀는지를 분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내 영혼이 병이 드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면 내가 죄 속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지금 죄를 짓는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우면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는 자기 머리털이 깎이는 줄도 몰랐던 것처럼 영적 으로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잠들기 쉬운 것을 피하려면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되 기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의 전문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적당히 해선 안되고 잘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입을 열면 정신 없이 쏟아 놓는 유창한 기도를 잘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도에는  침묵 기도도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도 내 마음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토할 수 있는 기도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과 만나 모든 사정을 고하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기도의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전문가가 되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전문가가 되려면 먼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개인 훈련이나 공동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선수가 경기장에서 자유 하려면 훈련이라는 무서운 규율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은 경기장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기도의 전문가가 되면, 어떤 시험이나 세상의 공격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에 게으르거나 서툴다면 내면의 세계가 약해져 있기 때문에 공격에 쉽게 당황하고 시험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루에 기도를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를 정하십시오. 기도의 목표를 가진 사람은 밤 1시, 2시까지 눈을 비비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일어나 기도해야 되는데, 어떻게 새벽 2, 3시에 자서 기도시간에 제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목표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즐거움까지라도 필요할 때는 양보하고 절제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 속 사람이 깨어 있기 위한 전문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일단 기도 기간을 정했으면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면서 기도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나 혼자 기도가 잘 안되면 공동체 기도에 참여해서 훈련 받으십시오. 새벽기도도 있습니다. 심야 기도도 있습니다. 다락방 기도도 있습니다. 중보기도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 기도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기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인터넷을 하면서 시간 보내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과연 몇 분의 일이나 됩니까? 물론 시간의 장단을 가지고 기도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5분도 눈감고 있지 못하는 삶을 가지고 영적으로 대단한 것처럼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힘을 못 씁니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30분은 기도한다. 아니면 15분은 기도한다. 기도가 잘 안되면 눈감고 앉아 있다가 일어난다."는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훈련 하듯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 나중에는 기도의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1~2분 하다가 벌떡 일어난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계속 지적으로도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 세계는 약해지고 붕괴하기 쉽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모르면 믿음의 뿌리를 박을 토양마저 없는 셈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식한데 어떻게 그 말씀이 내 길에 등불이요, 내 인생 길에 빛이 될 수 있습니까? 따라서 내 믿음이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든든히 뿌리를 박고 서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숙달되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분량으로 따지면 대단한 분량입니다. 더욱이 깨알 같은 글씨에 그림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책을 적당히 읽어 넘길 수 있습니까? 펴기만 하면 금방 내 마음에 감동이 올만한 그런 말씀으로 차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70%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적어도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숙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무장을 하는데 말씀은 검과 같습니다. 손에 칼을 들고 쓸 줄 모르면 그 칼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무장을 하려면 숙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놓고 묵상하며 생활합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시다. 우리의 삶 전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오늘날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살아야 된다. 나에게 일어난 이 조그마한 사건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석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을 가지고 우리가 사고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터가 굳어집니다. 그리고 나의 속 사람이 강해집니다. 

저는 설교가이지만 설교를 하면 할수록 성경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제 자신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침묵하시는가?' 성경에 보면 악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즉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너무나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우간다에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했던 폭군 이디아민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정치망명하여 그곳에서 28년 동안 배부르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낚시하고 수영하고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악한 정권이 지금까지 권세를 유지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왜 악에 대해서 이렇게 오래 침묵하실까요? 저는 그 숙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내 속 사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악을 보면 확신이 서지 않고 두려움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공부해야 되겠다. 하나님께서 악을 어떻게 다루시고, 악에 대해서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시는지 좀더 확인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에 전문가가 되십시오. 기도에 전문가가 되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뿌리가 깊이 박힙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의 속 사람이 남자처럼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속 사람은 남자처럼 강건합니까? 강건하면 앞으로 더욱 강건하기를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막강한 군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약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을 정복해야 될 하나님의 놀라운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강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남자처럼 강건하라."고 말입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향해 남자처럼 강건하라고 명령하셨사오니 우리 모두 그런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는 사람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함으로써 깨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젖음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강해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강자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병들고 악한 세상을 우리가 능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하고 정복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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