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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교회의 첫 설교(1) / 행 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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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첫 설교(1)
사도행전 2:14-21 
유흥준 목사 (전주광성교회)


갈릴리 호수 부근에 가 보면 베드로가 살던 집터가 발굴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지 순례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두는 베드로의 집터는 당시 다른 사람들의 집터에 비해 몇 배 더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생활에 여유가 있었고 큰 부유함까지도 갖추었을지 모르는 베드로, 그가 왜 모든 것을 던지고 제자의 길을 나섰을까요?

예수님 편에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닌 행적을 보면 성격이 급하고, 나서길 좋아하고, 큰소리 잘 치고, 잘난 척하고 그러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왜 부르셨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들어서고 또 오늘 본문에 들어서면서 그가 모든 것을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른 이유와 또 예수님께서 왜 제자로 부르셨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설교이며 동시에 베드로 자신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지극히 평범했던 베드로! 어부요 어쩌면 무식하기 짝이 없었던 그였지만, 그가 기독교 최초의 설교자로 우뚝 서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내일에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진 게 없고, 배운 게 없으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아니 나의 형편이 극히 힘든 상황일지라도, 현실을 살피면 내일의 기대를 걸 수 없는 그런 상황일 지라도 내일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를 변화시킨 그분이 여러분을 변화시키심을 믿습니다.
120명을 변화시키신 그 힘이 우리 교회를 변화시키심을 믿습니다.
어부요 주님의 배반자였던 베드로가 변하여 초대교회 최초의 설교자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이 변하여 강한 자가 되고,
부족함이 변하여 충만하게 되며,
사람중심 세상중심이 변하여 주님중심 교회중심이 되어짐을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사도행전을 살피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중심의 그리스도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날입니다.
한 곳에 모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던 120명에게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임하면서 각 사람에게 주워졌고, 120명 모두는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외국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로 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조롱하면서 저들이 새술에 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2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단락은 14-21까지는 <우리는 술 취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그 내용이 이루어졌을 뿐이다>라는 내용입니다(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단락은 22-36까지로 설교의 본론에 해당되며 예수님에  대한 증거의 내용입니다(다음주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 설교의 배경을 보십시다.

14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 베드로가 서서 설교할 때 열 한 사도들이 같이 서서 베드로의 설교를 후원합니다.

마치 대통령이 연두기자 회견할 때 국무총리를 비롯한 모든 장관들이 뒤에 서서 대통령을 받쳐주는 것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①이제는 12제자들이 모두 다 마음을 합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요? 성령이 곧 해답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그들은 서로 다투었습니다.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의 나라에서 내 아들을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0:24절에 보면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엄청나게 열 받았다는 것, 이를 빡빡 갈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이익만 생각하니 하나가 되고 단합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 성만찬이 있은 뒤 감람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했나요? 마태복음 26:33절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여기 있는 다른 제자들은 다 버릴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을까요? 혼자서 잘난척하는 베드로를 보고 씩씩거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러니 하나 되고 단합될 수 있었겠습니까?

마태복음 26:56절 하반 절에 <..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한 마디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이익만 취하니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요? 12제자가 함께 섰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힘 모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②베드로는 이에 힘을 얻어 더욱더 담대히 설교를 합니다.

이제는 같은 목표를 항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성령의 임하심이요 성령 충만을 받음입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 받으면 예수님 중심으로 굳게 결속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더욱더 예수님 중심이 됩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굳게 결속합니다.
내 이익만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지금 분열이 심할지라도, 지금 나 밖에 모를 지라도 성령 충만하면 12제자처럼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같이 일어섭시다. 그래서 교회 부흥을 이룹시다.
초대교회가 120명→3000명→5000명→셀 수없을 정도로 부흥된 것처럼 우리교회도 같이 기도합시다. 같이 전도합시다. 같이 몸 바쳐 충성합시다. 같이 땀 흘리고, 같이 울고 같이 웃읍시다. 나는 이일을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2) 베드로가 큰 소리로 설교합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4절은 세 마디로 요약됩니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모든 사람들아, 내말에 귀를 기울이라> 너무 담대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도망친 베드로의 모습이 어디 있습니까?


①베드로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큰소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만큼 자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이 설교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소리가 커집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설교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 할 것이다. <성령께서 이 시간도 제한 없이 저를 도구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믿고 단에서면 성령이 주시는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러니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여러분의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소리가 커지시길 바랍니다. 찬송소리가 커지십시오. 기도소리가 커지십시오. 전도소리가 커지십시오.
내 이익을 위해 큰소리치지 말고, 이놈 저놈 싸우는데 소리치지 말고, 남 흉보고 부정적인 말하는데 소리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좋아하실 일에 소리를 치십시오. 사탄이 좋아 할 일에 소리를 쳐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 소리 지르십시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찬양으로 소리 지릅니다. 그러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찬양이 한 구절만 진행되면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위로 해주심을 팍팍 느낍니다.
♪. 힘이 없고 연약하나 엎드려서 비오니 성령강림하옵서서 충만하게 하게 하소서 
♪.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더 이상 부르지 않아도 한 구절이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감싸 주심을 느끼면서 감사의 눈물이 흐릅니다.

또한 기도로 소리치십시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목이 터져라 기도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시니 점잖게 체면 차려 가면서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물론 거기에도 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중환자실의 응급환자처럼 위독한데 점잔만 빼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위기 중의 위기인데 내가 묵상기도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응급실 환자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 의사가 뛰어옵니다. 그래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우리 광성교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십시오.
그리고 소리쳐야 될 상황이라면 주저 말고 소리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프로젝트를 위해서 소리쳐야 합니다. 사도행전 프로젝트는 이 시대에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프로그램인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우리 교회들이 살지 못한다면 언제 무엇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어느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프로젝트는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가 동참할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라고...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소리쳐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소리침을 보면서 또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우리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선포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설교자에게 담대함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설교자에게 담대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회의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령께서는 모든 설교자에게 단 위에서 선포할 말씀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이때 담대한 설교자는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고 담대하지 못한 설교자는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 합니다. 사람 의식하게 되면 사람위주의 설교가 되고 그러면 그 설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못 한다면 그 교회의 미래는 캄캄할 뿐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모든 사람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베드로가 왜 이리 담대합니까? 지금 베드로 자신이 말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살펴봅시다.

이제 15절부터 설교의 내용이 나옵니다.


1) 불신자들의 오해를 풀어 주는 설교였습니다. 

15절에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는 성령님의 역사로 제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새술에 취한 것으로 생각한 자들의(13) 오해를 해명했습니다.
너희들이 우리가 술 취했다고 비난하는데, 때가 아침 9시(제 삼시)에 술 취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취한 것이 아니다>.
이대는 유대인들이 아침 기도를 하는 시간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그 시산에 술 먹고 취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아침은 정신이 가장 맑은 시간입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술을 좋아 하는 사람일지라도 아침에 술 마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술 중독자요 술고래라 해도 아침시간은 술 깨기 위해 해장국을 먹는 시간이지 그때 마시지는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저녁에 술 마시지 아침에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엔 상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불신자보다 죄짓지 않는다는 것 상식입니다.
그래서 불신 세계에서도 교회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술 더 뜹니다. 교회하면 사랑이 넘치고 거룩하고... 이것이 교회에 대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그 상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더 싸우고, 더 치사하고, 불신자들은 술 한 잔 마시고 악수 한 번하면 다 용서하고 끝내는데 교회에서는 한 번 원수는 평생 원수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을 보니까 <베뢰아 사람들을 신사적이라>고 평했습니다.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신사적입니다.
무너진 상식을 다시 세웁시다.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할 때 상식이 세워집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합니까? 성령 충만하여 나를 포기하면 됩니다.


2)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16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우리는 술 취한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구약성경 요엘서에 예언된 대로 성령이 임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이다>라고 16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엘서는 요엘 선지자가 B. C 830년경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데 요엘이 예언했던 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약 860년이 지나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지 그냥 우연히 임하신 게 아닙니다.
베드로는 경건한 유대인들, 율법과 예언을 아는 자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던 예언의 내용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차분하게 설득하면서 오해를 풀어 주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성려의 역사에 대한 불신자들의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방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애통하는 회개의 일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열성을 지니고 전도하는 일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도가 자기 재물을 희생하여 이웃을 구제하는 일도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열렬하게 찬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성도가 통곡하며 회개하는 것을 보고 이유 없이 운다고 오해합니다. 열렬하게 전도하는 것을 보고 광신자라고 오해합니다. 또 자신의 재물을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재 정신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라고 오해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이런 오해들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풀어줘야 하겠습니까?
먼저 베드로처럼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인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온유하고 차분한 자세로 해명해 주어야 합니다.
회개하는 일, 전도하는 일, 또 구제와 봉헌하는 일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명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무지합니다. 그러한 세상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조롱한다고 하여 그들을 대적하고 상종조차 않는다면 더욱 오해와 불신만 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오해에 대해서 이해심을 갖고 그들이 오해를 풀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도들은 성려의 은사를 선하게 활용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을 사랑하고, 그 몸과 영혼을 치유해주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구제해주는 일은 성령의 은사를 선용하게 활용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불신자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27).
여러분 성령의 은사를 나의 정욕과 탐심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악용하기에 불신자들이 비난하고 오해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성려의 권능을 받은 자답게 생활하는 모습을 불신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의와 선을 추구하는 생활, 용서하는 생활,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생활, 그리고 인내와 온유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입으로만 설명하면 불신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나의 거룩한 생활로 증거해야 비로소 이해합니다.

17-21절은 요엘서 2:28-32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라는 말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내 영이라는 말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육체라는 말은 자격 없는 사람에게도 부어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 구분 없이 지위에 상관없이, 성별, 연령,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때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주시고, 지금은 주시지 않고 가 아닙니다. 말세를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다 부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약속을 붙잡고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쉬임없이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보다 더 큰 힘이 있겠습니까? 성령의 도우심보다 더 큰 도움이 있겠습니까?
그럼으로 사람 의지 말고, 돈 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성령 충만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부어주신다는 말속에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비가 내리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보통비가 아닙니다. 소낙비도 아닙니다. 폭우성비, 그칠 줄 모르고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부어지는 비입니다. 바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되 흐르고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에 끝은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욕심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이 성령 하나님으로 제한 없이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하늘을 치솟고, 성령 충만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그러면서 어떻게 베드로를 꿈꾸고 바울을 꿈꾸겠습니까?


3) 성령이 임하시면 3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하기를 요엘선지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17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靈)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첫째는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라 했습니다.

구약시대 땐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선지자라는 말은 예언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자녀들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어린아이들은 한마디로 무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다 무지합니다. 그런데 성령 받으면 누구나 예언을 하는 권능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예언자라는 말은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섭리와 사람들의 운명을 미리 예고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미리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천국갈 수 있습니다>라는 말 보다 더 위대한 예언이 어디 있습니까? 점쟁이처럼 점치는 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확신합니다. 우리교회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도 중에,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미래를 말씀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하나님말씀을 선포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미래를 깨닫게 하여 알게 해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땐 어떻게 해야 될지를 알려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가르쳐 주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언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기도하는 여러분이여, 성령 받은 여러분이여, 예언의 눈을 들어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안심해도 될 상황입니까? 우리가 기도 소홀히 해도 될 상황입니까? 우리 민족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 같고 우리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긍정적인가요? 부정적인가요? 지금은 비상사태가 아닌가요?

①사무엘처럼 회개를 선포하십시오.

②예레미야처럼 눈물로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선포하십시오.
구약의 선지자처럼 예언자의 역할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바르게 진단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모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진단했습니다. 나라가 평안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예레미야만이 바른 진단하여 바른 예언을 했습니다. 바른 예언자가 많아야 살 수 있습니다. 받은바 예언을 잘 발전시켜서 자신을 비롯하여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② 둘째 성령이 임하면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환상이란 거룩한 비전(vision)을 가리킵니다. 젊음이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이가 어려서 오래 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젊음이 좋은 것은 환상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젊은이들은 가장 비판적이고 정욕적이고 낙심 잘하는 연령층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거의가 다 회의론자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정욕이 넘치는 연령층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곧잘 범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이 갖는 환상이 무엇인가요? 즐기는 것, 돈버는 것, 출세하는 것, 좋은데 시집 장가가는 것,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이생적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젊은이들이 성령이 임하시면 거룩한 비전을 가지게 됩니다. 아름다운 환상을 갖게 됩니다.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미래에 대한 환상이 있기에 젊음이 좋은 것이고 부러운 것입니다.
젊은 다윗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듯(삼상 17:36), 주님의 비전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젊은이들에게 성령이 충만하면 가장 값어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찾게 되고, 찾으면 그 일에 한번 생명 걸어 보고, 그 일에 엄청난, 어마어마한 꿈을 가져보고 도전합니다.
힘 있게 기도 할 수 있는 젊은 때에 기도의 도박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기 전에는 기도를 끝내지 않으리라. 무릎 꿇은 이곳에서 기어이 방언의 은사를 받고야 말리라.
나에게 맡겨진 교사의 직분, 내 반을 세계최고의 반으로 부흥 시키고야 말리라. 이왕 신앙생활 할 바엔 가장 멋있는 가장 믿음 좋은 신앙인이 되고야 말리라 얼마나 좋은 꿈입니까?
세계를 복음화 시키겠다는 환상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요셉은 17세 때 꿈을 꾼 뒤 종노릇하면서도 옥살이 하면서도 그 환상, 그 꿈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이루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자기 교회에 대한 환상도 크게 가져야 합니다.
초대교회처럼 부흥시키고야 말리라. 그래서 3000명을 가슴에 품고 5000명을 가슴에 품고 셀 수 없는 숫자의 영혼을 가슴에 품을 필요가 있습니다.
환상이 있는 교회가 미래에 승리합니다. 지금 많이 모이고 적게 모이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환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많은 환상이 자리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세계 최고의 교회를 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한 환상이 베드로보다 바울보다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미래를 원하시나요? 환상을 가지십시오.
좋은 교회를 원하십니까? 역시 환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③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들이 꿈을 꾸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꿈은 소망을 말합니다. 노인들은 소망을 상실당한 연령층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과거를 먹고 사는 사는 분들입니다. 지나간 낡은 사집첩을 뒤적이며 과거의 일로 위안을 삼는 분들입니다. 장차 그들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노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큰 소망 즉 꿈을 지니게 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게 아닙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지만 아들 얻는 꿈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있다가 80세 늙은 나이에 출애굽의 영도자가 되는 꿈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아무리 나이든 늙은 분들이라도 성령을 받으면 어린아이처럼 고운 꿈을 간직한 사람이 됩니다. 즉 천국의 소마, 영생의 소망이 그들을 즐겁게 만듭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으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거룩한 삶의 권능을 누리는 성도들이 됩니다.

외국교회에는 60대, 70대의 찬양대원과 교사가 많다고 합니다.
60대의 나이로 20대의 청년과 같이 찬양을 합니다. 그것이 주책입니까?
설문조사를 보니까 70대의 나이 드신 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재혼하고 싶고, 연예하고 싶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어떻게 하나님 일할 것인가? 어떻게 멋있게 살 것인가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외치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4)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종말 섭리의 계시를 알리는 신호임을 설교했습니다.

19-20절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하늘에서 땅에서 제한 없는 능력이 나타나고, 세상 멸망 즉 지구 종말의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21절 말씀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우리는 이미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내 중심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며 지켜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말 섭리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섭리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받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설교한 것입니다(37-39).
성도여러분 이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즉 기쁜 소식입니다. 성도들이 전해야할 복음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 종말이 온들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종말은 결코 두려운 게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벌 심판을 전하고 죄를 비판하되 그 해결 방안도 함께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영원히 청산해 주셨으니 그 사실을 믿는 자는 값없이 구원 얻는 다는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해야 합니다.
아울러 성들의 언행은 궁극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은혜로운 모습과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늘 심판하려는 태도, 용서하지 않는 모습, 정죄와 비판만 일삼는 모습들은 주님을 배척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나 다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전도도, 생활도 주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손길을 나타내는 것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모신 자답게 이제는 변하도록 합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도록 합시다.

성령 충만 받은 성도답게 주님 위해서 한 번 생명을 걸어봅시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성령의 제한 없는 능력을 나타내 봅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들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베드로처럼, 제자들처럼 한번 일어서 봅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 있고 담대하게 구원의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을 외치며 오히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킵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모시고 있고 성령 충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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