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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길 /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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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길(요 2:1-11)
이름: 이한규목사([email protected]
     

< 풍성하신 하나님 >

사람들은 가끔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수님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영적인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새 성경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하는 수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하인들을 부리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예수님의 가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난하신 분'으로만 보지 말고 '풍성하신 분'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풍성하심이 우리의 삶에 곳곳에 보이지 않게 미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된다고 너무 높아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반대로 일이 안된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쁜 일도 인생의 한 부분에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월드컵 때 이을용, 안정환 선수가 페널티킥에서 실축하자 히딩크 감독은 "그것도 게임의 일부입니다(That's a part of the game)"라고 말했습니다. 고난도 인생의 일부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우리에게는 고난은 있어도 불행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동물농장에 위대한 수탉이 있었습니다. 이 수탉은 태양을 뜨게 하는 수탉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이 수탉이 "꼬끼오!" 하면 태양이 떴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이 위대한 기적의 사도 수탉을 존경했습니다. 동물농장 가족들은 근처 동물들에게 "우리 수탉님은 태양을 뜨게 한다!"고 열심히 선전했습니다. 이 수탉의 힘으로 동물농장은 엄청나게 부흥했습니다.

동물농장이 커지면서 가축들은 걱정했습니다. "저 수탉님이 병들면 어떻게 하나!" 수탉 자신도 생각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해가 뜨지 않아서 다 죽을 텐데. 그런데 내 아들 수탉이 쓸만하니까 내가 죽으면 아들 수탉에게 해 뜨게 하는 일을 맡겨야 하겠다." 걱정도 팔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수탉이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수탉은 자기의 사명을 생각하며 걱정했습니다. "내일 아침은 어떻게 하나?" 다른 가축들도 "이젠 망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해는 여전히 떠올랐습니다. 그 다음날도 해는 여전히 떠올랐습니다. 그때서야 동물농장의 가축들은 수탉에게 속은 줄 알고 동물농장을 떠나 지금 그 동물동장이 큰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동물농장의 가축들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계시면 희망의 해는 여전히 떠오를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가끔 수탉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큰 일 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분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되어도 높아지지 말고 일이 안되어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을 세세하게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모든 상황을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필요한 3가지 이해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야를 열고 보면 우리는 매일 기적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 말고 어떤 특별한 기적적인 역사를 기대합니다. 특히 삶이 힘들고 어려운 때는 그런 기적이 나타나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기적을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기적이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해야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지는 잘 모르고 인생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에 오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에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을 보면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3가지 이해가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임을 이해하는 것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했습니다. 누구의 혼인잔치였을까요? 아마 이 신부가 예수님의 친척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예수님의 여동생 중 하나의 결혼식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 결혼식에서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3절).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데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사소한 것까지 와서 얘기해야 합니까? 그냥 하인들에게 빨리 포도주를 사오라고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사소한 문제까지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니까 위대한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거룩한 분이니까 거룩한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필요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에 관심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는 수치를 당한 사람들이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있지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옥에 있는 사람과도 함께 하시지만 파티에 참석한 사람과도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순교자 콤플렉스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자주 파티에 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즐겁게 사셨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마 11:19). 그처럼 예수님은 음울하고, 엄격하고, 감정이 질식할 것 같은 종교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그곳에는 사람 사는 맛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Wherever Jesus went there was life and joy). 그런 기쁨이 있는 곳에 기적도 일어납니다. 기쁨이 질식하면 삶에 기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공도 올 것 같다가 기쁨이 없는 모습을 보면 그냥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나 기쁨이 있으면 아무리 큰 고난도 곧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는 사람, 기쁨을 주는 사람, 만나면 편한 사람, 만나면 즐거운 사람,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 또 만나고 싶은 사람,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믿음이 좋은 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부인하며 항상 갈등 콤플렉스, 상처 콤플렉스, 순교 콤플렉스 가운데 살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순교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순교는 하나의 신앙 과정이 될 수 있지만 순교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안에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요 15:11).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교자적인 삶만 살라고 하며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그런 것들은 필요 없어! 신앙생활에 그런 것이 왜 필요해?" 하면서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매몰차게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에 너무 평범한 것이 없습니다(There is nothing too ordinary to pray about). 우리는 사소한 문제, 평범한 문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큰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의 작은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왜소한 신이라면 오직 중요한 일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대한 신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들을 돌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장면도 보시고, 우리의 머리칼이 얼마나 되는지도 세시고 있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의 이름과 형편과 지질과 환경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매일의 삶에 대해서도 상세한 부분까지 다 아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관여하시고, 붙드시고, 가장 적절한 조치를 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다 아뢰는 모습은 예수님을 귀찮게 하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대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인정과 이해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기적을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변화를 주시는 분이심을 이해하는 것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을 때 겉모습이나 색깔만 포도주로 물리적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을 포도주로 화학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순간 신부 가족들의 수치가 기쁨으로 변했고, 파티의 분위기도 변화되었고, 11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에게 외적인 어떤 것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은 외적인 무엇을 얻는 축복이 아니라 내적으로 변화되는 축복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내적인 변화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큰 일도 내적인 변화입니다. 사실상 기적 중의 가장 큰 기적은 내적인 변화의 기적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매일 그런 기적을 일으키시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포도밭을 갔다가 실제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처음에 빗물이 땅에 떨어지고, 포도나무가 그 물을 가지까지 끌어올리고, 그 물은 포도즙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 즙이 자연적인 발효 과정을 거치면 그 즙은 맛있는 포도주가 됩니다. 그처럼 지금도 수많은 변화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은 그런 변화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변화를 추구합니다.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몸무게를 줄이고, 얼굴을 아름답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보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변화의 기적을 소리 없이 날마다 행하십니다. 그런 사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에게 동시에 깨달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는 한계가 없다(There is no limit to his grace)"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주신 것은 충분한 만큼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항상 충분한 것 이상을 주셨습니다(What God gives is never just enough, it is always more than enough).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항상 필요한 것 이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할 때도 충분한 만큼만 창조하지 않으셨고 충분한 것 이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가끔 화원에 가서 수많은 꽃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만 감동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산과 들에 자연적으로 만발해 있는 꽃을 보면 그 자연미로 인해 더 아름답게 보이고 더 감동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이 매일 일으키시는 기적의 산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바다의 깊은 곳에도 환상적인 색깔과 미를 가진 창조물들을 두셨고, 땅 깊은 곳에도 금과 보석들을 두셨습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로 하나님은 지나치게 많은 턱을 쏘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세세한 부분까지 관심을 두시고, 관여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에는 경이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물을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성자로 변화시키고, 두려움을 용기로 변화시기고, 슬픔으로 기쁨으로 변화시키고, 패배를 승리고 변화시키고,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고, 죽음을 삶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둘 때 반드시 삶에 기적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을 주시는 분임을 이해하는 것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합니다. 본문의 결혼식장에는 약 100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가 6개 있었습니다(6절). 그러므로 항아리 전체에 약 600리터의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손님들이 그렇게 많은 양의 포도주를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포도주를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꼭 맞게 주시지 않고, 항상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것도 제일 맛있는 포도주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 명의 남자와 그 가족들을 먹이실 때도 예수님은 12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필요한 것 이상을 주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주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고 디모데전서 1장 13-14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가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부자입니다(We may be poor according to this world's standards, but we are rich toward God).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We may have nothing, but have everything).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수많은 축복을 과도하게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편 145편 15-16절 말씀을 좋아합니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상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사랑하지만 우리를 축복해주시는 일도 사랑하십니다(Not only God loves us, but also God loves to bless us).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해주셨고, 현장에서 간음죄로 잡힌 여인에게 놀라운 은혜와 용서와 삶의 용기를 주셨고,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도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구하는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 나중으로 갈수록 좋게 하시는 하나님 >

지금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까? 지금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나중으로 갈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웠을 때 연회장이 포도주 맛을 보고 그 놀라운 맛에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그처럼 예수님은 항상 마지막까지 최선의 것을 남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내놓지만 점점 나빠집니다(The world puts its best up front and things go downhill from there).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것을 내놓으실 때 '좋은 것(the good)'부터 시작해서 점점 '최상의 것(the best)'이 되도록 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사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구까지 채워진 상태입니다. 그처럼 나중으로 갈수록 커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으로 들어가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전혀 꿈꿀 수 없었던 장면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최상의 모든 것들을 최상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 마음속으로 가장 열망했던 것을 얻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일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 영접하고 천국에는 꼭 가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23) 그 순간, 환상적인 기쁨이 우리를 덮치고 상상할 수 없는 축복된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며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가장 최상의 것을 남겨두셨군요(Lord! You have saved the best till now)."

성경은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세상이 지금 줄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것은 앞으로 주어질 더욱 최상의 엄청난 것의 맛보기일 뿐입니다. 그런 천국의 최상의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포도주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고갈될 때에야 예수님이 주실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을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음식값은 천국의 음식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포도주의 값도 바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그처럼 사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천국의 음식값과 예수님이 주시는 포도주 값이 치러지고 바로 그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진짜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처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올 때 예수님은 풍성한 생명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에 임할 때 예배 중에 변화와 치유와 축복과 은사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주시는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 놀라운 축복의 포도주를 받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공허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의 어머님이 하인에게 말씀하신 대로 따라보십시오.

예수님의 어머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Do whatever he tells you)."고 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여러분들의 삶에는 놀라운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항상 말씀대로 살려고 함으로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이끌어내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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